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러비안의 해적 시리즈

애초에 디즈니랜드의 테마공원을 주인공으로 한, 그저 신나는 (그러나 바보같은) 오락영화의 운명을 타고난 <캐러비언의 해적>(아놔 이 제목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카리브(해)의 해적도 아니고 캐러비언 파이러시도 아니고…) 시리즈는 이제 나에겐 최고의 블록버스터 시리즈 중 하나가 되었다. 윌 터너가 늠름한 남자가 되는 것도 좋았고(여자 말 잘 듣는 이 남자, 모자장수님 말씀대로 찌질남들이 안겨주는 짜증에 대한 좋은 해독제다. 한국영화들엔 얼마나 찌질남들이 넘쳐나는지…), 엘리자베스가 코르셋을 벗어던지고(1편에서 캡틴 스패로우께서 찢어주시는 건 결과적으로 얼마나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는가) 해적왕이 되는 것도 좋았다. (이 둘은 사실 대단히 ‘근대적’인, ‘근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고, ‘미국의 건국 정신’의 모태가 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1편을 다시 보니, 실제 “역사적인 해적”과 당시 상황은 2편에 와서 살짝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의 신대륙 발견, 식민지 경영, 제국주의의 확장… 해적이 활동했던 시대는 바로 이 때였고, 엘리자베스 여왕 당시 영국의 해적 함대가 ‘무적의’ 스페인 함대를 깨고 신항로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도, 그리하여 소위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는 식민지 제국을 경영한 것도, 해적을 통제하면서였다. 2편에 등장하는 나포허가증. 해적들은 신항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점차 이들이 정부에 복속되고, 이후 해적들의 활동무대가 카리브해로 옮겨지게 된다. 1편에선 이미 전설 속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던 마지막 해적들을 불러오지만, 2편에선 해적들이 맹렬하게 활약하고 있던 시대로 슬쩍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캐러비언의 해적 3>의 도입부에서, 본국의 빈민들은 해적과 내통했다며 (즉 왕족과 귀족의 몫인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댄 족속들과 연결돼 있다며) 심지어 아이들까지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 와중에 3편의 해적들은 혁명가의 이미지를 획득한다.


3편이 그러므로 우울하고 격한 분위기가 된 것은 (1, 2편의 액션장면들과 달리 디즈니 제작치곤 꽤 잔혹한 장면도 포함되어 살짝 놀랐다는), 이 영화가 사람들을 웃기는 와중에도 나름의 건강한 도덕과 양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리 브룩하이머의 반골 기질이 반영된 것일까. 전설 속의 마지막 해적들을 불러온, 신화/전설 속의 해적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1편이었다면 2편은 이것을 역사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3편이 되면 해적 이야기는 이제 판타지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나는 이런 흐름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아무렴 ‘저승을 경험한’ 인간이 나오는데. 캡틴 스패로우의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 장면들은 사실, 스패로우가 새로 얻은 병 – 정신분열증 – 을 묘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판타지는 당연히 잔혹하고 격렬한 이야기이고, 3편이 살짝 우울하고 격한 분위기가 된 것은 이런 흐름에선 당연한 묘사이다.


속편이 다시 나온다면, 이젠 아마도 판타지의 시공간에서 캡틴 잭이 펼치는 어드벤쳐물이 되겠지. (이 인간이 어딘가에서 나침반을 얻었듯 그렇게 어딘가에서 이미 불로불사약을 줏어먹었을 게 틀림없다고 밀고나가버려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와 윌 터너는 굳이 다시 주인공으로 나올 필요도 없어지고. 특히 엘리자베스는, 마치 웬디처럼 현실 속으로 돌아가버렸으니까 아예… 그저 플라잉 더치맨 호의 선장이 슬쩍 카메오 출연해 주는 정도가 되려나. 그리고 둘의 애가 캡틴 잭과 함께 모험길에 따라나서는 거지. 근데 난 워낙에 캡틴 스패로우의 팬이긴 하지만, 윌과 엘리자베스가 없는 캐러비안의 해적 속편은 꽤 섭섭할 것 같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3 Comments

  1. 아니 웬 마르크스와 제인 오스틴… 글을 써놓고 샤워를 하다가 시기가 심하게 어그러진 것을 깨닫고 그 부분 삭제.

  2. 영화는 아직 안봤는데 새로운 글은 거의 습관적으로 보기때문에 글을 읽어버렸네요.ㅠㅠ 캡틴 잭 스패로우(우엔지 뒤에 꼭 선장을 붙이고 싶어지네요.캡틴 잭 스패로우 선장,바부팅이)만쉐이~~

    • 이런. 스포일링을 당해버리셨군요…;;; 죄송해요;;;;
      하여간 캡틴 잭 스피로우 만세! 입니당.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