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베스터 스탤론 | 록키 발보아 Rocky Balboa


과욕의 주책인가, 아름다운 투혼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당혹스러움은 아마도 내가 아주 젊은 나이도 그렇다고 4, 50대의 장년층도 아닌 나이이기 때문이리라. 한 인간으로서,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자신 안에 열정과 야수를 품고있고, 그렇기에 그 열정을 좇아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추락하는 남자와는 또다른, 건강한 땀냄새와 활활 타오르는 열정, 더욱이 그것이 인생의 비애와 슬픔과 고통, 좌절과 소중한 순간의 고귀함과 기쁨을 아는 자가 신중하게 태워나가는 열정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내가 록키를 보며, 씨네21에 실린 한겨레 김은형 기자의 ‘노추’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내내 곰씹고 당황했던 건, 록키의 크루(crew)에 속해있던 록키의 아들, 록키 주니어와, 마리의 아들 스텝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말해두자. <록키 발보아>는 아주 잘 만든 영화이다. 영화에는 이제 안정된 삶을 누리는, 그러나 점점 메인 무대에서 밀려나가는 사람이 그 안정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자신 안의 열정을 발산하기 위해 새삼 성실하게 노력하고, 다시 한번 도약하는 이야기이다. 벌써 여섯번째에 달하는 속편이 이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경이롭다. 속편답게 전편들의 화면을 매우 유효적절하게 이용하면서도, ‘우려먹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아주 짧은 커트로만 삽입되어 있는데, 이는 적재적소에서 과거 록키 시리즈의 팬들에게 충분히 향수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한편, 세월이 가져온 변화와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매우 훌륭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클래이맥스인 메이슨과 록키의 경기 장면은 복싱영화들 중 그 어떤 작품에도 뒤지지 않을 명장면으로 매우 스타일리시하게 연출되어 있다. 일단 경기 시작을 위해 양 선수가 입장하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들을 마치 TV를 통해 중계 화면을 보듯 연출하면서 이 경기에 열광하는 관중들(실제 경기장의 관중들뿐 아니라 TV 앞에 모여있는 시청자들까지)의 모습을 하나로 연결한 것은 곧 세대와 장소의 구분, 세월이 가져온 변화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이는 스크린 밖에서 16년만에 록키 시리즈의 새 속편이 개봉하면서 옛 팬들과 새로운 젊은 영화관객들이 한 스크린 앞에 앉는 현실의 모습과도 그대로 겹친다. CG 효과와 카메라 앵글의 시점을 적절한, 이러한 TV 중계화면과 같은 효과는 경기의 2라운드까지 계속되는데, 여기까지는 물론 경기를 지켜보는 구경꾼으로서의 시점이며, 두 선수의 전력을 가늠하게 해주는 매우 객관적 위치에서의 시점이다. 그러나 3라운드로 가서부터는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링 안에서 록키와 메이슨을 따라잡으면서 복싱 메인 경기의 박진감과 파워풀한 힘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장면들에서 쓰인 여러 가지 화면 트릭들은 깔끔한 편집과 함께 대단히 효과적인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러면서도 관객을 아주 빠르게 경기에 몰입시키는 한편 록키의 관점으로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카메라는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분명 외부에 존재하는데도, 철저하게 록키의 시점샷인 듯한 착각을 줄 정도로 록키에게 감정이입하도록 만든다. 이는 단지 내레이션의 사용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내레이션은 거의 마지막 라운드, 록키가 쓰러질 무렵 단 한 번 삽입된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는가? 노익장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과정에 있어 자신의 친아들 및 아들뻘(혹은 손자뻘)의 인물을 철저히 자신의 응원자 위치로 내려보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잔뜩 주눅들어있었던 록키 쥬니어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방식이라는 게, 심지어 직장도 때려치고는 (관중석이 아니라) 록키 바로 뒤에서 팀원으로 등장하는 것이라니? 게다가 마리의 아들 스텝마저 이 꼴로 등장한다. 젊은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뒤에서 수발들고 응원하는 자리로 기어들어오게 만드는 아버지란, 아무리 겉으로 친절하고 다정할지 몰라도 자식의 인생을 끝까지 틀어쥐고 흔드려는 과욕과 폭압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록키 발보아가 김은형 기자의 지적대로 ‘노추’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책’같은 말로도 부족하다. 스탤론도 조금은 쪽팔리는 게 뭔지 알았던지 경기의 승패를 판정에서 결국 록키가 지는 걸로 설정해놓긴 했지만, 만약 경기마저 이기는 것으로 설정했다면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집어다 스크린을 향해 던졌을지도 모르겠다.



가뜩이나 사회가 무한경쟁화 하면서 젊은 아이들이 취직을 못 하고 그 결과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부모와 기성세대에게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그런 사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여건을 만들어놓고는 자립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향해 그 나약함을 성토하고 꾸짖는 것까지야 기성세대의 특권이라 인정해준다 쳐도, 자식 길을 틀어막고는 기어코 자신의 들러리 세우는 부모라니, 젊은세대를 자기 기리 가도록 응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영광에 봉사하고 응원을 바칠 것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할 것을 요구하는 기성세대라니, 내가 <록키 발보아>를 보면서 결코 감동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건 보수를 넘어서 ‘수구’라고 부를 만하다. 아무리 그게 ‘아버지들의 판타지’라 해도.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나도 지금의 20대를 위해 내가 어떤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무얼 남겨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과연 나는 록키를 보며, ‘나도 록키처럼 나이 먹어도 내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며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내 앞에 길을 막고 서서 자신에게 영광을 바칠 것을 강요하는 기성세대의 가랑이 밑을 언제까지 기고 있어야 할지를 걱정을 해야 하는가. 그게, 내가 <록키 발보아>를 보면서 느낀 당혹스러움의 정체다.

ps. 영화에 대한 불쾌감과는 별개로, 엔딩타이틀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뛰어올라 섀도 복싱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클립은 30년에 걸친 한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아주 적절하고도 감동적이다.

+ 20:50, Mon. Feb.26, 2007 피카디리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9 Comments

  1.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굉장한 시대적 리얼리티를 담게 된 것 같습니다. 보수와 다른 수구반동의 특징은 변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한다는 점입니다. 뒷세대를 착취하고, 또한 과거를 착취해서, 새롭게 변조된 영웅-신화를 만들어내지요. 퇴행도 변화이니까요.

    •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지고 개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완전히 다른 아버지를 보여준단 말이죠. 게다가 그 영화는 스탤론과는 반대로 영웅신화의 탈신화화를 꾀하고 있고요. 스탤론은 이스트우드에게 볼기짝 몇 대 맞아야 한다, 뭐 이렇게 쓰려다가… ^^;

      사실 이 영화 한 편만 보면 록키가 굉장히 ‘소박한’ 아버지인 건 확실합니다. 수구반동 이런 말을 붙이기가 좀 미안할 정도로. 그러나… 30년을 이어온 미국의 대표적 대중신화 중 하나라는 측면을 절대로 간과할 수가 없고, 그렇기에 더욱 무거운 의미들이 생겨나는 것같습니다.

  2.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록키 1편이 1976년작이로군요. 전후 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해이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제2의 진주만공습(경제적인 의미지요)을 시작하던 무렵이군요.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시기이고, 오늘날의 네오콘의 주역들이 하나둘 화려하게 데뷔하기 시작할 무렵이지요. 록키 시리즈가 마무리되는 지금, 일세를 풍미한 미국의 신보수주의도 황혼을 맞는 것 같습니다. 록키는 미국 신보수의 흥망과 “운명을 함께했다”고까지 생각되는데요?^^

  3. 다들 비슷하게 보시는 것 같네요. 영화는 재미있었으나 바로 앞 타임에서 본 < 버지의 깃발>과 비교할 때 너무 노골적인 영웅신화의 복권을 꾀하는 듯 보여 보는 내내 탐탁치 않았습니다. 역경을 딛는다는 게 나이라는 탈계급적인 소재에 국한돼 아쉬웠고요. 록키는 뭐니뭐니 해도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하층 노동자가 세상과 맞장 뜨는 것이 포인트였는데, 그러기에 이탈리안 레스토랑 사장 록키는 한계가 명확했나 봅니다. 모 노트북 광고에서 지겹게 듣는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도 거리적거렸고요. ^^;

  4. 앗. 제가 본 리뷰들은 모두 ‘감동’을 얘기하시길래 제가 너무 지엽적인 걸로 꼬투리 잡고 있는 건 아닌 게 했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군요. ^^하긴, 가장 완고하게 보수적인 사람들은 원래 은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죠.

    그나저나 이제서야 록키 오리지널을 보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하층 노동자가 세상과 맞장 뜨는’ 것은,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소재인지라.;; 이제까지 < 키>를 하나도 안 보고, (TV에서 해준 걸 어릴 적 별 생각없이 스쳐지나간 기억만…) < 키 발보아>부터 덜컥 봐버렸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 키 발보아>에 대해 쓰고나니, 새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존재가 너무 고맙지 뭡니까. 너무 멋진 아버지 아닌가요… ㅠ.ㅠ

  5. 뒤늦게 글을 보고 올립니다. 제 생각은 좀 달라요. 록키는 철저히 록키라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애인이자 아내였던 애드리안 역시 ‘록키’의 애인이자 아내였던 것이고, 영화에 등장했던 수많은 등장 인물 역시 록키라는 ‘개인’의 존재를 서포트하는 역할 이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덕분에 록키 시리즈 후반기는 그 ‘개인주의’의 한계를 곳곳에서 그러내고 있지만요. 이번 록키 발보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록키의 개인주의는 변하지 않았어요. 그는 아버지, 가장이라기 보다는 늙어가는 한 개인, 애드리안까지 암으로 죽고 홀로 남겨진 개인인 것입니다.

    물론, 글쓰신 분 말대로 젊은 세대의 역할이 너무 가볍게 다루어져 있다는 것은 저도 동의를 합니다. 아버지의 그림자에게 못벗어나는 아들과의 대화는 너무 짧고 일장연설로만 채워져 있고, 인기가 없어 고민하는 현직 챔피언은 너무 평면적이죠. 마리 아들 스텝스는 펀치 이름 지을 때 빼고는 존재감 조차 없네요. 하지만, 이 영화를 주변인이 아닌 록키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보면 멋진 영화입니다. 스러져가는 개인이 마지막으로 무엇인가를 보여고 멋지게 은퇴하는 그런 과정을 감독의 혼을 담아 보여주고 있고, 제 마음을 움직이게 했으니까요. 최소한 전 스탤론한테 클린트 이스트우드 정도의 수준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 어차피 영화가 록키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고, 게다가 록키라는 저 거대한 시리즈의 영광스러운 완결편이니 록키 팬들이야 다른 조연 생각않고 그냥 록키에게 집중해서 감동하고 끝나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 키 발보아>는 록키 한 사람과 그 록키에게 100% 응원과 성원을 바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죠. 그러니 스텝이건 아들이건 그 아주머니건 왕년의 코치건 심지어 맞붙어 싸우는 선수의 코치건 모두가 심지어 생업도 다 팽개치고 다 달려가 록키 응원하는 게 이 영화에서는 아주 당연하고,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 있어서도 (감독의 의도를 일백퍼센트 따라주는) 아주 바람직한 관객의 자세가 될 겁니다.

      다만 전, 그렇게 ‘개인의 아름다운 투혼’이 가끔 본인도 인식 못하는 사이에 옆사람에게 민폐 끼치고는 그게 민폐인지 아닌지 깨닫지도 못하고 상대는 상대대로 상처받고,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스탤론을 통해서 확인했다는 것뿐입죠. 그리고 제가 굳이 존재감도 없는 스텝이나 쥬니어를 굳이 눈에서 지우지 못하고 록키를 선뜻 응원하지 못하는 것도 소수의 권력있는 노인네들이 자리 틀어쥐고 앉아 (다른 권력없는 노인분들은 완전히 소외당하고) 나이 서른 중반이 돼가도록 ‘젊은 애송이’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거 고령화 사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2010년경엔 한국에서도 나이 40이 되도록 여전히 ‘젊은이’ 취급을 받게 된대요. 그때 되면 인구 통계학적으로 ‘중간나이’라는 게 42세인가 그렇거든요.)에 지나치게 상처를 받고 있어서겠죠.

      근데 문제는 그렇게 상처받는 게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거고(저성장 고령화 사회, 게다가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확산, 양극화 심화 등등), 그렇기에 < 키 발보아>가 전혀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런 식의 ‘노추’ 내지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사회적 맥락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청년실업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고 좁은 나라인 한국에선 더욱 그런 맥락을 덧입기 쉽고요.

      다시 말하면. 님하고 저는 감상 포인트가 다른 겁니다. 뭐 저도 록키에게 환호를 해주고 싶고 그러려고 극장 가서 본 건데, 감독과의 의도와도 제 원래 의도와도 달리 아버지 그늘 밑에서 기도 못 펴고 살다가 ‘약해빠졌다’는 소리나 듣고 직장 때려치고 와서는 아버지 응원하고 있는 록키쥬니어와 하는 일없이 빈둥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듯한 스텝스가 록키 팀에 들어와 응원말고 하는 일 없이 있는 게 영 눈에 거슬리더란 거죠. 그걸 보고 영화보는 관점이 ‘틀렸다’라고 말할 순 없는 거겠죠. 전 이렇게 봤고 님은 그렇게 보셨고, 그렇게 보라고 만든 영화를 이렇게 본 제가 그렇다고 틀린 거 같진 않고. 사람의 말이라는 게 난 A라는 의도를 갖고 말해도 꼭 A로 전달되는 것만도 아니고 심지어 A란 의도란 거 알겠는데 그것은 완벽히 B로도 해석될 수 있다, 라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데, 하물며 “영화”인데요…

  6. 기성세대를 위해 자식들이 봉사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윗세대의 말을 들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웬지 사춘기 반항아적인 냄새가 풀풀 풍기는 글인 것 같다. 자식들에게는 살날이 아직 많은데 그정도 봉사는 해 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마음의 여유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아마 이글쓴 사람은 부모한테 억하심정이 많을지도…

    • 맥락도 모른 채 그저 지나가다 내뱉는 훈수질은 ‘노추’만 드러낼 뿐이랍니다. 그냥 지나가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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