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 스쿠프

코폴라는 우디 앨런을 ‘진정한 작가’로서 노상 부러워했다는데, 이번 주 씨네21의 정성일은 그가 ‘세련된 취향을 가졌을지언정 진지한 작가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음, 정성일의 그 글을 대충 ‘건너뛰기 독서’를 하다가 이 구절을 보니, ‘작가영화’하면 뭔가 졸립고, 진지하고, 유머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우울하고, 언제나 인상을 찌푸린 채 인간과 사회와 우주에 대해 고민을 늘어놓는 영화들이어야 할 것같다. 실제로 ‘진지함’이라는 게 촌스럽고 안쓰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 세상이니, 그런 ‘진지한’ 작가영화들이 뭔가 ‘대단한 것’으로 격상시키는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또다시, 소위 ‘천박한 대중’과는 유리된 채 난척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 같은걸. 나같은 ‘천박한 대중의 일원’은 가까이 하면 안 될 것같은… 그러니 잉그마르 베르이만에 대한 내 개인적 애정은 꽁꽁 숨겨두고, 우디 앨런을 작가영화에서 제해주신 그 센스에 오히려 고마워하도록 하자. 모든 작가(오퇴르 auteur)들이 스타와 작업하길 기피하지 않았으며 – 오히려 기회가 된다면 열렬히 그 기회를 이용했으며 – 때로 상업영화 씬에서의 성공을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사적으로 은밀히 기억할 일이다. 고다르라 해서 별로 예외였던 것같지도 않다. 하여간에.


오리지널 포스터는 좀더 어두운 분위기


우디 앨런이 스칼렛 요한슨과 작업을 해주시는 바람에 <매치포인트>와 <스쿠프>가 일반 극장가에서 개봉했고 그래서 설비 좋은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겐 행복한 경험이다. 나야 스칼렛 요한슨도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숀펜과 작업한 <스윗 앤 로다운>도 개봉되지 않았고, 그나마 휴 그랜트가 나왔다고 <스몰타임 크룩스>가 하이퍼텍 나다 정도에서 개봉했던 걸 생각해 본다면, 메가박스니 CGV니 하는 극장에 버젓이 우디 앨런의 영화가 걸리는 건 내게 어떤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애니씽 엘스>는 또 얼마나 초라하게 개봉했던가. (물론 헐리웃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유>는 그나마 좀 많이 걸렸었다. <마이티 아프로디테>는 동숭?) 작년 5월경, 필름포럼에서 우디 앨런 특별전을 할 때 본 다섯 편의 영화들을 아무디 다시 되새겨봐도, 우디 앨런의 영화가 주는 유쾌발랄함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웃음, 그리고 그 사이로 가슴 싸하게 만드는 어떤 슬픔이 한국의 관객들과는 어쩜 이렇게 궁합이 안 맞는지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우디 앨런의 여주인공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엽냔 말이다.


난 풍만한 섹스어필로만 이미지가 굳어가는 듯한 스칼렛 요한슨을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덜렁이 아가씨로 그려준 우디 앨런 영감이 너무 고마웠다. 약간 탁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우디 앨런 식 대사들을 다다다다다 내뱉는 스칼렛 요한슨은 더할 나위없이 ‘우디 앨런식 여주인공’으로 보인다. <애니씽 엘즈>에서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던 크리스티나 리치와 달리, 스칼렛 요한슨은 왕년의 다이안 키튼이나 미아 패로만큼의 오오라엔 못 미쳐도, 그들의 그 지적인 분위기와 달리 약간 맹하면서도 더없는 사랑스러움으로 나름 새로운 우디 앨런식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매치 포인트> 이후 우디 앨런이 스칼렛 요한슨과 또 한편의 영화를 찍고있단 소식을 접했을 때만도 그저 ‘아, 요한슨이 이뻤나봐’하고 말았는데, <스쿠프>를 보고나니 그 양반이 왜 요한슨을 탐냈는지 알 것같다. 우디 앨런은 그녀의 영민한 재능과 아름다움을 높이 사고 자기 영화에 잘 어울릴 거라 예측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자기 나이보다 대여섯 살에서 많게는 열 살 위의 여자를 연기하고 있는 이 조숙한 여배우에게 자기 나이에 맞는 ‘놀이로서의 연기’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영화 안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샌드라(혹은 제이드)를 바라보는 우디 앨런의 눈에 어찌나 애정과 기특함이 담뿍 들어있던지.


아아 너무 귀엽고 예쁜 요한슨 양. 휴보다는 우디와 더 잘 어울리는.


마지막 엔딩을 보며, 왠지 찡해져왔다. 샌드라를 자기자식처럼 그리 염려하고 아끼다가 결국 죽음을 맞고는, 저승사자의 배 안에서도 여전히 너스레를 떠는 그 코믹한 시드니의 에필로그가, 내겐 극중 인물인 시드니의 말로라기보다는, 우디 앨런 자신의 실제 심정을 토로하는 듯이 느껴졌다. 많은 감독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며 우디 앨런 역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그 길을 생각해 보는 것이겠지. 하긴, 난 언제가 될지 몰라도(되도록이면 아주아주 나중이었으면 좋겠다) 우디 앨런이 실제로 죽는다면, 저승사자의 배 위에서도 여전히 코미디 영화의 디렉션을 하며 주절주절 수다를 늘어놓을 것같다. 바로 시드니처럼.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12 Comments

  1. 우디앨런을 몇번 직접 보았지요. 영화에서 보이는 패션과 얼굴..그 이미지 그대로 컬럼비아대학을 걸어다니더군요. 그게 벌써 십년전이니…설연휴..잘 지내시죠? 제가 좋아라하는 사람소개가 나와서 인사드려요. 우디앨런. 그 강박관념하고는…

    • 우디 할배는…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일 거 같아요. 제게는, 그 소심한 편집증과 강박증을 가지고도 유쾌하게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며 힘을 주신 분이랄까요. 하하;;

  2. 바리님,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 그리고 조만간 아트시네마에서 보자구요 d^^b ‘나~이쓰’

    • 나뭉님 < 랏> 너무 좋아하신다… ㅋㅋ
      나뭉님도 복 많이 받으시고, 아트시네마에서 자주 뵙죠. ^^

  3. 스칼렛 요한슨…우디 앨런뿐만 아니라 타블로이드까지 엄청 즐겁게 해주고 있더군. 본인도 되게 즐거운 것 같고…ㅋㅋ…예쁘면 어쩔수 없다?

    • 스칼렛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을 완전히 장악해버리는 아름다움이라, 외설 운운이 오히려 굉장히 강력한 여성적 힘을 과시하는 걸로 보여. 마릴린 몬로와 굉장히 비슷한 전략을 충실히 답습하는 것같으면서도, 마릴린과 달리 사진을 찍는/찍게하는 자마저 장악해 버린다는 데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오. 스칼렛은 그래서 더욱 너무 좋고, 마릴린은 그래서 가슴이 좀 아프고… 전적으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극의 여인인 듯.

  4. 스칼렛에게 안경을 씌워 준 우디 앨런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
    최근 몇 년 동안 우디 앨런의 영화가 예전과 달리 재미있더군요.
    수다의 묘미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 그러게요. 그 땡그란 안경이 어찌나 귀엽던지 말입니다. 그러고서 다다다다~~~~ 대사하는 걸 듣다보니 말투를 막 따라하고 싶어지더군요.

      전 < 하탄>이나 < 니홀>도 굉장히 좋아해요. < 이로의 붉은 장미>는 너무 아프게 봐서 차마 감상문을 쓸 수가 없었고요. (사실 세 영화 다 펑펑 울면서 봤다는…) 언젠가 우디 앨런의 전작을 하나하나 다 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5. [스쿠프]의 그 황망한 자동차 사고 뒤로 저승길을 여행하는 우디알렌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던데요. 확실히 스칼렛 요한슨을 얼마나 예뻐하는지도 눈에 보이고, 그녀에게 내재한 매력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클래식 음악도 맘에 들었고, CGV의 쾌적한 환경에서 감상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얼마전 우연찮게 우디알렌 박스셋을 구해서(사실 우디알렌의 영화도 열 편 가까이 dvd를 모아둔 것 같은데), 그의 작품을 천천히 돌려봤습니다. [맨하탄], [애니홀] 저도 무척 좋아한답니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가장 마지막에 봤어요. 그걸 보고나면 우디알렌의 영화가 아니라도 영화 자체를 보기가 좀 그렇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참 아픈 영화거든요. 미아 패로우의 심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일반 관객의 입장이라면 더더욱.

    어쨌거나 전 우디알렌의 작품들이 대체로 상향평준화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의 수다를 제법 즐긴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말이죠. 아마 그가 가는 날까지 그의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까 싶네요.

    • 우디알렌 박스셋! 우디알렌 박스셋! 우디알렌 박스셋!…
      부럽습니다… ㅠ.ㅠ
      맞아요, < 이로의 붉은 장미>… 참 아프죠. 미아패로의 심정도 절절이 와닿고요.

  6. 우디앨런 영화에서 가장 돕보이는 것은 앨런 그자신이 아닌가 생각해요 맨하탄과 부부일기 그리고 스쿠프 밖에 못봤지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우디 앨런의 편집증적인 대사 내뱉기 그 사이에 고심히 단어선택을 하는 표정 상대방을 쳐다보는 말똥말똥한 눈 ㅋㅋ 그 감독 너무 사랑스럽다!!

    • 이 양반이 약간 불쌍하게 생긴 구석이 있어서… ㅋㅋ 캐릭터도 좀 그렇고요. 근데 그런 캐릭터를 다른 젊은 배우가 하면 맛이 안 나더라고요. 제가 < 니씽 엘즈>를 < 하탄> 속편처럼 느끼면서도 영 정이 안 가는 게, 딱 젊을 적 우디 할배 캐릭터를 제이슨 빅스가 하는 게 너무 이상하고 어색해서랍니다. 말씀대로 가장 돋보이고, 정말 사랑스러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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