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마셜 | 디센트

The Descent

<지옥의 묵시록>의 그 장면을 닮았다

사지절단 호러는 못 보고 일명 ‘J 호러’들은 굉장히 불쾌해한다. <디센트> 시사회가 잡혔을 때 기자랍시고 취향에도 안 맞는 이런 거 보러 가야해? 라며 투덜투덜 거렸는데 워낙 호러팬층의 지지도가 높아서 꾹 참고 갔다가, 내가 사지절단 피바다 영화 ‘모두’에 그런 경련을 일으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왔다. 아니, 심지어 이 영화는 보면서 내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신나더라고. 이런 경험은 <황혼에서 새벽까지> 이후 참으로 오랜만인데, 저 <황새>마저도 워낙 고어 이미지에 취약하던 당시 조금 불편해했던 걸 생각한다면, 그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곤 해도 이렇게까지 아무 거리낌없이 장면 장면들을 즐긴 게 스스로도 놀랍기만 하다.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6명의 여자친구들이 동굴탐험을 갔다가 갇히고, 그 안에서 괴생명체에게 습격당하면서 끔찍한 생존투쟁을 벌인다는 이야기. 영화의 시작은 6명 중 세 명이 함께 험한 래프팅을 즐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래프팅이 끝나는 지점에서 주노와 사라 남편간의 불륜관계와 베스가 이를 알고 있다는 설정이 그대로 화면을 통해(오가는 시선을 잡는 것만으로) 제시되고, 여기서 돌아오는 길에 사라 가족이 탄 차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사라의 남편과 아이가 죽고 사라만 살아남음으로써 사라에게 트라우마를 설정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은 이로부터 1년 후,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의 어느 오두막. 래프팅 씬에서 봤던 세 명 외에도 ‘미국에 살고 있던’ 두 자매 레베카와 샘이 사라와 주노와 베스의 친구로 합류하고 주노의 제자 홀리가 여섯번째 멤버로 합류한다. 여전히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라는 여리고 예민한 모습이고, 동굴탐험을 이끄는 리더 주노는 다소 과장한다 싶을 만큼 자신만만하고 활달하다. 베스는 그저 사라가 가여워서 감싸고돌고, 레베카와 샘은 명랑한 친구들이고, 홀리는 가장 젊은 멤버답게 천방지축. 이들의 기본 성격은 오두막에서 보내는 하룻밤에서 아주 짧게 묘사되고, 다음날 아침부터 떠난 동굴탐험에서 각각의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제시된다. 주노의 공명심 때문에 그들은 동굴 안에서 지도 안에도 없는 곳으로 흘러들어갔다가 갇히고, 폐소공포증을 느끼고, 어떻게든 동굴을 빠져나가기 위해 길을 찾다가 마침내 ‘그것’과 조우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괴물에 쫓기며 사투를 벌이던 사라가 피웅덩이에 숨었다가 나오는 장면이다. 마치 <지옥의 묵시록>에서 마틴 쉰이 말론 브랜도를 죽이기 위해 위장을 하고 숨어드는 장면, 물 속에서 솟구치는 바로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영화에서 전통적으로 동굴은 신화학에서 말하는 ‘요나의 뱃속’과 가장 근접한 장소이지만, 이 영화에서 피웅덩이에서 나오는 장면이야말로 <지옥의 묵시록>에서도 그러했듯 그러한 ‘요나의 뱃속’의 핵심 의미를 재현하는 장면이다. 요나의 뱃속이 어떤 장치이던가. 소명을 받은 주인공 영웅이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즉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이 장면은 영화에서도 매우 후반부에 위치하는데, 이 장면은 사라의 성격변화를 함축한다. 피웅덩이에 뛰어들었다가 나오는 걸로 무사히 도망쳤던 사라는 그 웅덩이까지 헤치고 쫓아온 암컷 괴물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 영화 전반부 내내 보여준 여리하고 안쓰러워 노상 주노와 베스가 걱정하고 챙겨야 했던 나약한 이미지를 벗고 광기의 눈빛과 전사의 몸짓을 갖는다. 이 장면 이후의 사라는 영화 전반부와 사라와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라를 목격하면서 애초의 ‘가짜 영웅’ 주노의 자질 부족의 모습이 공식적으로 확인된다. 물론 그녀 역시 괴물과의 사투 초반에 실수로 베스를 찍으면서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기는 한다. 이후 매우 능숙한 몸짓으로 괴물들을 처치하는 그녀를 보며 다른 친구들이 살짝 소름돋아 하는 장면이 잡힐 정도다. 그러나 주노는 결국 가짜영웅일 뿐이다. 이것은 그녀가 친구들을 속이는 비밀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채 그저 숨기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주노가 정말로 가짜영웅이 되는 순간은 바로, 자신이 해한 친구를 버린 것보다도, 이 사실에 대해 사라에게 거짓말을 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이란, 현실과 자신의 과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라가 주노를 ‘처단하기로’ 한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던 듯하다.

The Descent

"쟤 저러다 당하지... 우린 조용히 하자"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페미니즘이 일반화된 21세기에 사회에 진출해 남자들과 경쟁하고 남자들의 룰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대여성들이 겪게 되는 혼란과 고통을 은유하는 영화로 충분히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가 저 피웅덩이에서 치솟는 바로 그 장면에서 나는 아아, 하면서 긴 깨달음에 몸을 떨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을 공격하는 저 괴생명체가 결국 여성들의 진출에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경쟁에서 밀려난 현대 남성들, 혹은 그러한 남성들과 함께 더욱 자신의 위치를 초라한 것으로 여기길 강요받는 전업주부들의 모습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남자는 수직적인 관계를, 여자는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언어 역시 그러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 임노동을 하며, 혹은 전문직으로 사회 노동을 하며 전통적인 여성과는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된 현대의 여성들은 무한경쟁이 계속되고 신자유주의가 확대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건 싫건 기존에 소위 “남자들의 룰”이라 불리던 것들을 철저히 체득하고 이를 확대재생산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쩌면 자신 때문에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의 공간이 침입을 받은 것일수도 있는 괴생명체들을 차례차례 죽여야 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바로 그 단계를 겪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존의 소위 ‘남자들의 세계’에서 성인이 되는 관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어쩌면, 주노로 상징되는 ‘남성화한 여성’들의 전략이 이제 낡은 것이 되었고, 사라의 모습에서 보이는, 기존의 남성의 룰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성적 면을 잃지 않는 ‘새로운 여성상’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라는 주노를 ‘처단하고’ 혼자 남은 뒤 자신의 아이와 대면하며 자신의 모성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니 말이다. 또한 그러한 남성화한 여성들이 여성들과 경쟁하고 여성들을 더욱 구박하는 것에 대한 ‘처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The Descent

피를 뒤집어쓴 전사가 되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사실 <디센트>는 최근 나온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페미니즘적이다. 외면적으로도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각기 다양한 개성과 강인한 체력을 뽐내고 직업도 다양하다. 이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가 함정에 빠지는 꼴을 그냥 보고있기도, 그냥 돌아서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베스와 사라가 보여주듯 자신의 친구를 마냥 걱정하며 친구로서의 의리를 다 하기도 한다. 사라가 주노를 처단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배신과 거짓말 때문이다.

마지막 엔딩에 대해선 감독이 명확하게 결론을 내는 게 아니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물론 괴물들은 또다시 떼거지로 몰려올테고, 그녀는 여전히 출구를 못 찾을 수 있다. 꿈에서 보이듯 출구를 찾는다 해도 이제 그녀의 삶은 예전과 완전히 다르며, 끝내 주노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있던 곳에 비치는 한줄기 햇빛, 비록 그것이 가파른 절벽에 있더라 하더라도, 그 빛을 사라는 결국 찾아서 나오지 않을까.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토록 강인하게 변한 사라라면 꼭 그랬으면 좋겠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정말, 이 영화의 피바다는 너무 멋졌습니다.
    (헌데 지금 생각하자니 왠지 속이 울렁.. 지금 장이 탈나서 그런가봐요;)
    저도 강인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는 건 무척 즐거웠어요. 물론 사라가 압권이었죠 :]
    영화를 보고 나와서 “아. 한명쯤 살았어도 좋쟎아!”라며 사라의 탈출을 긍정적으로 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 빛을 찾아 나왔기를.

    • 네, 정말 박진감 최고였지요. 영화를 막 보고 나왔을 땐 개봉하면 다시 봐야지, 했었는데(시사회로 봤거든요), 막상 개봉하고서 다시 보려고 생각하니 역시 속이 울렁이면서 꺼리게 되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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