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 하나

E양이 한 문장으로 간결하게 정리한 바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하나>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웠다는 겐로쿠 시대에,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복수극이라는 아코 무사 47인 이야기의 주인공들 ‘옆집’에 살았던 어느 심약한 사무라이의 이야기

Hana

저 섬섬옥수 봐라...

이다. 극 말미를 장식하는 복수 이야기가 원래 존재하던 이야기, 그것도 일본인들에게는 두루 알려지고 공유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영화의 의미와 재미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든다. 나 역시 첫번째 볼 때에는 산만하고 루즈하며 늘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저 사실을 알고서 다시 봤을 땐 영화가 완전히 달라보였더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는 소위 ‘명분’을 위한 죽음/살인보다 비겁한 생존 혹은 함께 하는 삶이 더 가치있다 말하며, 인류가 그토록 사랑해온 ‘허구’라는 것이 갖는 힘과 의미를 고찰한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복수담을 정면에서 부정(“뒷방 늙은이 하나를 장정이 데로 몰려가 죽이는 건 비겁한 짓”)하며, 이를 ‘허구’의 힘을 빌어 완전히 다른 각도로 재구성해 버린다(“47번째 무사”). 뿐만 아니라 주인공 소자(오카다 준이치)는 자신의 임무인 ‘복수’ –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 역시 아무도 죽이지 않고 완수한다. 어떻게? ‘허구’의 힘으로! (배우가 관객이 되고 관객이 배우가 되는 참여극?)

각자 몇 평도 안 되는 다다미 방에서 살지만, 이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의 골목, 광장, 우물가 등 모든 공간이 공유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명절을 함께 지내고 연중행사를 함께 한다. (반면 소자가 아버지 제삿날에 맞춰 가게 되는 소자의 집은 집 자체는 넓지만 폐쇄적이고 닫힌 공간이라 오히려 ‘마을 전체를 내 놀이터 삼는’ 저쪽 마을 사람들보다 더 좁고 답답한 곳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동체 정신은 현대사회가 되면서 사라진 것,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저 지나간 과거에 대한 퇴행적인 향수만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 바로 뒤에, 과거 무사이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때만 되면 ‘할복병이 도지는’ 이가 소자를 향해 “천하의 사무라이가 천한 것들이나 하는 육체노동을 한다”며 이죽대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면서, 과거에 사라진 것들이 모두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었지만, 그만큼 소중한 나쁜 것을 버릴 수 있었고, 또 그만큼 새로운 소중한 것을 얻기도 했다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임권택 감독의 한계가 떠오르며 바로 대조돼 버렸다는. 임권택 감독이 천착하는 지점은 언제나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향수’에 그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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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연극에 몰두중인 아사에(미야자와 리에)와 그의 아들 신보

엄숙주의자 무사들은 ‘무사의 고결한 복수’를 한갖 저잣거리의 놀이감으로 전락시킨다고 분노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매년 봄꽃 축제마다 행하는 연극, 바로 이 ‘허구’라는 형식은, 사람들의 한과 슬픔과 절망을 조금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바꾸어주고, 또 승화시킨다.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던 인물 오사에의 대사를 빌어 “가슴 속의 똥을 떡으로 바꾸는 것”, 그것이 바로 연극, 그리고 허구라는 것의 놀라운 힘이다. 열매는 맺지 못한다 하더라도 흐드러지게 꽃은 피워낼 수 있는 것. 벚꽃은 때가 되면 알아서 꽃을 피운다고 하나, 어디 사람 사는 모습들이 그러한가. 열매는커녕 꽃잎 하나, 잎사귀 하나도 피워내지 못한 채 병들어 죽이는 경우가 다반사. 꽃이라도 흐드러지게 피워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이 아닌가.

‘허구 찬미’를 통해 드러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이러한 놀라운 낙천성과 따뜻한 시선은, 내가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가 비록 <환상의 빛>과 <아무도 모른다> 두 편뿐이지만, 이전 영화들의 스타일과 확연히 차별되는 어떤 전환점을 보여주는 것같다. 이 감독이 애초 영화를 시작한 것도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고, 이전작들 역시 극도의 다큐멘터리 스타일을 자랑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하나>에서 드러나는 허구 예찬은, 어쩌면 역시 다큐멘터리로 시작했다가 진짜 현실이 무서워 허구 즉 극영화로 방향을 틀었다는 키에슬로프스키 감독과는 정반대로, ‘이제서야 용기를 내어 허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는, 이 감독의 (예전 다큐멘터리 스타일들도 언제나 카메라 뒤에 따뜻한가슴을 갖고 있긴 했지만) 이런 식의 허구 예찬의 태도야말로, 리얼리즘을 핑계 삼아 (비록 허구 속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극단의 고통을 가하고 그 고통을 한껏 포장하여 전시하는 그 어떤 감독들의 영화들보다 훨씬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진다. 허구에 이런 힘이 있기에 인류의 문화사에 있어 문학이, 그리고 문학에서 파생된 (영화를 포함한) 그 무수한 예술들이 그토록 질기게 생명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연극 <필로우맨>에서 카투리안이 목숨을 던져 자신의 ‘이야기들’을 지키고자 했던 것도, 바로 허구의 이런 위대한 힘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Hana


소자(오카다 준이치)의 얼터-에고라 할 수 있는 소데(카세 료)와 그를 흠모하는 ...

그러므로 모두들 즐겁게 웃고 떠들며 여유롭게 살 수 있는 평화의 시대란 그 얼마나 좋은 것이고, 칼싸움 대신 글을 가르치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이냐. 영화의 맨 마지막. “서당이 어디냐”고 묻는 꼬맹이(아사노 타다노부가 맡았던, 소자의 원수 가나자와의 의붓아들)의 존재로 영화가 끝맺음을 하는 것은,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가진 건강함과 아름다움이 한 점으로 모아지는 장치이다. 소자는 그를 용서했고, 그는 그 용서에 화답했으며, 자신들의 후세들에게는 더욱 아름답고 귀한 것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야 할 길’이다.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노모가 돌아가셨을 때 “참 안 됐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소자의 동생은 그런 소자를 보며 ‘나약해졌다, 변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변화, 아름다운 발전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하나>는 정확하게 <300>과 가장 정반대편에 위치해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히 정반대의 세계관, 완전히 정반대의 관점, 완전히 정반대의 가치. 그러나 소박한 화면의 <하나>의 화면 역시 볼거리가 많다. 장면 하나 하나가 참 아름답게 찍히고 편집되었다. 무엇보다 카메라 뒤의 시선이 참으로 따스하고,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참으로 좋다.

소자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나오는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참 사랑스럽고 귀엽다. 저 카세 료가 맡았던 소데의 캐릭터는 좀 가슴아프지만.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 만세!! (세상에 잘 생기기까지 @.@)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4 Comments

  1. 잉잉잉 소데키치 달링, 등신같이 남의 여자나 지켜보겠다니… T_T
    차라리 나한테 올 것이지. T_T

    • 그러게 바보같이.
      그래도 참 순정한 사내가 아닌가…

      소데키치 같은 캐릭터 사실 내가 완소하는 캐릭터인데
      (삐딱한 독설가, 그러나 알고보면 순정하고 여린 사내… 크흑.)
      영화는 워낙 딴 사람들 얘기라…

  2. 추신구라 옆집에 살았다니…ㅋㅋㅋ;;;
    오카타 준이치가 복수의 사무라이로 나온다는 설정부터가 웃겼어..

  3. 벼르다가 봤음. 히로카즈 감독이 드라마 < 사라기 캣츠아이> 재미있게 본 모양이던데. 키사라기의 수호신도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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