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프리어즈 | 더 퀸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영화는 영국의 여왕, 특히 지금도 영국에서 왕으로 존재하면서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에 있는 엘리자베스 2세를 중심으로, 다이애나가 죽은 직후 1주일간을 그리며 영국의 군주제라는 정치 시스템이 현재 처한 상황을 분석한다. 큰 줄기를 보자면, 다이애나가 죽고 아무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던 영국왕실이 여론의 뭇매를 맞다가 노동당 블레어 총리의 설득에 결국 대국민 생방송 추도사를 발표하고 모든 왕궁에 조기를 게양하며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게 스토리의 다다. 대통령제의 공화정이 마치 정치 시스템의 다인 듯 느끼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그저 다이애나의 죽음을 둘러싼 남의 나라 가십거리를 다룬 영화 정도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독재체제를 경험했고 여전히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 이 영화가 던져주는 의미는 그렇게 가벼운 것만이 아니다.

다이애나 생전에 엘리자베스 여왕과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음은 전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영국 왕실이 보인 ‘냉담한’ 태도는 아주 쉽게 왕실의 ‘쪼잔한 완고함’으로 비난받곤 한다. 하지만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군주의 내적 갈등이란, 다이애나에 대한 사적 감정 차원이 결코 아니다. 애초에 영국 여왕이란 존재 자체가 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려니와 – 그녀는 영국 그 자체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 , 그녀의 갈등은 자신, 나아가 영국 전체가 기반하는 엄격한 전통과 법도를 어느 선까지 수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이다. 물론 국민의 집단적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국민의, 혹은 국민의 대리자들의 승인을 거쳐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그 누구든 엄격하게 준수하는 데 있다. 입헌군주정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군주조차 헌법 아래에 있다는 얘기고, 군주조차(아니 군주부터) 법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이애너’라는 존재가 갖는 특별한 위치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다이애너는 왕족의 친모이지만 이혼을 통해 공식적으로 왕가를 떠난 사람이다. 이 사람을 왕족으로 예우해야 하는가, 아닌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자의든 타의든) 평민의 신분이 된 남자는 평민인가, 왕족인가?

이것은 매우 소소한 물음 같지만, 법으로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례는 어떻게 해석하여 처리해야 하는가? 라는, 민주주의 / 법치국가에서 상존하는 어려운 물음의 매우 구체적인 버전이다. 왕실이 취한 입장은 엄격한 규범의 준수인데, 이것이 ‘인정머리 없다’고 도의적 비난을 받거나, 해석상의 문제에서 이견과 반박을 받을 순 있을지라도, 절차적 / 규범적 측면에서는 하자가 없으며 충분히 이유가 있는 선택이다. 왕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엄격한 법도와 규칙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사람이라 하여 예외로 치는 건 과연 합당할까? 왕실과 영국 전체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이애너의 존재가 이제껏 내려온 왕실의 법과 규칙에서 예외적인, 전례가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다이애나’라는 개인이기에 예외를 허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애나’의 특수한 위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따라 왕실의 법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단지 ‘다이애나’ 이기에 예외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은, 법과 규범의 존재 이유를 무색하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여왕의 완고함이 더 나쁜가, 법질서의 침해가 더 나쁜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막 신임 총리로 선출된 토니 블레어의 행보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토니 블레어의 정치 감각을 균형있는 것으로 그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가 포퓰리즘에 영합한 마마보이에 불과하다며 조롱하고 있다. 스티븐 프리어즈는 이 영화에서, 선거 당시까지는 영국 내 개혁세력의 최선두였고 노동당 출신의 최연소 수상 피선출자였음에도 임무를 시작하자마자 지독하게 보수화해버린 토니 블레어의 근원적 한계를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조의를 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개혁의 최선두로 격식을 지양하던 그가 한편으로는 여왕의 존재에 경도되어 여왕을 한껏 방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왕에게 ‘왕위 자리가 위험하다’는 일종의 ‘협박’을 통해 (규범 해석상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다이애나 한 사람에게 왕실 법도의 예외를 구하는 내용을 ‘권고’한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지만 왕이 버킹검 궁에 거하고 있지 않는 경우 그 어떤 상황이든 – 심지어 왕의 친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 버킹검 궁에 왕기가 게양될 수 없다. 국민들은 왕궁에 조기가 게양되지 않았다며 분노하고 왕실을 비난하지만,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해 왕실은 설사 버킹검 궁에 조기를 게양하고 싶어도 게양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의 요구 중에는 다이애너를 당연히 왕족으로 예우할 것은 물론 “모든 왕궁에서의 조기 게양”까지 포함되어 있다. 토니 블레어의 행보의 근원은 뛰어난 균형감각과 타협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민주주의의 적이다. 다이애너의 죽음에 대한 왕실의 대응이 결코 합리적이었다 할 수는 없지만, 왕실을 설득하는 근거는 포퓰리즘에 기댄 정치가 아니라 법과 규범의 가치를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 이의 해석과 적용의 범위에 근거해야 했다.

지금의 영국 여왕이 ‘역사상 최장 재위기간’을 자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헌법에 근거해서다. 입헌군주정 하에서는 왕의 자리를 두고 더이상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일어날 수 없다. 반면 이것은, 시스템이 만약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군주정을 포기한다면, 지금의 왕실은 그 즉시 평민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토니 블레어가 여왕에게 내민 카드는 바로 이 사실을 들어 협박하는 것이었다. 여왕의 입장에서, 물론 그 자신의 안위도 달려있는 문제고 이를 고려하지 않지는 않았겠지만, 이는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는 혁명의 순간이자 영국 최대의 위기가 될 터이다. 여왕은 존재 자체로 영국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왕은 블레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포퓰리즘에 법과 전통이 항복한 예에 속할 것이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왕실도 달라져야 한다’는 허울좋은 말로 포장이 되겠지만.


각종 여우주연상은 당연히 헬렌 미렌 거였다. 그러나 스티븐 프리어즈도 훌륭했다

ps1. 요즘 [키노] 생각이 많이 난다. 아마도 [키노]였다면 몇 달 전부터 <더 퀸> 같은 영화의 사진이 실렸을 것이고, 개봉월 호에는 <더 퀸>과 <아버지의 깃발>의 스틸과 빽빽한 글이 족히 20페이지는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들 다이애나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만 얘기하지 이 영화의 감독이 바로 그 스티븐 프리어즈라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는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더 밴>과 같은 자그마한 영화도 비디오를 통해서나마 소개가 됐지만, 지금은 <미시즈 헨더슨> 같은 영화는 주디 덴치가 나온다 해도 소개되지 못한다.

ps2. 공화국으로 건설된 건 1948년이지만 한국은 실질적으로는 준-군주제였다.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 둘 다 실은 군주제와 대통령 공화제의 과도기적 형태가 아닌가.) 공화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태국이나 영국의 군주정을 무시하면서도 추진성과 돌파력 어쩌고 하며 이명박이 대세라는 놈들이나 ‘강력한 대통령’ 어쩌고 하는 놈들 보면 한국에 실질적으로 군주정을 바라는 놈들이 정말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왕도 노예도 아닌 동등한 인간이다, 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그러니 (서민 출신인) 나도 왕 할 수 있다’로 오해하는 놈들 정말 많다. 민주주의가 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10 Comments

  1. 나 이거 봤는데. 나는 토니블레어가 셰리랑 얘기하다가 찻잔을 놓고 그냥 일어나니까, 셰리가 “토니”하고 주의를 주자 토니가 이것 저것 설거지감을 챙겨가지고 들어가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도저히 진실이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다우닝가의 총리관저에서 변호사이자 수상 마누라인 셰리가 후라이팬에 아침을 허겁지겁해서 먹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진실일까? 진실에 가까운 거면 너무 멋있는 거잖아. (약간은 차원이 다르긴 한데, 여왕이 직접 차를 몰고 다니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 아줌마의 사유는 거기가 끝이더라구.

  2. 아마 실제이지 않을까? ‘노동당’의 수상 부인인데!
    처음부터 왕실에 비판적이었고 여전히 왕실에 비판적인 셰리가 훨씬 건강하게 그려졌다는 생각이 들더라. 토니 블레어를 한큐에 딱 찌르는 것도 셰리였지. ㅋㅋ

  3. 조용히 RSS로 구독하고 있는 독자입니다. 영화에 관련된 평론 자체가 많은 블로그라 즐겁게 구독하고 있는데, 이번 ‘더 퀸’ 포스트의 경우, 저의 견해와 거의 전부 동일하여,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댓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스티븐 프리어즈는 오래전부터 좋아해 온 감독으로, 저는 High Fidelity 를 가장 좋아합니다.

    여왕으로서 고뇌가 총리로서의 고뇌보다 더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물론 현실도 그렇네요.
    다만, 여왕을 사랑하는 영국국민의 모습은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영국국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프리어즈 역시 그점을 전달하고자 노력한 걸로 보였는데…(다이애나 죽음후 버킹검 궁전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여왕을 위로하는 아이 장면 등을 보면)
    여왕에게 ‘왕위 자리가 위험하다’는 일종의 ‘협박’을 하는 장면은, 제가 보았을때는 ‘정말 오버였다’라고 느꼈습니다.

    • 안녕하세요. 왠지 아이디가 낯설지 않은 것이, 전에 한번 여기에서, 그리고 딴곳에서 뵌 것 같습니다. 혹시 < 크래쉬> 감상문에 리플 달아주셨던 분이 아니신지요.
      < 더 퀸>이 헬렌 미렌의 연기로만 회자되고 그냥 영국여왕 사는 모습 그리는 그저그런 가십성 영화로 치부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차인데,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다만 제가 정치와 시스템을 논하기엔 아는 게 모자라서 하고픈 말을 다 표현하지 못했는데, 부족한 부분도 채워서 읽어주신 것같아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국민들 역시 왕실에 대해 원망과 분노는 해도 ‘그러므로 공화정!’을 주장하는 것같진 않았습니다. 분명 여왕과 다이애나를 모두 사랑하고, 또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국민들이 있었다면, 말씀하신 대로 여왕의 고독한 고뇌를 이해하고 여왕을 사랑하는 국민들도 있었을 겁니다. (스티븐 프리어즈가 이런 세세한 면들을 굉장히 디테일하고 날카롭게 잘 그려냈다고 생각해요.) 그게, 민주주의의 요람인 영국에서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군주정이 유지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왕위가 위험하다’는 ‘오바 협박’을 하는 토니 블레어는… 정치술이 뛰어난 거긴 하지만,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에 포퓰리스트로 보여 영 마음이 안 좋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여왕류의 보수주의자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원칙을 지킨다는 측면에선 훨씬 더 존경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원작자인 닉 혼비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데, 너무 훌륭하게 옮겨놔서… 정말 이런 재능도 흔치 않은데, 어쩜 이렇게 감독에 대해선 얘기들이 없는지, 섭섭하더군요. ^^ 여러모로 Jayhawk님, 너무 반갑습니다.

  4. 정성일은 블레어 안에 근본적인 보수성이 내재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는 평을 내놓았던데. 괜히 블레어가 부시의 푸들이 된 게 아니었다는 거지…;;
    영화 자체가 여러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어서 흥미로웠지. 그런 분위기 자체가 꽤나 영국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국민 대부분은 셰리와 비슷했을텐데, 사실 위의 시스템은 전연 그런식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거지. 여왕이 마음을 돌이킨 이유는 블레어의 설득이라기보다는 사슴을 보다가 얻은 ‘돈오’ 수준의 깨달음 때문이었고…(죽은 사람한테 괜히 깐깐하게 굴 필요 없다?)
    사실 왕실이나 정치 시스템의 그런 유연성이 민중의 불만을 진정시킴으로서 오히려 개혁의 고삐를 끊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고. 영국은 유난히 그런 게 더 심하겠지?
    피크닉 가서 딴 왕족은 다 탱자탱자 놀고있고 여왕 혼자 밥상차리는 거 재미있더라. 강아지들도 너무 귀엽고. 그런 종자들 어디서 좀 납치해올수 없나…

  5. 잘 읽었습니다~ 저는 단지 헬렌 미렌의 연기에만 집중했는데 읽고 나서야 좀 더 풍성한 의미가 눈에 들어오네요.

    글 내용과 관계없이 예전 직업적인 버릇이 나타나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에 있는”이라는 부분을 보고 찾아봤는데 영국 왕실의 경우 빅토리아(1819-1901, 재위기간 1837-1901, 64년)와 [조지왕의 광기]의 조지 3세(1738-1820, 재위기간 1760-1820, 60년[1814년 이후는 실질적인 왕이 아닌 하노버 선제후와 왕의 칭호만 있었던 것으로 보고 죽기전 1814-1820을 빼서 포함하면 재위기간을 54년으로 보기도 한다네요])의 예가 있기 때문에 1952년 즉위해서 올해가 55년 째가 되는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를 “역사상 가장 긴”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실질적인 입헌군주제 이후.. 라던가 현존하는 세계 왕들 중에서… 라는 수사를 붙이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살피지 못한 맥락이 있을지 몰라 비밀글로 올립니다. ^^ 좋운 저녁 시간 되세요~

  6. 오필리어 / 바로 그것, 내가 ‘근원적 한계’라고 썼던 게 사실 그 얘길 하고 싶었어. ‘근본적으로 내재하는 보수성’. 그거 단 대사 한 마디로 처리되잖아. 아버지가 보수당 선두, 그리고 여왕 한번 알현하고 정신 못차리는 걸 꼬집는 셰리의 대사. 정말 탁월하더라고.
    난 셰리는 영국민 중에서도 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노동당, 당수의 아내라는 자리는 그렇게 만만한, 평범한 사람이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 그 자신 변호사고. 왕실에 처음부터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이애나로 수렴되는 포퓰리즘과 집단투사(?라고 해야 하나. 난 영국민들의 다이애나에 대한 그 증세가 굉장히 집단 광기 비슷하게 보였거든.)에 휩쓸리지도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은 사실 셰리, 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잖아. 사실 영국민들이 다이애나에게 그렇게 과도하게 어떤 상을 투사하는 거 자체가 사회의 어떤 위기의 발현이었다고 봐. 군주제에 대한 의심이 의식이 아닌 집단 무의식 차원으로 표현됐다가 봉합됐다고나 할까. 영화에서도 그걸 분명히 보여주고 있고… 이 영화는 여왕의 고뇌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곤 해도 사실은 영국 국민들이 처한 민주주의의 위기의 순간을 그려내는 영화이기도 하니까. 영국민들의 폭동 직전, 풍전등화의 위기감과 불안감이, 다이애너의 죽음을 계기로 그런 식으로 드러난 셈이고. 다이애너에 대한 과도한 투사 자체가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라고 봐. 스티븐 프리어즈는 그 사건을 갖고 당시 영국 내 사회상을 굉장히 풍성한 의미로 해부한 거고… 그러니 이 영화가 정말 대단할 수밖에 없는데, 무슨 왕궁 안 여왕의 생활을 엿본 소품 드라마 취급하는 평론가들 보고 어이가 없어서리.

    비밀댓글 / 아, 그렇군요…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한 예입니다. 고맙습니다. 전 현재의 엘리자베스 2세가 최장 재위라고 알고 있었어요. ^^;

  7. 어설픈 감상문을 쓰고서도 계속 앙금같이 남아있던 것이 이 글을 읽고 나니 왠지 탁 풀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블레어의 행보가 영 찜찜했는데…역시 N님이세요. ㅠ_ㅜ 굉장히 세세하면서도 중요한 의미들이 겹겹이 겹쳐있는 이 영화의 베일을 한꺼풀 더 벗겨낸 듯한 느낌입니다.

    • 아이고, 멋진 감상문을 쓰셨으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다뉘. 제가 글에서 잘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찬찬히 논리적으로 짚어신 misha님의 감상문이 더 멋집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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