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일 | 수


처음엔 그럴싸했는데…

최양일 감독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해 만든 첫 한국영화 <수>를 둘러싸고 논란이 거세다. 참담한 흥행성적을 올린 <수>는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평이 엇갈리는 한편 관객들에게서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에서부터 ‘어처구니없는 실소와 폭소’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실망과 악평이 우세하다. 각 영화매체들은 뒤늦게 <수>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일반 극장의 객석 안에서 시시때때로 터져나온 폭소와 실소의 반응은 관객들이 ‘하드보일드’를 몰라서도 아니고, 평론가들의 호평과 나아가서 극찬 역시 한편으로는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피와 뼈>를 통해 일부 관객에게나마 명확한 인지도와 광적인 지지를 얻은 최양일 감독의 영화로서 <수>는 거장의 걸작도 졸작도 아닌 ‘괴작’이라 불러 마땅하다.

일단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키워드 몇 개를 체크해 보자. 먼저 ‘(일란성) 쌍둥이’. 보통 쌍둥이로 설정된 이들은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우호감을 갖고 있는 자신의 또다른 반쪽이며,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이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존재이다. 오죽하면 쌍둥이는 한쪽이 아플 때 다른 한쪽이 텔레파시를 이를 느끼고, 함께 앓기까지 하고, 심지어 같은 외모를 이용해 내 대신 복수를 감행해 주기도 한다. 즉, 쌍둥이는 매우 우호적으로 느끼고 바라보는 나의 분신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와 똑 같은 외모를 가진 다른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 ‘도플갱어’는 ‘죽음’을 은유하는 존재다. 도플갱어를 본 존재는 시간을 두고 서서히 앓다가 죽건 급사를 하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도플갱어는, ‘인간은 언제나 자신과 똑 같은 존재를 죽이고 자신이 유일한 존재가 되려 한다’는 전제 하에 언제나 나의 생활을 위협하고 목숨을 빼앗으려 드는 위험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서사에서 도플갱어는 인간의 선과 악의 양면을 은유하는 데에 차용되며, 언제나 호러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해 왔다. 말하자면 영화 문법에서 쌍둥이와 도플갱어는 나와 똑같이 생긴 이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구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런데 <수>에서의 쌍둥이라는 설정은 서사에서 전통적으로 쌍둥이를 다루는 방식보다는 도플갱어를 다루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물론 태수와 태진이 서로 죽이려 든 적은 없다. 그러나 태수는 자신 대신 태진이 잡혀갔을 때 두려움에 떨며 이를 지켜보면서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19년만에 비로소 둘이 서로 마주보게 되는 순간에 태진은 죽어버린다. 이후 태수는 태진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 하에 심지어 태진과 똑같이 상처를 내고 태진 행세를 한다. 영화에서 명확히 서술되지는 않지만 태수가 일종의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 죄책감은 생물학적 쌍둥이로서 자신의 다른 한쪽을 상징의 차원에서 (우호적 대상인) 쌍둥이가 아닌 (적대적 대상으로서의) 도플갱어로 상정하고 두려워했던 자신의 무의식에 대해 태수 스스로 갖는 죄책감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다.


쌍둥이, 혹은 도플갱어

두번째 키워드는 ‘아버지’이다. 태수는 보스 송인(조경철)과, 태진은 구양원(문성근)과 유사-부자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송인과 구양원은 각각 자식을 보살펴주는 존재, 그리고 자식을 폭력적을 억압하는 존재로서의 아버지 양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태진이 구양원을 떠난 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징계’를 내리는데, 태수는 태진이 되어 다시 구양원을 찾아나선다. 영화상에서 별로 다뤄지지도 않는 태진을 태수와 별개의 존재로 여기는 대신 한 인물의 양면이라 여긴다면, 결국 <수>는 폭압적인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루며 흔히 얘기되는 ‘살부(殺父)’의 과정을 이행하기 위해 –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수>에서 구양원이 자신의 (무력한) 아버지는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아들에게 결코 독립성을 허락하지 않는 폭압적인 아버지라는 점이다. 사회적 측면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살부의 과정은, 아들이 자라 강력한/했던 아버지를 결국 이겨서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세대별로 반복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구양원이 꼬인 인물인 것은, 그의 아버지는 구양원이 바라던 것만큼 강하지 못했고,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는 아버지라는 점에 있다. 영화에서 ‘아버지’라는 상징은 사실 한 사회의 국가권력, 혹은 이를 대리하는 자를 은유하곤 하는데, 나는 구양원이라는 존재가 한국의 아버지가 아닌 일본의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하늘만큼 높은 줄 알았던 천황은 너무나 어이없이 미제에 손을 들어버린 후 나약하고 늙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왕이 돼버렸고, 그리하여 전후 일본을 부활시킨 아버지 세대는 지금의 젊은 세대를 지극히 나약하고 사회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철딱써니 없는 파파보이’, 나아가 그저 배고프다고 아버지의 손바닥을 물어뜯고 손에서 돈이나 훔쳐가려는 망나니 정도로 보며 결코 권력을 이양하고 싶지 않아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구양원의 존재를 보면서 든 것이다.


유사-부자, 멋진 아버지. 조경철 아저씨 멋지세요! >.<

세번째 키워드는 ‘여성’이다. 세계를 아들에게 넘겨주기는커녕 손 안에 꽉 잡고 놓지 않으려는 수구적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극단적인 폭력의 방법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이 폭력의 법칙을 단번에 깨부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자’의 존재이다. 구양원과 구양원의 아버지, 송인에게는 여자가 없다. 즉 이 영화에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완전히 거세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재하는 여성은 태진의 여자 미나(강성연)이고, 이 여성은 태진의 또 다른 분신인 태수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태진을 도플갱어로 대하는 태수는 쉽사리 미나에게 마음을 줄 수도,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이 부분은 태진에 대한 태수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기제가 된다. 사실 남자만이 존재하는 태수의 세계에서 미나는 이질적이고, 한편으로 위험스럽게까지 여겨지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무서운 해결사라는 수는 미나 앞에서는 더없이 어색하고 곤란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폭력의 사슬, 극단적인 폭력으로서만 유지되는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단번에 부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여성이고, 그렇기에 구양원은 태수의 칼질과 총이 아닌 미나의 총에 의해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이다.


나쁜 아버지. 목소리 톤까지 변조한 문성근은 여우다, 자신은 망가지지 않지만 영화를 구원할 생각도 없다

쌍둥이를 제외하면 사실 나머지 요소들은 전형적인 ‘누아르’의 요소이기도 한데, <수>가 한국 관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다. 아무리 한국의 자본을 가지고 한국인 스탭들을 고용해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대사를 하며 만든 영화이기에 외형적으로는 한국영화라고 해도, 내적인 논리와 정서적 측면에 있어서 <수>는 온전히 일본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수>가 만약 전체를 일본어로 더빙해 일본에서 소개된다면, 혹은 역사와 언어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해외 관객들에게는 <수>가 완전히 다른 영화로, 특히나 완성도에 있어 한국관객들과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영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아버지’를 언급할 때 많은 독자들이 위화감을 느꼈으리라 짐작하는데, 이는 당연하다. 한국에는 ‘그런 아버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의 한국영화들이 담고 있는 일관된 흐름이 바로 “아버지를 찾아서”이다. 이는 변희봉 아버지가 등장하건 백윤식 아버지가 존재하건, 원래 존재하던 아버지를 묘사한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가 없다고 여기는(즉 한윤형님의 표현을 빌어 ‘고아의식’을 가진‘) 아들들이 어거지로 찾아내 만들어놓은 인형-아버지의 모습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송인의 모습을 보라. 자기 자신이 이름난 예술가이면서 화서를 즐기고 문화-예술적 안목과 능력이 뛰어나며 홍차를 마시고 쿠키를 손수 굽는 조직의 보스란, 일본 야쿠자 보스의 모습이지 한국 조폭의 ‘형님’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아마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면 더욱 완벽했을 것이다.) 미나 앞에서 움츠러드는 수의 모습은,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낯설 수밖에 없는 태수의 근원적인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여성에게 더욱 무뚝뚝하게 굴며 말이 없는 일본남자의 모습을 닮기도 했다.


영화의 긴장감을 제대로 살려준 유일한 배우, 오만석

강성연의 모습은 또 어떤가. 개인적으로 강성연이 미스-캐스팅이라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강성연의 캐스팅이 이해가 가는 것은 그녀가 가진 외모가 영화 속에 전통적으로 구현되는 일본식 강한 여성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일본 감독들이 선호하는, 지극히 여리고 가느다란 외형적 이미지 안에 부드럽기에 더욱 강한 내면을 담고 있는 여성, 남성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여성 말이다. 강성연이 이 영화에서 어필하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수>가, 어찌됐건 한국어로 진행되는 영화라는 점이다. 한국 관객들에게 ‘강한 여성’이란 김윤진처럼 (적어도 스크린상으로는) 야무지고 단단해 보이는 육체와 강렬한 얼굴 인상을 가진 여배우가 연기할 때에 설득력을 갖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마치 한복도 어색해하는 현대 여성이 가장 엄격한 격식대로 12세기의 기모노를 갖춰 입은 채 어떡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엉거주춤해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마어마한 강도의 칼부림과 폭력이 화면에서 계속되는데도 그것이 ‘의미없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에, 소위 ‘하드보일드’ 한 액션 누아르가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긴장과 스릴, 그리고 강력한 에너지가 완전히 빠져버린 채 마치 마빡이가 의미없이 반복해서 이마를 치듯 단조로운 살육행위가 화면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열심히만 하면 뭐해, 잘해야지…” 지진희를 보면서 내내 들었던 안쓰러움

의도와 주제는 명확하나 이것이 표현되는 데에 있어 한국적 상징으로 화하지 못한 <수>는 그래서 맥빠진 폭력이 높은 수위로 반복되는 단조롭고 허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과 스탭/제작사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혹은 엉킴이 이 모든 현상의 큰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지만, 촬영 현장을 모르는 나로서야 이것은 그야말로 ‘짐작’에 불과할 뿐. 그리하여 <수>는 걸작이라고 하기엔 분명 완성도에 큰 결함이 있고 그렇다고 졸작이라고 하기엔 그 결함이 일반적인 그런 결함이 아니기에 영화를 수용하는 수용자 입장에선 낯설면서도 맛있게 삼키기 어려운 ‘유전자 변형 감자’로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수>는 거장의 ‘괴작’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20년 후쯤에는 완전히 상이한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6 Comments

  1. 괴작이라…… 뭔가 껄쩍찌근한 느낌이… 하하 잘 읽었습니다

    • 액션누아르에 너무 맥아리도 없고 긴장도 전혀 없어서 결코 잘 만들어진 영화란 생각은 안 드는데, 근데 무작정 욕할 수만도 없더라고요. 정말 ‘괴작’이란 말밖에는… 게다가 지진희의 연기는 안습 그 자체, 솔직히 지진희 앞으로 연기생활 어찌 하려나, 아주 진지하게 걱정도 됐습니다만, 다들 지진희 앞으로도 잘 먹고 잘 살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더군요. ㅋㅋ 안타까웠습니다. 나름 호감을 갖고 있는 배우라. 그 무식한 성실함이 언젠가 빛을 보는 그런 역할을 꼭 만나기를 속으로 빌 수밖에요.

  2. 오늘 처음 들렀는데 뜻밖에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 관한 부분이 잘 이해가 안가는데, 한국에 ‘그런’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권력을 물려주지 않는 폭압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최근의 한국영화는 많이 접해보지 못했습니다만, 한국의 아버지상이 부재의식에 시달리고 아들들은 고아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헤맨다는 것이 제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반대로 일본의 아버지상이 과연 그렇게 강력한가도 의문이 들고요. (피와 뼈의 키타노타케시는 그랬습니다만…) 보충 설명을 좀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구양원을 보면서 아, 일본의 아버지상은 저런 것인가보다… 라고 ‘추측’을 했다는 게, 두번째 키워드 ‘아버지’에 대해 쓴 문단의 마지막 문장입니다만. 전 송인이 됐든 구양원이 됐든, 한국엔 그런 아버지상 –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후세대들이 인지하고 재구축하고 합의된 상 – 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 물>에서 변희봉 아버지가 등장하지만, 전 그 아버지가 지금 386 끝물 감독들이 필사적으로, 가까스로 만들어낸 ‘이상적 아버지의 상’이지 그 세대에 공통적으로 재구축된 아버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준환의 영화서부터, 본격적으로 어떤 아버지상 – 살부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 을 찾아나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물>에서 그게 노골적으로 느껴진다 생각했는데, 말하자면 ‘괴물’과 변희봉 아버지는 작가가 찾아헤매는 아버지상의 양 이면처럼 느껴졌달까요. 물론 ‘괴물’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적 특성을 더 많이 가진단 생각이 듭니다만.

      한국에도 ‘박정희’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폭압적인 유사-아버지상이 존재하긴 한데, 모두들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아예 아버지가 없다는 고아의식을 갖고 있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송인이나 구양원같은) 그런 아버지는 한국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아들세대들이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인 적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그런 아버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아버지를 공통적으로 추출해낸 적은 없다는.) 구양원은 굉장히 강력하게 현존하고 있고, 더 구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었거든요. 한국영화들이 그리는 큰 형님들, 혹은 박정희나 그 유사한 이미지들의 아버지들이 강력한 듯하지만 비현실적인, 혹은 종이호랑이같은 존재로 다뤄지는 느낌이 있는 반면에 말이죠.

  3.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귀찮게 해드렸다면 죄송하고요…^^; (제가 요새 이 문제로 씨름을 하고 있어서 꼭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수’를 보지 않은 저로서는 알쏭달쏭한 문제네요. N님의 글로만 미루어보면 한국 영화는 아버지가 없다기 보다 아버지를 애써 피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만, 그렇다면 살부를 행하지 못하는 아들들의 강박증으로 저는 이해가 되네요.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똑바로 대결하지도 못하는 뭐 그런거… 그게 일본영화에서는 얼마나 다르게 나타나는가에 대해서는 역시 좀 아리송합니다만… (아, 골치가…)
    그런데 그런 존재감 없는 아버지를 ‘위화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욱 재미있네요. 눈가리고 아웅식이라고 해야하나… 괜히 으름장만 놓는 조폭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가 있군요.
    좋은 말씀 다시 감사드리고요, 이곳 참 재미있네요. 자주 들리겠습니다.

    • 아이고, 귀찮게 하셨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사실 ‘아버지’ 문제는 저 역시 요즘 몰두하고 있는 주제인걸요.

      아들은 아버지를 넘어섬으로써 세대의 권력을 이양받는 것인데, 그러기 전에 일단 아들이라는 ‘승인’을 받아야겠지요. 그런데 아들 입장에서, 역시 자신을 승인해 줄 수 있는 아버지란 아들의 이상이 투영되기도 하는데(즉 자신을 승인해줄 아버지는 아무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자격을 인정한 아버지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근대 한국에서의 아버지는 한번도 아들의 인정/존경을 받아본 적도 없고 그 아버지가 아들을 승인한 적도 없다… 이상이 저의 전제입니다. 그리고 요즘, 소위 386 끝물 감독들과 포스트-386 감독 일부에게서, 그러한 아버지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보인다는 게 저와 제 옆지기의 의견이고요. 저는 지금 감독들의 그러한 강박이, 그 자신이 실생활에서 실제로 (생물학적인)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비로소 민주화 투쟁을 거쳐 절차적 민주주의의 과정을 실험해 봤다는 경험이 있겠고요. 그런데 지금의 노 정부 이후로 이르면 3~5년, 늦으면 10년쯤 후의 영화들이 ‘지금’ 시대의 강박증을 어떻게 반영할지 꽤 궁금해지곤 합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낼까요? 살부의식을 거행할 수 있을까요? 헐리웃 영화에서는 몇년 전부터, 아들이 아닌 딸에게 권력 이양을 하는 아버지들이 본격적으로 대거 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한국의 영화들은 당분간 굉장히 가부장적 정서를 계속 담아낼 것 같습니다.

      sapa님 덕분에 저도 제 생각을 조금 더 구체화시킨 부분이 많습니다. 언제 sapa님의 고견도 꼭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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