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 살로, 소돔의 120일

아트시네마에서 지난번 파솔리니 회고전을 할 당시에도 이 영화는 그냥 건너뛰려 했습니다만, 게으름 피우다가 막판에야 가고 보니 볼 영화가 얼마 안 남았더군요. 어차피 언젠가는 볼 영화가 아니겠는가, 큰 각오를 하고 극장에 들어갔지요. 전 심하게 비위가 약한 사람이고 신체훼손은 도저히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끝까지 견뎌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도저히 못 견딜 만한 장면에선 눈을 자막에만 고정시키고, 특정 장면에선 ‘저건 초콜릿이야, 저건 초콜릿이야’ 이렇게 자기암시를 걸며 결국 끝까지 버텨냈습니다. 그런데 보고나니 참 슬프고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흔히들 이 영화를 “파시즘을 풍자한 영화”라고들 하지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권력자들이 변을 즐겁게 먹고 그걸 납치해온 소년소녀들에게 즐겁게 먹기를 강요하는 장면을 보며 결국 눈을 자막에만 고정시키는 것으로도 안 돼서 ‘저건 초컬릿이야, 저건 초컬릿이야’라고 끝없이 속으로 중얼거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보는 도중 헛구역질을 해댔던 제가 그렇게 중얼거림을 반복하고나선 그 장면을, 그리고 입가에 변을 묻힌 채 키스를 하는 노인네를 비추는 클로즈업 장면을 그래도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단 겁니다.


저는 파시즘을 잘 모릅니다. 정확히 파시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에게 파시즘은 그저 히틀러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서 사람들을 대량학살한 이즘” 정도로나 박혀있을 뿐이고, 히틀러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 혹은 ‘절대악’의 대표명사로나 존재할 따름이지요. 그렇기에 히틀러가 실제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합법적으로 집권했다는 사실도, 당대 유수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 지식인들이 히틀러에게 그토록 매혹되어 자진해서 협력했다는 사실도 그저 당혹스럽게 느껴질 따름입니다. 게다가 파시즘은 또한, 얼마나 미학적인가요. 제가 가진 미감 중에는 한없이 여리한 대상에 대한 매혹도 있지만, 잘 다듬어진 강한 근육에 대한 열광도 있습니다. 만약 저 시대에 독일에서 태어났더라면 나 역시 기꺼이 히틀러에게 표를 던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합니다.


파시즘은 왜 그토록 당대 사람들을 매혹시켰을까요? 철학의 조류와 근대의 이성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근대에 그토록 중시된 이성과 합리가 극단적으로 밀어부쳐졌을 때 탄생한 이즘이 바로 파시즘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기존에 변은 그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었지만, 만약 이성과 합리의 의지의 힘으로 그것은 사실 더럽지 않으며, 실제로 맛있는 음식이 될 수도 있다, 라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하게 되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우리는 과학자들에게서 “똥은 실제로 더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과학적 사실을 종종 전해듣곤 합니다. 똥, 혹은 동물 중에서 뱀을 볼 때마다 거의 반사적으로 나오는 혐오감이 사실은 과학적으로 별 근거가 없고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습관’의 일종이라 분류했을 때, 그렇기에 그것을 이성과 과학과 합리와 의지의 힘으로 그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한다면… ‘변’은 극단적인 예일 뿐이지요. 사소한 예는 얼마든지 우리 생활에서 존재합니다.


똥을 먹는 장면을 보며 ‘저건 초컬릿’이라고 끝없이 자기 암시를 걸면서, ‘혐오스럽긴 해도 어차피 저건 극적으로 연출된 것이고, 저들은 배우이며, 저것은 진짜 변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논리적으로 납득시켰을 때, 비로소 그 장면들을 제가 견뎌낼 수 있었던 것. 파시즘과, 제가 그 장면을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그리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 영화를 보는 행위를 폭력적으로 강제받지는 않았다는 것. 우리가 파시즘을 ‘악’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들만의 이상을 다른 이들에게 폭력적으로 강제했으며, 그 결과 다른 이들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폭력’의 외연을 조금 더 넓혀 생각해 봅시다. 물론 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자유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제 눈 앞에서 펼쳐진 그 장면들, 그 영화에 대해 논하기 위해 그 영화를 끝까지 봐야 했던 그 상황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폭력적이라 할 만합니다. 영화의 하나의 공식, 소위 ‘형식미’라는 것도 아주 넓은 의미에선 관객들에게 폭력적입니다. 상징 역시 마찬가지지요.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 역시 기존의 나의 습관이나 패턴을 수정하는 폭력을 요구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행할 영향력에 동의하기에 폭력이라 분류하지 않을 뿐이죠.


물론 저는 파시즘을 옹호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다. 파솔리니가 이 영화를 만든 것도 파시즘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지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관객으로서 이 영화와 1:1로 소통을 하면서 파시즘이 작동하는 원리 중 한 패턴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솔리니가 이 영화를 만든 의도에도 그런 게 분명 존재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와 그렇게 소통에 성공한 것은 물론 저의 의지이기도 했지만요.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 폭력적인 상황에 억지로 놓였던 아이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반항을 하다 중간에 살해되거나, 조금씩 숨쉴 만한 틈을 찾아 일탈을 저지르곤 다른 이의 일탈을 고발하거나, 그 상황에 너무나 적극적으로 적응하거나 합니다. 막판에, 그 권력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 온갖 신체적 폭력을 저지르고, 상황에 잘 적응한 일부 아이들은 그걸 지켜보며 지극히 심상한 대화를 나누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파시즘이 작동하는 원리의 어떤 패턴들이고, 그리고 그것이… 인류가 살아남은 한 가지 방식이기도 하죠. 파시즘을 무조건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어떤 악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레벨을 붙이는 대신, 파시즘이 정확히 무엇이고, 왜 그토록 파시즘에 매혹되기 쉬운 것인지 공부하는 게 훨씬 더 건설적이란 결론을 내리고 파시즘에 대한 일체의 가치 평가를 일단 배제한 뒤 공부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파시즘을 욕하면서 실제로 파시즘적 과오들을 저지르곤 자기 행위가, 자기의 지향이 파시즘인지 스스로 인식도 못 하는 행태야말로, 제가 피하고픈 어떤 현상들입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결국 봤구나. 대단하다.
    내가 역시, 마지막에 네가 생각한 그것들을 위해서라도 봐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어. 하지만 역시 견디지 못할 듯.

    • 참 대단한 영화긴 하더라고요. 왜 그리 유명한지 충분히 납득이 갔어요.
      20대 때 이 영화를 봤다면 아마 평생 영화의 진의는 이해못한 채 혐오스런 영화로만 기억했을 것 같아요. 나이를 먹어서 본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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