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 아내가 결혼했다 (2008) - 2008/11/15 15:47
왜 꼭 '결혼'으로 수렴돼야 하나
박현욱의 원작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은 건, 영화 판권을 산 이가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말라며) 책을 던져주었을 때였다. 소설이 영화화될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안 축에 속하는 편이다. 소설을 다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과연 이걸 어떻게 각색한단 말인가. 아무리 유럽축구가 인기를 끌고있고 여성 축구팬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유럽축구 얘기가 반에, 여주인공의 선택을 설득하기 위해 소설 곳곳에 일부일처제의 부당함과 함께 '다자 간 비독점적 연애' 즉 '폴리아모리'에 대해 인류학적 설명들이 붙어있는데, 이걸 영화에서 대사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손예진과 김주혁이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공식 보도됐을 때조차 나는 이 영화가 과연 어떤 모양새를 띄게 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사실 소설을 읽고나서도 여주인공 인아에게 전혀 설득당하지 못했다. 폴리아모리에 대해서가 아니다. 남자주인공 덕훈은 여주인공 인아의 선택에 소심하게 반항하기 위해 되도록 집안을 어질러두고,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오는 인아는 군말없이 완벽하게 청소와 정리정돈을 한 후 일주일간 덕훈이 먹을 반찬까지 완벽하게 해두고 다시 내려간다. 이 세상에는 한집 살림도 힘들어 허덕대는 여성들이 널렸고, 내 경우는 겨우 혼자 사는 살림도 제대로 못 해서 자취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다니기 일쑤인데, 그녀는 자신의 일에서도 인정받는 능력있는 여성인 데다 섹스도 잘 하고 가사노동에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고 시부모님께도 이쁨받는 완벽한 며느리다. 거기에, 주말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완벽하게 두집살림을 한다. 세상에 이런 슈퍼우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이 꽤 재미있었던 데다 일부일처제에 대해 발랄하게 문제제기를 한 면은 높이 사지만, 이건 결국 소위 진보적이라는 리버럴 남성의 완벽한 판타지에 불과할 뿐이라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던 여자후배 한 명은 "원작자가 애를 낳아본 경험이 없는 게 분명하다, 이건 여자가 남편을 하나도 아니고 둘을 모시고 사는 격인데 이런 슈퍼우먼이 어디 있는가"라며 분노를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놀랍게도 영화에는 '폴리아모리'라는 말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축구에 대한 비유도 매우 적절한 수준에서 이뤄지는 데다, 축구를 전혀 몰라도 이 영화를 보는 데에 하등의 지장이 없다. 책과 영화는 매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소설에서 그토록 여러 장을 공들여 설명해야 하는 부분도 영화에서는 컷 하나로 충분히 전달이 가능하며, 반면 소설에서 별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던 부분이 영화에선 단 한 씬 등장한다 해도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원작자도 어느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지만, 인아의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 폴리아모리의 기원과 일부일처제의 부당함에 대해 소설에서 그토록 많은 설명이 붙어야 했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눈웃음 한 번으로 모든 설명이 불필요해진다. 인아의 성격도 살짝 바뀌었다. 영화 속 인아는 원작의 인아와 달리 애교가 흘러넘치고 보다 생동감이 있어졌으며, 집안일에 손을 놓고 있는 덕훈에게 투덜대기까지 한다. 게다가 덕훈이 지원이의 돌잔치 자리에 찾아가 비밀을 폭로하는 장면은 소설보다 훨씬 임팩트가 강렬하다. 덕분에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더 현실에서의 개연성이 높아진 게 사실이다. 게다가 정윤수 감독의 영화 만듦새도 매끄럽기 짝이 없다.
집에 책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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