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 야수

오랜만에 나오는 ‘남성 마초’ 영화라 좀 기대를 하다가, 투톱이 권상우 – 유지태란 얘길 듣고 바로 기대를 접었었습니다. 뭐 발음 안 되고 연기 안 되는 애들 데려다 ‘남자의 폼’을 어설프게 흉내낸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남성 마초영화라 할 때, 테스토스테론이 폭발적으로 뿜어져나오는 걸 기대하는 건 당연한 거고, 권상우나 유지태나 저에겐 ‘애’로 보일 뿐입니다. 애들이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그 중에서도 어린 남자애들이 성인남자 흉내를 내는 건 정말 눈뜨고 못 볼 꼴불견으로 여기는 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인터넷은 온통 ‘야수괴담’으로 뒤덮이고… 헌데, 별 기대치 않고 영화를 보러 간 친구가 열광상태로 돌아와서, 야수괴담 분위기에서 한사람이라도 ‘야수 조아’ 패를 만들고자 공작을 펼치더군요. 그 공작에 넘어가서 함께 심야영화로 보게 되고서.


저는 이 영화의 김성수 감독을 제 리스트에 올려놓습니다. 아아, 그 연기 안 되는 배우들을 데리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 놓다니 이건 기적이에요!



친구는 왕년의 홍콩영화들, 특히 오우삼을 필두로 한 홍콩 누아르의 정서와 분위기를 제대로 한국영화로 되살렸다며 좋아했는데, 홍콩 누아르와 별 상관없이 살아온 저로서는 느낌이 좀 달랐습니다. 외려 저는 뜻밖에도 왕년의 헐리우드에서 마피아 소탕작전을 펼치는 버디 액션 영화의 정서가 살아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영화는 이 장르의 공식의 설정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일단 좋은 편과 나쁜 편이 있고, 좋은 편은 굿가이와 배드가이의 역할 분담을 하고 있죠. 지적이고 냉철한 인텔리 검사와 성질 개같고 주먹이 먼저 나가며 망가져가는(혹은 미쳐가는) 형사의 짝패란 이 장르의 오랜 관습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악당은 그저 나쁜 놈이 아니라, “자기 아기 세례 주면서 정적을 하나하나 해치우는” 냉혈심, 자신에게 약점 잡힌 정치가들을 볼모로 정계를 움직일 수 있는 대단한 인맥줄, 거기에 사회적으로 인자하고 인간적인 시늉을 할 수 있는 연기력, 자신의 말이라면 (두려움에서건 충심에서건) 죽는 시늉도 할 부하들 조직을 갖추고 있는, 한마디로 카리스마 혹은 절대권력 그 자체의 악당입니다. 이러한 악당을 상대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펼쳐가는 싸나이들, 그리고 그 싸나이들 사이에 더해가는 끈끈한 우정(?).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또하나의 축인 검은 힘의 위력의 폭로, 혹은 그 앞에서의 무력감. 악당은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지만 우리의 주인공들은 엉망진창의 망가진 가정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더욱 자신의 짝패, 자신의 동료와의 우정에 집착하죠. 이 관습적인 문법이 2006년 한국에서 유지태와 권상우, 그리고 손병호의 옷을 입으면서 조금은 단순화되고, 조금은 세련된 새로운 감각을 입습니다.


일단 액션의 특별함. <야수>에서 특히 권상우를 통해 시각화되는 액션은, 우리가 이제까지 ‘액션’영화에서 보아오던 화려하고 멋진 액션이 아니라 정말 ‘개같아도 살아남고자’하는 처절한 액션입니다. 화려한 개인기를 보이려면 공중회전이나 완만한 커브를 그리는 주먹질, 혹은 높이 치솟는 발차기 등이 주로 보이겠죠. 권상우의 액션은 주 공격은 일단 발로 상대의 발목을 가격해 상대를 뜨러뜨리는 걸로 시작됩니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 뒤 이쪽의 마구잡이 공격을 가하는 건데, 그러다 안 되면 상대의 발을 잡고 늘어지고 끌려가면서 맞고, 그러면서도 잡고서 놓치를 않죠. 이러한 싸움 기술은 어떤 공식화된 액션이나 세련된 무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싸움질을 위한 싸움기술, 한 대라도 덜 맞는 상태에서 어떻게든 상대를 제압하는 뒷골목 싸움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싸움의 고수가 아니고, 그렇기에 더 처절하고,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더 화려한 액션이 됩니다. 저는 이러한 액션 스타일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우려했던 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꾸어 버린 점. 기존의 버디 액션에서 우리의 액션 주인공들은 언제나 힘찬 테스토스테론을 과시하던 ‘성인 남자’들이었습니다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그 절대권력의 카리스마 앞에서 두려움에 벌벌 떠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목적을 향해, 결국 파멸을 향해 뛰어들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라는 점입니다. 완숙한 성인 남자를 상대하는 덜 자란 아이들이랄까요. 이들이 파멸하는 것은 그렇기에, 당연합니다. 아울러 괴물을 들여다보는 와중 그 괴물에게 역시 들여다봄을 당하고, 괴물을 상대하다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아쉬운 점들도 많습니다. 영화가 후반으로 가면 좀 정신이 없어지는데, 이는 러닝타임을 맞추기 위해 정서적인 부분을 잘라낸 결과로 보입니다. 그 결과 속도감이 는 것은 사실이지만, 호흡이 좀 딸립니다. 영화 중간, 우리의 악당 유강진(손병호 역)은 오진우(유지태)에게 반야심경을 선물로 주고, 감옥에서 오진우가 그간 밀쳐뒀던 이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감독이 ‘괴물을 처치하려다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딜레마를 깨닫는’ 주인공들의 아이러니의 정서적 반응이 반야심경의 내용이 연결될 줄 알았습니다만, 이 부분은 그냥 떠버리고 말더군요. 엔딩도 좀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듯, 저도 더 좋은 엔딩이 어떤 것일지 대안은 내기 어렵습니다. 다만 저는 그런 생각은 듭니다. 예컨대 LA 도심에서의 총격전은 익숙하지만, 아무래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의 총기난사를 목격하는 것은 대단히 당혹스러운 경험이지 않을까… 마지막에서 유강진이 오진우를 만날 때, 순간, 자기 눈앞에서 죽은 장도영이 환생해서 나타난 듯한 착각을 주기 위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설정도 저는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유지태에겐 그게 어색합니다.


유강진이 자신의 친구이자 조직의 2인자를 직접 처단하는 부분은 친구와 내내 아쉬움을 공유했던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토록 흔들림없는 사람이, 계속 무표정하게 있다가 그에게 가격을 하고, 그 가격을 짧고 단순하게 처리하는 게 더 나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어요. 친구와 대화하는 내내 손병호는 유강진의 배신감을 표정으로 그대로 드러내고, 그 친구를 ‘때려죽이는’ 장면, 그러니까 그 유강진이 단 한 번 흐뜨러지는 장면을 너무나 친절하고 극적으로 드러내 버리는데요. 저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가 ‘단 한번 흐뜨러지는’ 걸 보는 건 너무나 좋지만 그게 그 장면에서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이 영화는 매우 극단적인 스타일들을 현란하게 과시하는데요. 퀵줌이라고 친구가 설명해준 그 기법(클로즈업 상태에서 갑자기 확 더 들어가는 카메라 기법)도, 증언자로 확보해 놓은 이가 자살로 위장돼 살해되었을 때 복도를 달려가는 장면을 줌 인 트랙 아웃(초점 부분은 줌인을 해서 클로즈업으로 가면서 초점 바깥, 배경 부분은 점점 더 멀어지게 보이는 기법)으로 처리해 달려가도 달려가도 복도 끝이 멀게만 느껴지도록 한 기법 같은 것도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후자는 꽤 뻔하고 너무 노골적인 게 사실이지만, 어쨌건 그 장면엔 맞으니까요.) 하지만, 너무나 빈번한 얼굴의 극 클로즈업은, 배우들이 견뎌내질 못합니다. 사실 극클로즈업, 특히 얼굴의 극클로즈업은 여간한 연기력이 아니면 배우들이 견뎌내기 힘든데요. 손병호의 클로즈업 장면에선 너무나 안정적인 화면이 권상우나 유지태 클로즈업에선 불안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이게 너무나 대비가 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영화상 설정 자체가 손병호가 맡은 유강진은 매우 안정적이고 여유있으며 노련한 ‘성인남자’이고, 그들에게 대적하는 장도영(권상우)이나 오진우(유지태)가 워낙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들 역시 영화적으로 충분히 설득된다는 게, 또한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합니다.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버리는 장면은 이 장면 외에도 꽤 됩니다. 법정에서 오진우가 난데없이 연설을 하고 장도영이 미쳐 날뛰는 장면도, 그 발음 안 되는 엉터리 발성이 오히려 영화 설정상으로는 꽤나 어울립니다. 그들의 항변은 사회적으로 그냥 무시되고 개소리가 되는 것이니까요.


썰렁해질 수 있는 시퀀스를 매우 센스있게 마무리하는 영화적 솜씨들이 돋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유강진을 찾아와 데데거리고 가는 오진우의 장면, 이 장면은 오진우의 뒷통수에 대고 “저 친구 많이 약해졌어~”라는 유강진의 대사로 마무리 되면서 자칫 이가 빠질 뻔한 게 오히려 훌륭하게 마무리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시퀀스 시퀀스 마무리가, 자칫하면 매우 진부하고 이 빠지고 썰렁해질 뻔했던 것이 오히려 대단히 단단하게 마무리되고, 마무리되고, 하는 걸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 되고 나면, 사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야수괴담이 도대체 정체가 뭔지, 이유가 뭔지 미스테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에 참 보기 힘들었던, 게다가 신인감독에겐 거의 기대하기 힘든, 영화적 솜씨가 매우 단단한 연출인데 이렇게나 욕을 먹고 혹평을 받는 이유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네요. 2006년 상반기 최대의 미스테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대강, 이런 식의 영화 정서가 이제 더이상 관객에게 먹히지 않는 건가, 이런 식의 정서는 30대들에게나 어필한 낡은 감각인 것인가… 이런 추측이 들기도 했지만 저 자신도 별로 수긍이 안 되는걸요. 홍보 마케팅의 포인트가 영화의 포인트와 조금 엇나갔단 생각도 드는데, 사실 제가 봐도 홍보마케팅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지 않았나, 란 생각도 들고요.


권상우는 가끔씩 느꼈던 거지만 꽤 약은 배우고, 앞으로 좀 제발 많이 발전해줘, 라고 부탁을 하고 싶게 만듭니다. 손병호 아저씨 정말 최고고요. 거의 조연에 불과한 역을 독기있게 잘 해준 강성진, 별로 없던 호감이 생겼습니다. 아, 그리고 엄지원… 장례식장에서 권상우 때리다가 우는 장면, 정말 좋았습니다. 넘치지도 과하지도 않고, 한국 여배우들이 우는 장면은 보통 실소를 터뜨리게 만드는데, 정말 가슴이 절절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 전달이 참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반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감독이 잘 연출해냈다는 생각입니다. 감독의 의도가 조금 딸리는 배우와 러닝타임과의 전투(혹은 제작사와의 싸움)에서 깎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어찌됐건, 김성수 감독의 차기작은 매우 기대가 됩니다.

ps. 서울에선 여직 상영하는 곳이 있더군요. 한번 더 보고 싶었는데… 부산에선 이미 다 내렸답니다. -_-;;;


ps2. 상상플러스인가? 에 김수로가 주연하는 <흡혈형사 나…> 뭐시기를 홍보나온 손병호 아저씨. 아니, 왜 이리 귀여우신 거예욧~~~~!!! ㅠ.ㅠ 왕년에 좀 놀아보셨던 듯. 아흑, 그 킹콩춤 제대로 또 보고 싶어요~~


ps3. 대사들이 아주 맛갈집니다. 위에서 예로 든 “저 친구 많이 약해졌네, 내가 알던 오진우 검사가 아니야.”도 그렇고… 친구는 그예 그 중 대사 하나를 자기 블로그 프로필로 올려놨군요. “원래 내 인생이 쫌 후져요.” … 제가 내뱉고 싶은 말이기도 하죠.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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