장-피에르 멜빌 | 그림자 군단


Sabbath님이 열정적으로 보고싶다는 소망을 피력하셨던 바 있는 장-피에르 멜빌의 영화 <그림자 군단> 완전판이 마침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의 친구들영화제에서 상영된지라, 일종의 뽐뿌를 받아 상영 당시 보러 갔다. 워낙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가 재밌다는 얘길 많이 들은지라 조금 기대를 하면서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관한 영화라 내 취향에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게 웬걸. 이 영화는 매우 절제되고 건조한 이야기 진행에 매우 서정적인 음악이 기묘하게 충돌하는, 아니 그리하여 한차원 더 높은 멜랑꼴리를 만들어내는 그런 영화였다. (매우 취향이라는 얘기다.) 음악 얘길 꺼낸 김에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음악 외에도 전반적인 사운드 효과가 아주 인상깊었다. 특히 비시정권 본부로 호송된 제르니에가 탈출하는 장면에서, 빈 골목에 가득 울리는 제르니에의 발자국 소리와 헉헉대는 숨소리가 갖는 일정한 리듬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리노 벤추라와 장-피에르 카셀(뱅상 카셀의 아버지인 프랑스의 명배우), 시몬 시뇨레 등 한때 스크린을 풍미했던 위대한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레지스탕스를 그린 영화들의 흔한 상투성을 반복하지 않는다. 모두들 언급하는 대로, 고독하고 과도한 비장미를 풍겨대는 후까시 고뇌의 영웅들이 아니라 은신과 도망, 그리고 싸움과 엄격함과 금욕이 피로한 일상이 되어버린, 그러나 그 일상을 매우 성실하게 영위해내는 ‘보통사람들’로서의 레지스탕스를 그린다.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 청년. “조국을 너무나 사랑해서”와 같은 낯뜨거운, 그러나 대단히 선동적인 신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화면은 과장된 어리광의 비장미 대신, 절제된 슬픔과 인간 본연의 고독이 가득하다. 혹독한 조건 위에서 묵묵히 손에 피를 묻힌다. 총에 맞는 순간, 마틸드는 어쩔 수 없이 살고싶다는 욕망과 동지들에 대한 원망 사이에서도 차라리 동지들 손에 죽는 것이 행복하다는 상반된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들소’처럼 우리 역시, 마틸드를 죽여야 한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는 강경한 제르니에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질리고 거부할지언정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스러져간 목숨들이다. 딸의 불행 앞에서 이성을 잃는 어머니, 왜소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40대 중년의 남자, 연이은 고문을 받아 피떡이 된, 더없이 허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노인.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은은한 빛이 난다. 첫 임무를 배신자 처단으로 받아 패닉 상태에 빠졌던 ‘마스크’ 클로드가 영화 말미에서 더없이 침착한 태도를 보이듯, 어느덧 살인과 처단에 익숙해지는 자신들을 보며 그들 스스로도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으랴. 그러나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전 모두 체포돼 죽음을 맞고 만다. 그들은 진정 그림자로 존재하던 군대였고, 그림자의 운명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아무런 영광도 기쁨도 없이, 보상도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


아마도 이런 ‘건조한’ 터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멜빌의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첫 개봉 당시 비시정권에 우호적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모양인데, 아마도 장 웬 감독의 <귀신이 온다>가 중국인에게서 ‘일본에 우호적’이라 평가받은 것은 물론 한국의 영화평론가한테까지 ‘허허실실의 역사인식'(심영섭)이란 오해를 받은 것과 비슷한 궤일 것이다.

ps 1. 멜빌 영화들을 쭈욱 보고싶은 욕심은, 작년엔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을 한번 했었기 때문에 당분간 이뤄지기 어려울 듯. 그러나 올해엔 장 르노아르 특별전이 있다!


ps 2. 내가 본 버전은 완전판, 복원판 등으로 불리는데, 애초 개봉되었을 당시 잘려나간 10분을 복원했을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카날플러스에서 완전히 새로운 프린트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1969년 영화를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프린트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도 부러운 일인지. 이번 친구들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김기영 감독의 <고려장>이 프린트 2권이 분실된데다 비내리는 화면(이나마도 영상자료원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프린트 세척과 복원을 하고 빠진 부분 줄거리를 자막으로 삽입한 버전)으로 본 것을 생각해보면, “진정한 영화강국” 프랑스가 부럽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나 워낙 열정적인 사람들이 제도권 안팎에서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 역시 그 빛을 분명 조만간에 볼 것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11 Comments

  1. 꼭 봐야 할 리스트에 있었는데 불행히도 마지막날 급작스런 일이 생겨 가지 못했답니다!
    전 Red Circle을 봤는데 정말.. 대단한 영화였죠
    헌데 프랑스는 예전의 영화강국이라는 말이 더 맞겠죠..?
    요즘 프랑스 영화들을 보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듯해요. 잘은 몰라도 ^^;
    하지만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정말 너무나 훌륭하더군요 ㅠㅁㅠ
    역사보존’에는 과연.. 프랑스는 진정 강국이 맞는 것 같아요.

    -장 르누아르 특별전 정말 기대되요 :) < 임의 규칙>을 dvd로 봤는데.. 오..

    • 이런…!
      아무래도 멜빌 특별전 다시!를 열심히 기원해봐야겠는걸요. ^^

      ‘진정한 영화강국’… 전 단순히 한 해에 찍어내는 영화 편수나 수입액만으로 영화강국이나 아니냐를 가를 순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프랑스 영화계에 헐리웃의 블록버스터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최근의 프랑스 영화들이 좀 지지부진해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프랑스 영화들이 워낙 많으니 판단하기가 곤란하고, 또한 프랑스에서 (물론 자기네들이 영화 모국이란 자부심 때문이겠지만) 사회전반적으로, 그리고 영화를 사고하는 마인드와 영화에 들이는 그 정성 및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진정한 영화강국’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이는 그간 영화노동자들의 투쟁의 성과이기도 하지요. ^^

  2. 멜빌 회고전 재청이요! 멜빌 팬이긴 합니다만 저도 [사무라이]~[형사]의 후기작 네 편이랑 초창기의 [도박꾼 밥]만 봤어요. 그나마 필름으로 본 건 [그림자 군단], [붉은 원], [형사] 뿐이고. 2004년 12월에 이걸 열심히 챙기질 않고 뭘 했는지…

    말씀하신 표현이 딱 어울리는데요, 멜빌이 만들어낸 “해야 할 일이니까” 하는 사람들의 세계에는 정말이지 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위의 결과보다는 행위 자체/행동 양식 자체에 의의를 두고 살아가면서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그게 안 되면 산산이 부서져버리는. 멜빌은 그렇게 엄격하게 살지 않으면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나저나 저는 장 르누아르 영화를 한 편도 안 봤습니다. 두 장 씨 감독님을 교환해서 올해 말에는 제가^^;;

    •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하는 것뿐”이라는 태도엔 아마도, 약간의 회의적인 시선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랑하는 조국’ 어쩌고를 절대로 믿지 않는 저이지만, 그렇다고 비시정권에 빌붙어먹는 것도 영 싫으니까요. 뭐 일제시대를 생각해본다 해도, 전 절대로 독립운동씩이나 했을 거 같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일본에 빌붙기도 싫었을 거 같고…

      만약 제가 전쟁시에 살았더라면 장-프랑수아(장-피에르 뱅상)의 형처럼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그 형제가 잠깐 마주앉아 식사하는 장면에서 장-프랑수아가 ‘난 형과는, 만난지 얼마 안 되는 마틸드만큼도 공감대를 못 느낄 것이다’라고 내레이션을 칠 때, 어쩌면 형 역시 동생에겐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어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어요. 그 장면에 흐르던 형제간의 단절된 느낌이라면, 서로 몰래 그렇게 활동하면서도 서로 그렇게 비밀에 부칠 수도 있다고… 마치 장-프랑수아가 동지들에겐 ‘난 이쯤에서 빠지겠다’고 해놓고 제발로 수용소에 걸어들어갔듯이요. (익명의 제보로 체포됐다 했지만 아무래도 장-프랑수아의 결연한 얼굴을 정면에서 그토록 오래 보여주는 장면 때문인지 제겐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더군요.) 그런 식의 진행에서, 멜빌 특유의 멜랑꼴리한 정서가 나오는 거 같은데… 제가 멜빌의 다른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 좀 조심스럽고…

      장 르누아르는 저도 아직 한 편도 보질 못했어요.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3. 앗, N.님, 설마 N.님도… 장 프랑수아의 형 얼굴을 잊어버리고 계셨습니까아. 장 프랑수아 자르디(!)의 형이 바로 뤽 자르디, 레지스탕스 대장이에요. 저는 그 형을 그냥 무심하게 살아가는 엑스트라처럼 취급하며 기억에서 지워버렸다가 나중에서야 깨닫고 ‘헉’ 했습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다시 생각해 보면 장 프랑수아가 달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에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대장’을 보트에 태워 잠수함까지 데려다주는 장면은 얼마나 가슴 시린지요. (그런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셨는데 그런 형의 분위기를 느끼신 N. 님도 대단!)

    • 앗… 뤽 자르디가 장 푸랑수아의 형이었군요… 그러고보니 나중에 imdb에서 영화정보를 찾을 때 장-푸랑수아의 성이 ‘자르디’라는 걸 본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형과 뤽 자르디를 연결 못 시키다니 ㅠ.ㅠ 말씀하신 그 잠수함에 태우는 장면에서 ‘평범한 사람이다’ 어쩌고 하는 대사 때문에 헷갈렸던 거 같아요. (그러나 이건 스스로 바보라고 고백하는 거나 다름없군요. 하하;;)
      제가 그런 설정을 상상했던 건… 아무래도 멜빌 감독이 식사장면에서 그런 삘을 마구 내주셨던 걸 캐치한 거구나, 싶네요. 제가 대체로는 좀 둔한 편인데, 이건 제가 멜빌식 장면 암시에 아주 빠르게 익숙해졌다는 증거일까요? ^^;;

  4. 장피에르 멜빌 영화중에 사무라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 구하려고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에도 가보고 dvd시장에도 가봤지만 못구했습니다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00선에 포함되어 있는 영화인데 굉장히 스타일리쉬한 흑백영화로 알고있습니다 이 영화 소장하신분 저에게 꼭 보여주시길….

  5. 제가 아는 분들이 혹시 계신 것 같은 느낌에 글을 남겨요.
    뭐, 상관없는 일이지만..

    < 다의 침묵>도 함께 추천하고 싶어요.
    독일 장교가 점령 치하의 파리를 둘러보는 장면이 왠지 짠했습니다.

    그리고, N님!
    장 프랑수아는 익명의 제보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제보로 들어간 것 아닐까요?
    그가 조직에 빠지겠다는 편지를 쓰고 나서,
    가위를 들고 신문지에 들이대는 쇼트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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