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철 | 좋지 아니한가

프레시안 무비 리뷰 (3/6/2007)



시선이 제각각이어서 포스터가 산만하다


<좋지 아니한가>에 등장하는 가족을 흔히 ‘콩가루 집안’이라 표현하는 것은, 가족은 화목 단란해야 하고 다른 그 무엇보다 절대적이고 특별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명 ‘콩가루 집안 영화’들을 떠올리다 보면 한 가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저 얘기가 과연 일반적인 것일까, 아니면 특수한 예일까? 내 가족이나 내가 알고 있는 가족들은 사회적으로 평균에 속하는 것일까, 드문 예에 속하는 것일까? 혹은 그 수많은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콩가루 집안들이 다 같은 콩가루 집안인 것일까.


평균적인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가족이 실제로는 매우 사회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매우 개인적인 조직이자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노출하는 것이 되고, 가족의 치부라도 드러내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 된다. 가족이 서로 개인을 배려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제리 스프링어 쇼 같은 곳에서 소위 가족끼리 물고 뜯고 할퀴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이해 못할’ 미국인들의 습성으로 비치곤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정 형태가 급속히 해체하고 있고, 어른부터 아이까지 각자의 스케줄에 너무 바빠 서로 얼굴을 맞댈 시간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을 다룬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직 한국의 영화들은 ‘대안 가족’의 형태를 제시하는 데에는 더없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로 무심, 무관심하고 별 연대감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특기할 것은, 이 가족들이 서로에게 연대감도 없는 만큼 별다른 기대감도 없으며, 소위 ‘가족’으로서 어떤 의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작년에 개봉했던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의 경우, 매우 급진적으로 가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혈연 중심의 가족 구성원에게 전통적인 가치로서 어떤 기대와 당위를 요구하고 있고, 이것이 어그러지면서 더욱 상처를 받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므로 <가족의 탄생>이 재구성하여 탄생시키는 새로운 가족은, 이러한 기존의 가족에 대한 상처를 딛고 일어서며,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들은 어머니 희경(문희경)을 제외하면 애초에 파편화되어 있고 서로에게 어떤 기대나 당위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가족 구성원의 돌출된 행동이 ‘상처’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쪽팔림’으로 다가온다. 이들은 그렇기에 도대체 왜 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 그렇게 살 뿐”이다. (물론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이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의 표현은 매우 가벼우면서도 서로 충돌을 일으키며 웃음을 자아내는 쇼트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무심하고 뚱한 표정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밝혀지는 한 가지 사실은, 이들이 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받는 것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오직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느슨한 끈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집의 아들 용태(유아인)가 심창수(천호진)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혈연을 매우 중시하는 전통적인 한국 가정에서는 가정을 깰 통속적인 사유로 충분하다. (실제로 현재 방영중인 한 TV 드라마에서는 이와 똑같은 이유로 이혼을 한 커플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이 사실을 다루는 터치는 매우 가벼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족사에서 가장 상처를 받을 만한 인물인 용태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영화 초반에서부터 이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물론 영화 초반에는 이것이 그저 전형적인 ‘친부 부정 콤플렉스'(자신이 친아들이 아닐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출생을 특별하게 치장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이들의 아주 흔한 증상이다.)이자 엉뚱한 망상으로 포장되긴 하지만. 창수 – 희경 부부가 가족사를 공식적으로 입에 올리며 싸우는 사이, 용태는 별다른 동요 없이 읽던 책인 [발가락이 닮았다]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 심창수와 희경 부부 사이가 냉랭하고 무뚝뚝했던 것은 단순히 심창수가 고개 숙인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혹은 오래 함께 살아오며 서로 무감각해져서 뿐만이 아니라, 서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그저 묻어두고 있었기 때문임이 드러난다. 모든 소동이 끝난 후 용태는 심지어 아버지에게 “저, 계속 아버지 아들 해도 되죠?”라고 확인을 받는다. 한국의 가정을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혈연중심성이 어처구니 없이 쉽게 깨져나가는 순간이다.


이들이 ‘가족’으로서 연대감을 서로 확인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이 집의 집 나갔던 개가 계기가 되어 다른 집과 대판 싸움을 벌이면서부터다. 잡종 개에 대한 비하는 용태에게 그 자신에 대한 비하이자 부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며, 그가 적극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것에 대해 가족들은 서로를 편들며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한다. 싸움에 별로 합류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미경(김혜수)마저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동원’되면서 이들의 ‘가족으로서의 정체감’이 완성된다. (원래 내부의 분열은 외부를 향한 적대를 통해 봉합되는 법이다.) 기실 한국의 가족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잘못을 했건, 일단은 자기 가족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이런 식의 정체성의 확인은, 실은 파국으로 인한 적극적인 해체 이후 재편이 아니라 파편화되어 있던 조각을 얼기설기 봉합한 것에 불과하다. 원조교제 혐의를 받던 아버지나 젊은 청년에게 가슴 설레어 하던 어머니 모두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건 환경에 의해서건 결과적으로 결백하기 때문이며, 이 영화에서 실제로 심각할 정도의 일탈을 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아아 천호진의 이 독특한 분위기. 멜러영화 찍어주세요… ㅠ.ㅠ


그러나 이 영화가, 지극히 소시민적인 어떤 가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들은 <바람난 가족>이나 <가족의 탄생>의 인물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는 못하는 인물들이다. 상처받는 게 더없이 무섭기에 오히려 덤덤한 척하는 이 소심한 인물들은 오히려 욕구가 극단적으로 억압된 인물들이기에 여관방에서 옆에 누워있는 여고생을 두고 발기를 경험하면서도 그저 조용히 집으로 돌아올 뿐이고, 멋진 젊은 청년의 손에 이끌려 간 다단계 판매 교육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는커녕 물건만 잔뜩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기세좋게 전 남친에게 전화를 걸어놓고도 정작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도, 원조교제를 하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널 용서해.”라는 어처구니 없는 가부장적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그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상의 아버지의 표현을 흉내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파국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그저 ‘봉합’에 불과하더라도, 이 영화에서 ‘모두들 집으로 돌아오는’ 인물들은 운명 / 생활 공동체로서의 가족으로 성공적으로 재편된다. 오히려 이런 식의 방식이, 영화 전체적으로 코미디의 과장 어법이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한국적이고 더없이 리얼리스틱한 묘사가 되며, 방식상으로는 보수적이면서도 이념상으로는 그 어느 영화들보다 더욱 급진성을 얻게 된다.


가족의 해체를 다루는 영화가 이런 식의 가벼우면서도 잘 만든 코미디로 그려지고, 그런 영화가 와이드 릴리즈 되어 박스 오피스 순위권 내에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제 우리 사회가 외면적으로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의 중요성과 가치를 외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파편화되고 해체된 상황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대안 가족의 롤 모델을 제시하는 영화가 나올 때가 됐다. 이 영화는 여전히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채 밍기적거리고 있지만.



후줄근 패션이 의외로 잘 어울리더라는. 예뻤다.

ps1. 개봉주에 영화를 보면서 당연히 박스오피스 1위를 할 거라 생각하고 지레 놀라고 있었는데, 역시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아직 한국인들에겐 가족에 대한 정면의 문제 제기는 ‘피하고픈’ 문제겠지.


ps2. 개봉 전에, <말아톤>은 제작사가 정윤철 감독에게 던져준 시나리오라길래 이 영화가 정윤철의 진짜 취향일 거라 생각했다. 정윤철, 이런 사람이었구나.


ps3.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웃음의 방식 – 대사의 부가적 설명 없이 쇼트와 쇼트를 충돌시키는 방식 –  은 내가 꽤 좋아하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썰렁하다’고 여기는 방식이다.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빈번히 사용됐었는데, 근래 개봉작들에 많이 사용되는 건… 일본영화 영향인가?


ps4. J.의 첨언 – ‘참으로 좋다’의 반어법이 아니라 “좋지 아니한 가족”으로 보는 게 더 타당하다는 지적. 그러고보니 그렇네.


+ 17:20 Sun. Mar. 4, 2007, 판타지움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7 Comments

  1. 제목은 애당초 둘을 다 의도한 거 아닌가.
    아예 제목의 ‘가’ 옆에 ‘家’가 달려 있잖아.

  2. 천호진씨의 멜러? 졸라 기대된다. 멜로가 한국에서 퇴장한지 어언 30년~ 그 늙은 아저씨가 숀 코네리나 죠지 크루니나 리처드 기어처럼 괜찮은 아줌마랑 달콤 쌉사름한 연애 영화 하나 나온다면 난…당연히 본다. 문제는 스킬이겠지. 멜러에 대한 아주 졸라 기본적인 스킬만 있어도 될 터인데, 과연 우리에겐 누가 그 정도 감독스킬이 있을까?

  3. echobelly / 응, 근데 난 집 가자를 보면서도 ‘좋다’의 반어법 표현만 생각하고 있었음. ;; 사람들이 그 표현으로 쓴 한줄 평을 워낙 많이 봐서 그런 건지…

    버디 / 전 젊은 아가씨랑 연애하는 것도 좋아요. 정말 절절한 거 하나 나올 수 있을 거 같아요, 특히 호진아저씨 눈빛이면…

  4. 잘읽었습니다. 사실 저는 < 랑을 그대품안에> 시절부터 천호진 헹님 팬이었는데ㅜ.ㅜ 진짜루 이젠 멜로를 해주삼.

    제가 본 것 중에 가족에 관한 최악의 한국영화는 < 람난 가족>이었고 최고의 영화는 < 족의 탄생>이었는데, < 지 아니한가>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그 중간 정도 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듭니다.(가족을 그린 영화를 그리 보고싶단 생각이 안듭니다-_-) 그러고보니 < 물>도 가족영화이긴 하네요.
    사람들이 사회적현실 혹은 사회통념을 비판하려다보면 “그래도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건 보수나 진보라고 잘라말하기 어려운 양면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대안가족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공적사회vs.사적가족’이란 대당관계를 빙빙 순환하기만 하는 현상 자체가 아닐까해요. 영화 속 가족이 마치 다양한 캐릭터를 묘사하기 위한 편리한 장치로만 작동하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다가, 영화 속에서 ‘어떤 가족’을 개성있게 그려내는데만 치중하다보면 오히려 가족이란 주제에서 더 멀어지는 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콩가루가족이건 메밀가루 가족이건 일단 가족은 가족이고, 우찌됐든간에 봉합되어야할 아름다운 관계라는 메시지가 빠지지 않는 것도 이 대당관계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족영화의 ‘텍스트가 풍부’해지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요. 콩가루냐 아니냐를 떠나 , 그리고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를 떠나, 과연 가족이라 불러야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어떤 작은 공동체를 툭 던져놓고 다른 평범한 가족과 슬쩍 대비시킨다면 가족이란 화두는 좀더 발본적으로 사유되지 않을까요. 그걸 대안가족이라 불러야한다는 진보적인 사람도 있을테고, 전통적인 가족이 아니므로 가족이라 부를 수 없다는 보수적인 사람도 있을 테고, 아예 가족이란 범주로만 사고하는 게 문제라면서 이건 ‘가족이 아닌 새로운 삶의 형태’라고 주장하는 급진적인 입장도 있을테니까요.

    • < 족의 탄생>은 봉태규를 제외하면 철저히 남자의 존재를 생략해 버리고 있던데, 전 그런 식의 의도적 거세가 너무 작위적으로 보여 불편했습니다. 가부장을 중심으로 모이건 가부장만 빼버리건, 가부장에게 연연하는 건 마찬가지지요.

      친구와 나눴던 얘기인데, 현재의 한국영화들이(그리고 이를 왕성하게 찍어내고 있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세대들이) 가족이란 것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이에 대한 전복적 사고나 대안에 있어서는 매우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고, 현재 대부분의 한국의 (남성) 감독들은 여전히 자신을 승인해줄(그리고 이후 자신이 쳐죽여야 할, 쳐죽일 만한 가치와 자격을 갖춘) 아버지를 애타게 찾아헤매며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온전한 가족을 완성하고자 하는 욕구를 보이는 듯합니다. 설사 외면적으로 드러나기엔 가부장을 외면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해도요. 물론, 정면으로 깨부수고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소위 ‘완전한 가정’을 한번 이루어야 하긴 하겠죠. (으악, 이거 모처에 응모할 글 주제인데…) 그렇기에 정말 제대로 가족에 대해 전복적인 문제제기와 작위적 강박증 없이 대안가족을 그릴 영화는 소수자 정체성을 갖고 있는 감독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여성감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그러나, 충무로에 데뷔하여 활동하는 대부분의 여성감독들은 여성감독이 아니라 (준)남성감독이죠…) ‘결국 믿을 건 가족뿐’이라는 얘기는, 사실 가족이란 테두리 바깥을 전쟁터로 상정하며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우리가 공적 영역이라 부르는 ‘사회’는 개인을 절대 보호해주지 못하죠. 생존을 보장해 주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걸 까발린 게 < 물>이고요.) 생존을 위해 회귀하는 지점이 결국은 가족의 울타리 안인 셈인데, 이건 바깥을 보라고 닥달해서만 될 문제가 아니라, 그 바깥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여 개인에게 일정 정도의 보호와 보장을 줄 수 있는 곳이라는 사회적 신뢰-합의가 전제돼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족에 집착하면 바로 보수적이라고 자동 공식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가족이냐가 문제겠죠. 저한텐 아직 풀리지 않는 문제들… 생각하면 할수록 꼬이고 더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이 글은, 일단 ‘기사용’으로 쓴 거라 대강 봉합한(?!) 글이에요. ㅋㅋ

  5. “바깥을 보라고 닥달해서만 될 문제가 아니라, 그 바깥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여 개인에게 일정 정도의 보호와 보장을 줄 수 있는 곳이라는 사회적 신뢰-합의가 전제돼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다만 ‘완전한 가정’을 한번 이루어야 정면으로 깨부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저는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완전한 무엇’이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객관적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비유하자면 한국자본주의 형성과정 자체가 강박증적이라기보다 히스테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는 산업화이래 무언가를 완성하기위해 기다리는 것보다 얼개만 압축해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식의 모더니티, 제가 갖다붙인 말이긴 하지만 일테면 ‘불완전연소의 모더니티’였습니다. 저는 가족영화에도 그런 징후가 드러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치영역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저는 “아직 한국은 그럴 주제가 못된다” 또는 “한번도 한국에선 완전한 XX가 도래한 적이 없다”는 식의 언설이 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효용은 없다고 느낍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고요…

    가족이란 주제는 한국영화는 물론이고 한국사회에서 정말 제대로 고민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입니다. ‘응모할 글’이 완성되면 나중에라도 일견할 수 있길 바랍니다.^^

    • ‘완전한 가정’에 대해서 제가 오해하기 딱 좋게 써놨는데, 저 역시 한번도 완전한 무엇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말씀하신 바 ‘불완전연소의 모더니티’에도 동의해요. 오히려 제가 보고 있는 건, 그러한 상황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과 컴플렉스입니다. 한번 완성을 해봐야 깰 수 있다, 이건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그러한 결핍감과 컴플렉스를 드러내는 이들이 갖고 있는 욕망이라는 거죠. 근래의 한국영화들이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찾아다니고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 역시 어떤 완성에 대한 욕망, 지금 이제서야 한번 완성을 시도해볼 수 있지 않나, 라는 좀 어설픈 희망, 그러나 그것이 절망으로 귀결될 것임을 미리 예감하는 욕망, 으로 보고 있는 거죠.

      근데… (고백하자면) 아마 제가 쓴 단어들이 라캉식 용어로 해석될 것 같은데, 저는 정작 라캉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글은… 과연 완성해서 제대로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만약 정말 완성해서 낸다면, 나중에 이곳에 공개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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