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 데쓰 프루프

Death Proof

국내 포스터는 너무 세련됐어요...

싸구려 B급영화 두 편을 함께 틀던 이른바 동시상영관을 일컫는 말인 ‘그라인드하우스’가 원제였던 영화답게, <데쓰 프루프>는 저예산 B급 액션영화 장르와 그 장르를 둘러싼 문화 자체에 오마쥬를 바치는 일종의 메타-장르영화다. <데쓰 프루프>는 외견상 차를 이용한 연쇄살인마를 등장시킨 호러물이자 차량 액션 영화의 형태를 취하지만, 오히려 과거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비롯, 저예산 B급 액션 영화라는 장르 자체를 탐색하고 그 역사를 재구성하며, 이를 다시 자기 식으로 해석하며 논평을 가하는 영화다. 말하자면 타란티노는 <데쓰 프루프>를 통해 ‘영화로 영화 평론을 쓰는’ 영화 평론가적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데, 언제나 B급 영화광임을 강조해오며 그런 영화들로부터 차용과 인용을 즐겨 해왔던 타란티노로서 그리 이례적인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정도로까지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적극적으로 장르에 대한 논평을 가했던 영화는 <펄프 픽션>을 제외하면 <데쓰 프루프>가 가장 극단으로 나아간 경우라 할 수 있다.

텍사스 주의 오스틴 시를 배경으로 한 전반부와 테네시 주의 레바논 시를 배경으로 한 후반부로 이루어진 구성은,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한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기보다는 서로 완결성을 가진 영화 두 편을 느슨하게 이어붙였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영화 전반부 내내 화면에서 빛나는 몸매와 섹시한 자태를 뽐내던 아름다운 미녀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당신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는 애초에 이 영화가 <그라인드 하우스>의 일부로서, 두 감독의 두 영화를 이어붙인 영화의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 준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단순히 배경의 차이나,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오히려 반격을 당하고 죽음을 맞는가의 차이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전반부는 과거 장르 영화들의 문법과 클리셰를 그대로 ‘재현’해 내고 있고, 후반부는 이를 통한 ‘해석’과 ‘응용’을 하고 있는, 전혀 다른 두 편의 영화다. 이를 이어주는 것은 차량을 이용해 연쇄살인을 거듭하는 연쇄살인마 ‘스턴트맨 마이크’의 존재뿐이다.

Death Proof

도구는 그것을 쓰는 자의 신체의 확장물.

영화의 전반부는, 영화의 개연성은 별로 상관하지 않은 채 섹시한 미녀의 노출과 화끈한 액션 등 한 마디로 섹스의 폭력의 볼거리를 주요 목표로 제작되었던 B급 액션영화의 장르문법을 의도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조잡한 데다 노골적으로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앵글과 씬들, 편집 시 당연히 버려졌어야 할 NG 컷들이 그대로 삽입돼 있는 장면, 잦은 상영으로 훼손된 낡은 필름 특유의 비 내리는 화면과 툭툭 끊기는 화면(아마도 영사기사가 영사기에 걸기 위해 필름을 잘랐다가 잘못 붙인 듯한 상황을 암시하는) 등이 의도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것은, 그라인드 하우스에서 상영되었던 영화들 자체와 그 영화들이 상영되던 당시 극장 안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들이다. 여자들은 일정한 직업도 없고 그저 남자들과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영화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인물들’이며, 스턴트맨 마이크의 캐릭터 역시 영화에서 곧잘 보이는 ‘폼 잡는 마초 캐릭터’의 말과 행동을 반복한다. 몸에 달라붙는 티셔츠와 핫팬츠를 입은 여배우들의 가슴과 다리선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훑어대는 카메라 역시 남성적 시선으로 여성의 육체를 탐한다기보다는, 그런 목적으로 제작되었던 과거 영화들의 씬들을 흉내내고 재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남자들을 벗겨먹는 여자들에게는 응분의 대가가 따른다는 이쪽 장르 영화의 문법대로 전반부의 여자들은 모두 스턴트맨 마이크에게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이 전반부는, 연쇄살인마와 미녀 간 괴상한 방식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의 국부를 은유하는 숲에 관한(그러고 보면 상당히 야한) 시를 읊는 남자 앞에서 섹시한 랩 댄스를 추는 여자의 씬은 정사 장면과 별 다를 바 없다.

Death Proof

아름답고 경쾌한, 좀더 현실의 아가씨들.

이제 영화가 레바논으로 배경을 옮겨가면, 여기에서는 보다 ‘현대 영화적인’ 특징들이 반복된다. 처음 후반부의 미녀들이 소개되는 편의점 앞 씬에서 화면은 일정 시간 흑백으로 갔다가 다시 컬러로 돌아오는데, 바로 이 컬러로 돌아오는 지점이 ‘과거 영화의 재현’이 아닌 그 영화들을 자양분 삼아 ‘바로 자신의 현대적인’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부터는 의도적인 조잡한 앵글이나 상태 나쁜 필름 상태 따위가 재현되지 않는다. 타란티노가 직접 촬영을 담당한 화면은 매끈하고 세련되기 짝이 없으며, 카체이스 씬은 역사상 최고의 카체이스 씬 중 하나로 기록될 만큼 박력있고 스릴이 넘친다. 여자들 역시 각자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이 모두 ‘영화판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게 이 영화의 메타-영화적 특징을 강조해주는 설정이다. 이들은 일에 대해서든 사랑에 대해서든 훨씬 현실성이 있는 현대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후반부의 이 여성들만큼 생동감 넘치며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보여주는 영화들도 찾기 드물 정도다. 또한 후반부에서의 스턴트맨 마이크 역시 영화 속에서 종종 그려진 정형화된 마초 캐릭터를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후반부의 스턴트맨 마이크는 우리가 일상에서 혹은 온라인에서 노상 접하는, 큰 소리는 치지만 실제로 별 거 없는 찌질한 현대 남성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깨를 스친 총알 한 방에 그토록 경망스럽게 고통을 호소하는 ‘마초 캐릭터’가 과연 이전 영화에 얼마나 등장했던가? 관객들의 웃음을 뽑아내는 점도 바로 이렇게 과거 장르 문법을 정반대로 뒤집는 장면들에서다.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후반부의 여자들은 스턴트맨 마이크를 통쾌하게 혼내줄 뿐 아니라, 자동차 광인 다른 친구들에 비해 여성적인 매력을 자랑하는 로사리오 도슨의 캐릭터가 그 긴 다리를 쭉 뻗어 후반부 초반 자신의 발을 간질였던 바로 그 마초의 고개에 그대로 내리꽂음으로서 악당 처치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Death Proof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르영화에 대한 경배.

영화에서도 직접 언급되는 <더티 메리와 크레이지 래리>, <배니싱 포인트>, <식스티 세컨즈> 등을 포함한 무수한 B급 액션영화들뿐만 아니라 당시 기존의 영화문법을 살짝 비틀었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 특히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전면에 등장한 미녀들이 흑인이거나 혼혈 등의 유색인종 여성이란 점에서)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 중에서도 여성 영웅이 활약하는 영화들이 타란티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영화사 책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1910년대 시리얼 무비(Serial Movie, 일명 ‘연작 영화’)의 영향 역시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상업성만을 염두에 둔 저예산 액션영화들과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 모두에게 공히 영향을 준, 일종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시리얼 무비는 영화의 초기 시대에 섹스와 폭력을 코드로 상업성을 위해 짧은 기간 내에 저예산으로 마구 제작되던 액션 무성영화들이며, 여성 영웅들이 적극적으로 활약하는 영화들이다. 하나당 짧은 러닝타임으로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이 영화들의 영향이 <데쓰 프루프>에서 감지되는 것은, 아마도 영화광인 그가 당연히 이 시리얼 무비 역시 챙겨보며 그 영향을 자신의 영화 속에 슬쩍 끼워넣었거나, 저예산 액션영화들의 본질을 추구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그 원류까지 거슬러 올라갔거나일 것이다. 진실이 어느 쪽이든, <데쓰 프루프>는 1910년대부터 고상하고 우아한 영화들 이면에 존재했던 섹스와 폭력의 저예산 오락영화들의 역사와 본질과 흐름을 정확히 꿰뚫고 재현하며 해석하는,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영화사에 관한 영화다.

ps1. 조이 벨은, 메릴 스트립 살짝 닮지 않았나요?

ps2. <멘인블랙 2>에서 그토록 순둥이로 나왔던 로사리오 도슨에게서 로드리게즈나 타란티노나 ‘여전사’의 이미지를 뽑아내는 게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사실 워낙 몸매가 되시는 언니라 섹시하고, 생기발랄한 힘도 있죠.

ps3. 전 후반부의 커트 러셀을 보면서 인터넷 상에 즐비한 찌질이들을 떠올렸답니다. 그래서 ‘언니들의 처단’이 더욱 통쾌했어요. “아파아파아파~” 자막 센스도 참. ㅋㅋ

ps4. 아참, 근래에 영화의 CG에 지나치게 환장하시는 분들을 위한 컷.

Death Proof

일체 CG 없이 찍은 씬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10 Comments

  1. 아, 그런 특성도 있는 영화인가요? 앞의 절반과 뒤의 절반에 관한 말씀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이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언제나 [킬 빌 Vol.1]과 [킬 빌 Vol.2]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그거거든요. [Vol.2]는 [Vol.1]의 ‘속편’이 아니라 [Vol.1]을 바탕으로 삼아 뒤집고 패러디 하면서 장르의 전형적 아이콘 모음집에 불과했던 이야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영화라고 생각해왔어요. 뭐, [황혼에서 새벽까지] 시절 때부터 타란티노 자신이 직접 말했듯이 그냥 어린 시절 극장 체험을 살리고 싶어서 완전히 달라보이는 두 영화를 이어붙이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넘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뒷부분이 앞부분에 대해 갖는 연관관계가 너무나도 명확해 보였거든요.

    • 허걱, 그러고보니 제가 < 킬빌 vol.2>를 안 봤네요. 타란티노가 왜 이리 ‘오랜만’이라 느껴진 건가 했더니 그런 이유였어요… 게다가 < 킬빌 vol.1>은 비디오로… (< 저수지의 개들>과 < 펄프픽션>, < 재키 브라운>은 모두 극장서 봤거든요.) 에고. < 킬빌 vol.2>를 빨리 봐야겠습니다.

  2. 저는 위 댓글에서 언급하신 세 작품, 저수지의 개들, 펄프픽션, 재키 브라운 이후로는 타란티노에 대한 관심이 끊긴 상태입니다. 타란티노의 스타일이 돋보였던 순간이 분명 존재했지만, 이후 기존 영화들에 대한 오마주와 패러디를 ‘끈질기게’ 반복하고 있는 그의 영화들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게 느껴졌거든요.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몇번 반복 되면 이제 식상하달까요. 킬빌도 말그대로 ‘재미없게’ 봤습니다. 이 사람은 진정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만 만드는 것 같아요.

    조금만 더 나아가 보자면 타란티노는 조금 과대평가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그대로 영화(또는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영화 이상을 만들어낸 적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로드리게즈를 더 좋아합니다. 스파이키드 시리즈는 진짜 아무 생각없이 ‘재미있게’ 본 영화거든요. 근데, 왜 플래닛 테러와 같이 개봉하지 않는거죠?

  3. 헉, 제가 쓴 댓글을 다시 보니 포스트와 연관성도 별로 없고, 제 썰을 그냥 풀어놨네요.^^;; 죄송합니다.(–)(__)

    ps4는 의미심장(!) 하군요. 저도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네요, 변신로봇…^^;;

    • 저도 < 킬빌>까지 나올 땐 좀… 심드렁해지더라고요. < 킬빌>은 vol.1만 봤지만서도, 뭐랄까, 장르영화를 너무 외피만 베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무협영화를 응용하고 그 장르에 오마쥬를 바치는 영화로는 오히려 류승완의 < 짝패> 쪽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건 사실 모든 영화광들의 꿈인지라, 타란티노는, 과대평가됐다기보다는, 컬트감독으로서 추앙받아야 할 사람이 너무 폭넓게 추앙이 강요됐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글이셨는걸요. 타란티노의 이번 영화가 B급영화의 형식과 상영문화까지도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인만큼 님의 리플은 제 포스트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리플이라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리고 저도 로드리게즈 참 좋아해요. < 스파이 키드> 시리즈도 무척 좋아하고요. (솔직히 요즘 어떤 사람들이 ‘아동영화’와 ‘헐리웃영화’를 너무 무시한다 싶을 때 로드리게즈의 < 스파이 키드> 떠올리며 조금 배알꼴려하곤 합니다.) 1편 막판에 조대인께서 특별출연을 해주셔서 더더욱 좋았죠.

      < 트랜스포머>야 CG로밖에 구현할 수 없는 영화였고 변신로봇이 눈앞에서 살아움직이는 걸 보는 건 모든 소년들의 로망일 터인데, 그에 대한 열광은 너무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비록 저는 영화 중간에 잤지만요.) “스토리고 뭐고 다 필요없어 오직 CG!”를 외치는 어떤 극소수 분들에게 드리는 선물이었습니다, ps4의 사진은. ^^

  4. 역시 타란티노란 말이군요. ^^ 글을 쭉 보니 보고 싶어 못 견디겠군요. 더불어 이복형제 ‘플레닛테러’도 몹시 무척 궁금해지고요. 아직까지 타란티노, 로드리게즈가 영화사의 진실한, 영리한 계승자이자 혁명이고 희망인 것 같군요.

    •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특히 마지막 20분은… ㅎㅎ
      “글을 쭉 보니 보고싶어 못 견디겠군요”는 제게 주신 최고의 찬사이십니다.

      저도 < 플래닛 테러>의 개봉을 두손모아 기도 또 기도하고 있습니당.

  5. 네 조이 벨, 메릴 스트립 좀 많이 닮았어요 ^^

    p.s. 일요일 조조이긴 했지만 저 말고 있던 사람이 2명 뿐이라 마지막의 보너스 영상을 못보고 나온 것이 후회되네요. ㅠㅠ

    • 냐하하 역시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군요!
      정말 매력있는 언니예요.

  6. Pingback: Viper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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