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아로노프스키 | 천년을 흐르는 사랑 The Fountain

프레시안 무비 리뷰 3/13/2007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16세기 스페인, 현재, 그리고 시간을 알 수 없는 꿈 속과도 같은 어느 때(아마도 미래), 이렇게 세 가지 시간대의 이야기가 서로 느슨하게만 연결된 채 서로 섞이고 교차하며, 그나마 하나의 시간대에서조차 순서가 마구 오가는 비선형적(non-linear) 전개를 갖고 있는 드라마다.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딱히 어떤 영화라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아 관객들이 당혹감을 느낄 만한 영화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꿰어 맞추기를 포기하고 감독이 보여주는 대로 영화를 그냥 좇아가다 보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그러나 필사적으로 잊으려 노력하는 진실과 정면으로 부닥치게 된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죽음이 의미하는 소멸에 대한 공포 외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또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살아남은 자가 겪어야 하는 상실의 고통과 슬픔은 단순히 자리 하나가 비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붕괴를 뜻하며, 살아있는 한 그걸 온몸으로, 온 정신으로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한편으로, 나의 죽음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아내 이지(레이첼 와이즈)와, 그녀를 살리기 위해 종양 치료약 연구에 매진하는 토미(휴 잭맨)의 현재 시제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이지가 쓴 소설 ‘파운틴’ 속의 이야기와, 시공간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세계(SF 영화의 특성상 아마도 미래의 우주선 안)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다가오는 죽음에 점차 마음의 준비를 하며 두려움을 떨쳐나가는 이지와 달리, 토미는 필사적으로 치료약 개발에 매달린다. 마침내 그는 약을 만들어 내지만, 이지는 이미 숨을 거둔 뒤다. 이지가 남긴 소설 ‘파운틴’은 마지막 장이 비어있는 상태이고, 이제 그가 결말을 채워나가야 한다. 이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가 마지막 장 쓰기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지의 소설 ‘파운틴’의 이야기는 16세기, 이자벨 여왕(‘이지’는 ‘이자벨’이라는 이름의 애칭이기도 하다)의 명을 받고 마야 문명의 한가운데로 생명나무를 찾아가는 기사 토마스 경의 이야기이다. 마침내 생명나무를 지키는 마야의 제사장 앞에 선 순간, 토마스는 ‘생명나무를 위해 희생한 시조처럼 너도 생명을 내놓으라’는 말과 함께 칼에 찔린다. 미래 시제의 우주선 안에서는, 생명의 나무와 함께 마야인들이 저승이라 생각했던 성운, 시발바로 향하는 톰의 모습이 보인다.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면서, 애정을 가득 담은 말을 나무에게 중얼거리고, 나무껍질을 먹고 팔에 원형 문신(반지 문신의 변형)을 새기는 이 남자에게, ‘현재 시제’의 이지의 환영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어디에선가 계속 ‘완성해 줘’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우리는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서야, 이 남자가 ‘현재 시제’의 토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지가 쓴 소설 역시 그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이들의 전생일 수도 있다.)



이별을 앞둔 커플 – 살아있을 때, 곁에 있을 때 잘 하자


그러나 토미가 영생불사의 몸이 된 상태인지 환생을 계속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래의 그는 현재, 즉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나무를 대하기를 생전의 아내 대하듯 하고, 16세기의 토마스가 칼에 찔리는 그 순간 갑자기 가부좌 자세로 나타나 생명나무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시조로도 호칭된다. 이 영화에서 시간이 선형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순환하며 반복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간이 원형을 그리며 순환하고 있고, 3이라는 숫자와 이 숫자를 기본으로 이루어진 입체, 즉 피라미드에 인류가 이제껏 부여해온 특별한 상징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이 영화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불멸, 특히 육체의 불멸을 찾으려는 남자의 노력이 순환하는 시간을 타고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사실이며, 이를 통해 결국 남자가 얻게 된 깨달음이다.


여왕을 흠모하고 그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기사일 때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연구에 매달리는 의사일 때건, 시발바를 향해 우주여행을 하고 있는 구도자일 때건,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육체의 소생, 육체의 불멸을 찾아 헤맨다. 반면 여자의 모습은 큰 변화를 보인다. 기사에게 생명나무를 찾아올 것을 명했던 이자벨 여왕은 육체의 영원을 바라는 전형적인 절대군주 중 하나였던 반면, 현대로 오면 한계를 가진 육체의 소멸, 즉 죽음을 (쉽지는 않지만) 결국 받아들이며 ‘이제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미래의 그녀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버린 나무의 영혼으로 존재하며 끝없이 남자에게 ‘완성’을 – 즉 ‘해탈’을 명한다. 업에 갇혀있는 남자와 해탈한 여자의 차이일 것이다. 세 가지 시간대를 교차하여 살면서 남자가 그토록 죽음을 부정하고 정복하고자 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진실은, 죽음이 바로 영생의 길이며 창조의 씨앗이라는 사실, 개체는 죽더라도 다른 개체의 창조와 성장을 위해 자양분이 됨으로써 이 세계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흥미로운 가십거리로 접하게 되는 온갖 신비주의와 관련한 이야기들은, 결국 이 세계가 생성(창조) – 유지 – 소멸이라는 3단계의 순환을 반복하며 영원에 이른다는 우주의 법칙을 비유의 이야기로 꾸미거나 상징물로 재현한 것이다. (인류 문명 곳곳에서 숫자 3이나 삼각형의 입체물, 즉 피라미드에 특별한 상징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 애로노프스키 감독이 원래 서로 다른 시간/공간의 교차 편집을 즐기긴 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세 가지 시대를 계속 교차하며 순환시키는 것은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CG가 아닌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만들어냈다는 눈부신 이미지들


인간이 ‘죽음’에 대해 최초로 인지하게 되는 것은, 대체로 가족, 즉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으면서다. 육체의 죽음, 혹은 이별은 우리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지만, 이것이 곧 새로운 생명과 창조의 씨앗임을,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며 우리 역시 이 법칙 하에서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정말로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무기력한가. 욕조 안에서 나누는 두 주인공의 사랑이 그토록 애절하며 ‘깊은 슬픔’을 안겨주는 것, 우리가 그런 장면들에 깊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것 역시, 죽음의 의미에 대해 아무리 삶의 일부임을, 혹은 또다른 삶의 전제 조건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안다고는 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천 년을 떠돌며 – 혹은 환생을 거듭하며 – 계속해서 영생의 길을 찾던 토미 역시 죽음의 의미에 대한 말들을 얼마나 많이 듣고, 그럼에도 또 얼마나 부정을 했던가. 아무리 현대가 노화 방지와 생명 연장의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유전자 복제와 생명 창조의 기술을 손에 넣었다 한들, 시몬느 보부아르가 쓴 책의 제목대로 다시 한번,”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우주의 섭리다.


미국과 유럽에서 동양철학과 종교가 유행하기 시작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이고 여기에는 동양인으로서는 기분이 찝찝할 수밖에 없는 오리엔털리즘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 소위 뉴에이지라 불리는 철학을 적극적으로 영화의 주제로 풀어낸 <천년을 흐르는 사랑>이 미국에서 야유를 받거나(“이미 유행이 지난 낡은 이야기!”) 외면을 받는 것(“도저히 이해 안 되는 이야기!”)은 일견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머리를 밀고 가부좌를 틀고서 즈나나 무드라의 손 모양을 한 채 참선 자세를 하고 있는 휴 잭맨의 모습이 영 어색할 수도 있고, 얄팍한 신비주의를 잡탕으로 가져다가 대단히 새로운 깨달음이라도 전하는 양 어설픈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세 시간대에서 남자가 그러했듯, 우리 역시 끝없이 죽음과 탄생을 반복해서 지켜보고 있고, 언젠가의 죽음 역시 숙명으로 안고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 여전히 직시하길 꺼린 채 피하고자 하는 그 진실을 환상적인 이미지들 속에 그려낸 이 영화는, 모든 다른 흠과 결점을 덮고 보는 사람의 가슴 깊은 곳을 따뜻한 슬픔으로 채운다. 컴퓨터 그래픽을 배제하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창조해 냈다는, 겹겹이 쌓인 환상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근원적 슬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두 배우의 성실하고 아름다운 연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한편의 시와 같은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에게 혹평 대신 지지의 한 표를 던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ps1. 욕조 장면에서, “이별을 앞둔 커플의 절박함과 절절함”을 표현하는 휴 잭맨과 레이첼 와이즈의 연기는 정말 최고. 내가 만약 배우라면 아마도 두 배우에 대한 질투와 절망으로 몇날 몇일 잠을 못 잤을 것 같다.


ps2. 극장에서 한번 더 보고 싶은데, 강변 CGV 너무 멀다. ㅠ.ㅠ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6 Comments

  1. 재작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제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듯하군요.

    “나는 윤회라는 것을 나의 온전한 정신, 혹은 영혼이 단일성 또는 동일성이나 고유성을 유지한 채 다른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으로는 생각치 않아요.
    내가 죽어 내 몸이 흙이 되어 식물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거나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면 내 몸에 있던 것들은 그 식물들과 동물의 삶의 일부가 되고 그 식물과 동물들은 죽어 다시 다른 생물의 일부가 되는 것, 내 몸의 구성부분이었으되 다른 생물의 일부가 되지 못한 부분들은 바위나 모래가 되거나 땅속 저 깊은 곳에서 석유가 되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는 것, 내가 죽어 나무가 되고 표범이 되고, 독수리, 하이에나가 되고, 구데기가 되고, 상어와 플랑크톤이 되고, 바위와 모래가 되고 바위와 모래가 다시 흙이 되어 살진 봄미나리의 몸이 되고 그 봄미나리가 어떤 이의 밥상 위에 놓임으로써 나는 그 어떤 이의 삶을 같이 사는 것… 그런 것들을 윤회라고 생각해요. 만물의 순환 그 자체를 윤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셀프님처럼 허무한 생을 긍정하는 것이 낙관적 염세주의 아니겠습니까.”

    • 아, 네. 뭐 저로썬 딱히 더할 말이 없네요.
      잘 지내시죠, 타나토스님?

  2. 평이 극단으로 갈려 볼까 말까 하다가 이 글(정확히는 황금빛 이미지)에 제대로 낚여 어제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결국 봤습죠. ^^;
    그제 본 < 인사이드>와 엮이는 부분, 죽음 앞에 선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과 초연함의 대립이라는 점에서 다른 스타일의 영화이지만 맥락이 비슷하게 연결되더라고요. 그런데 정리가 될지. ^^;

    • 하하, 낚이시는 데에 제가 일조를 한 거군요! (씨익~)
      평이 극단으로 갈리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왜 혹평을 하는지도, 다 이해가 가요.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도… 뭐 저야 좋아한 쪽이지만요. ^^

  3. 저도 이 글에 낚였습니다.^^;; N.님의 이 글이 아니었다면 볼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한글 제목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별로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라서요. 저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가부좌 트는 장면이라든가 뭐 그런 거요. 저도 싫어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갈리는지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옆으로 두 커플이 상당히 괴로워하더군요.^^ 저는 아주 좋다, 아주 싫다가 아닌 ‘싫은 정도는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겠군요.

    • 가부좌 장면은 사실… 흐… 웃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만… 예를 들면 그 욕조장면, 아내의 목덜미에 대고 속삭이는 장면의 클로즈업과 나무에 대고 속삭이는 장면의 클로즈업 병치 같은 거, 굉장히 절절하고 애절한 느낌이 나서… 미래 시제에서 폼을 좀 지나치게 잡아서 거부감을 주긴 해도, 전반적으로 좋다, 라고 느꼈던 건 그런 애절함, 생명나무를 찾아헤매는 그 애절한 동기에 그만 설득돼버려서였지요…

      근데 음, 제 낚시 실력이 ‘영~ 꽝’은 아닌 것이로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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