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미드나잇>에 대한 옛날 글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의 <라운드 미드나잇>에 대해, 2003년 11월 4일 새벽 1시 44분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라운드 미드나잇>은 따베르니에 감독의 매우 ‘개인적인’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찰리 파커의 이야기를 <버드>라는 영화를 통해 풀어내며 재즈에 대한 사랑을 과시했듯, 따베르니에 감독은 버드 파웰의 실화를 느슨하게 각색하여 <라운드 미드나잇>을 통해 재즈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다. 미국이 발명한 음악, ‘재즈’에 대한 프랑스인 감독의 사랑이 표현되는 이야기답게, 황혼기에 접어든 (한때) 위대한 재즈연주자와 어느 프랑스인 간의 우정.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좋다. 영화에서 표현된 두 남자의 우정도 정말 좋다. 이를테면, 그들이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위대한 테너 색스폰 주자였지만 근래에 와서 왠지 ‘밀리는 듯한’ 데일 테너가 파리에 와서 ‘블루 노트’(재즈의 상징인 이 이름!)란 이름의 클럽에서 공연하는데, 그를 열렬히 숭배하고 있던 진정한 팬인 프란시스는 클럽에 들어갈 돈이 없어 클럽 하수구 창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음악을 듣는다. 프란시스가 문 바깥에서 쪼그리고 앉아 음악을 듣는 장면은 두 번인가 나오는데,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다. 여전히 연주는 잘 하지만, 알콜중독자라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클럽에서도 술을 금지당한 데일은 어떻게든 술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그 알콜중독이 된 머리로 잔머리를 쓰다가, 클럽 앞에서 마주친 프란시스에게 ‘맥주 한 잔’을 구걸하면서 비로소 만남이 이루어진다. ‘데일의 친구’라는 직함으로 프란시스는 드디어 ‘공짜로’ 그 클럽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데일의 음악을 정말 황홀한 표정으로 듣는다. 아내도 없이, 단 하나뿐인 십대 초반의 딸래미가 아버지를 기다리며 무서워서 떠는데도 그 딸을 방에 팽개쳐둔 채. 그리고 프란시스는 이후 데일의 ‘가방모찌’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심지어는, 데일을 자기 집에 데려와 함께 살면서 보살피기 위해 헤어진 전 아내에게 손을 벌려 큰 집으로 이사한다.


술 때문에 망가져가는 데일이 너무나 안타까운 프란시스는, 세상에, 밤에 혼자 훌쩍이면서 ‘운다’. 데일은 이 ‘진정한 팬’, 그리고 ‘친구’를 위해, 세상에 다음날 프란시스의 침대에 아침을 차려다 갖다주며 ‘금주’를 선언한다. 얼마 후에 돈 좀 빌려달라는 데일에게 지폐를 내주고는, 몰래 술을 사마실까봐 도저히 불안해하던 프란시스는 데일을 미행한다. 그리고 그가 카페에서 그저 오렌지 쥬스와 담배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오마이갓.


다소 비아냥조로 글을 썼지만, 나는 앞에서도 밝혔듯 두 사람의 우정이 너무 좋다. 그리고 둘을 비웃을 생각이 없다.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누군가의 팬 노릇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는 사람만이 프란시스를, 데일을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비웃는 그 사람들을 비웃을 것이다. 내가 오히려 조마조마했던 건, 저 순전하고, 저 열정적인 ‘팬’인 프란시스가 데일의 무심함에 상처받으면 어쩌나였다. 스타가 무심한 건 그가 배려심이 없다거나 성질이 못돼먹어서는 아니다. 그들은 ‘팬’이란 이름의 존재가 스타가 한번 진 신세를 빌미로 지나치게 달려들기 시작해 자신의 사생활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에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고, 혹은 그에게 순간의 좋은 기분으로 ‘친구’의 자리를 하사했다 하더라도 무심하게 굴 수밖에 없다. 프란시스의 저 뻘쭘한 순간들. 연주가 끝난 뒤 자기의 동료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스타를 보며, 그 무리에 끼지 못하고 뒤에서 뻘쭘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긴급한 소식을 알려주려고 ‘친구로 인정해준’ 그의 아파트에 갔더니 그와 그의 동료들이 파티중일 때, 그리고 파티 손님 중 하나가 “냄새도 잘 맡네”라며 지딴엔 별 악의를 담지 않은, 그러나 듣는 이에겐 지독하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기분이 얼마나 뻘쭘하고 민망할지, 겪어보지 않았어도 나는 안다. 그런데 데일은 프란시스에게 지나치게 가식적인 친절을 보이지도 않고, 그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프란시스의 호의를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적절하게 반응한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우상이 망가지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한밤중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자신의 열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눈물을 우연히 본 데일은, 자신의 ‘친구’를 위해 난생처음으로 ‘금주’를 선언하고, 정말로 실천에 옮긴다…


프란시스는 그렇게, 데일의 친구의 자리를 확실하게 잡아간다. 그저 자신의 위대한 우상이기에, 데일에게 좋은 식사와 좋은 잠자리와 좋은 집을 제공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방모찌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그가 연주의 댓가를 직접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이전에는 알콜중독으로 계약서에 서명조차 못할 정도의 그를 ‘보살펴’주면서 적절히 이용도 하는 버터컵이라는 흑인 여인에게 돈이 지불됐다.) 데일은 프란시스와 그의 딸 블랑제에게 좋은 친구의 역할을 하고, 무엇보다도 지독히 아름다운 음악들을 선사한다. 작곡도 다시 하고, 연주에도 힘이 붙는다… 프란시스는 프란시스대로,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대박을 날리며 안정세를 잡아간다.


각자의 본래적인 일상생활을 위해 데일의 프랑스 체류를 끝내고 난 뒤, 데일은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악몽에서 깨어나 잠을 이루지 못하던 프란시스는, 아침 일찍 전보를 받는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정말로’ 이별을 맞는다.


돈이 없어 연주클럽 바깥에서 연주를 듣던 관객과 재즈 뮤지션 간의 우정이라는 모티브는, 버드 파웰의 에피소드에서 빌어온 것이다. 이것을 느슨하게 기반으로 하여 픽션으로 바꾸었다. 데일 터너 역할은 실제 위대한 테너 색스폰 연주가인 덱스터 고든이 맡았는데, 특유의 그 느릿느릿하고 정말 알콜중독자 같은 어투로 푸근한 감동을 준다. 프란시스 역을 맡은 프랑수아 끌뤼제는, 알고보니 <올리비에 올리비에>에서 아버지로 나왔던 바로 그 배우였다. 프랑스에선 아주 유명하지만 한국에는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배우. 영화 전체의 뮤직디렉터는 허비 행콕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를 제치고 이 영화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허비 행콕은 직접 출연까지 한다. 그리고… 마틴 스콜세지의 깜짝 출연! 대사도 많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정말 많은 말을 쏟아내는 수선스러운 속물 클럽주인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영화 내내, 아주 금싸라기 같은 비밥재즈 음악들이 계속 흘러넘치는데, 이것은 허비 행콕과 덱스터 고든이 직접 연주한 곡들이다. 이러니,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나는 사실 두 남자의 우정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저 위의 표현들은, 그저 줄거리의 나열일 뿐이다. 그리고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을 묘사했을 뿐이다. 데일이 죽은 후에도, 데일의 모습을 찍어놓은 필름을 영사기로 돌려보며 그를 그리워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이 얼마나 마음 짠한데. 둘의 그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그러면서 지독하게 정직하고 순전한 우정이 얼마나 감동적인데. 내 언어는 저 따위로밖에 표현하지 못 한다. 그래서… 슬프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6 Comments

  1. 음? 따베르니에? 행콕? 마티 할아범?
    영화도 좋지만 음악은 더 좋아. 어차피 이번에 시네바캉스 상영작이니까… ^^

  2. 시네바캉스 상영작?! 역시 내부 정보를 알고 계시는군요. 으흐흐 ;-)

    저는 역시 마 선생님 때문에 기억하는 영화입니다만, 정말 좋았지요. 예전에 EBS에서 했을 때 그냥 무심코 한 번 틀어봤는데 오프닝 크레딧에서 제가 좋아하는 바비 맥퍼린의 음악이 나오기에 앉아서 끝까지 봤더랬습니다.

    • 하핫, 사실은 이 영화밖에 모릅니다. 지금 작업중이거든요.

      음악은 잘 모르지만 따베르니에 감독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어서 DVD숍에서 이 영화를 발견하고 냉큼 대여해서 본 게 벌써 4년 전이네요. 데일 터너 역을 맡은 덱스터 고든도 이 영화 때문에 알게 됐어요. 정말 알콜중독자같은, 그 흘리는 느린 발음이 매우 인상적인데다 원래 배우가 아니라 색소폰 주자란 얘기 듣고 더 좋았거든요. 확실히 비전문배우한테서 굉장히 좋은 연기를 뽑았을 때 나오는 그런 연기가 나와줘서요.

      작업하느라 이것저것 뒤지면서 재즈의 역사도 보고 그러고 있는데, 재즈는 정말이지 위대한 음악이란 생각이 새삼 듭니다.

  3. 일전에 이 글 보고 꼭 봐야지 했다가 어제 봤는데…
    오우 굿~입니다.
    저도 음악을 훔쳐 듣는 프랜시스의 모습, 특히 공연 첫날 추적추적 비내리는데 처량히 들으면서도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한 프랜시스의 모습이 인상 깊네요. 그리고선 데일이 맥주 한 잔 사달라고 할 때 프랜시스의 난감함이란… ^^;
    몸이 피곤해 못 볼 뻔했는데 봐서 참 다행입니다.

    • 앗, 저도 어제 가서 봤어요. 사실 제가 자막 감수를 본 영화라 자막 확인하러 갔었는데 고칠 데가 어찌나 많이 나오던지 지금도 챙피해 죽겠습니다.

      어쨌건, 제가 이 블로그를 운영하는 목적 중 하나가 좋은 영화와의 미팅 주선인데, 크게 한 건 성공한 거군요! 하하. 영화 좋으셨다니 저로썬 마냥 기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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