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중 |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어린, 청년의, 노년의 아들과 함께한 어머니.

노장 감독이 오랜만에 복귀해 어머니에 관한 영화를 찍었다고 했을 때 극장의 주 관객층인 젊은 세대들이 ‘낡고 고루한 영화’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유현목 감독이 <엄마와 나와 말미잘>을 찍었을 때, 배창호 감독이 <흑수선>을 찍었을 때 과거 명장의 어떤 테크닉이 현재의 ‘변화한 영화문법’에 익숙한 젊은 관객들에게 심각한 정서적 충돌을 일으키는 현상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특히나 과거와 현재에 커다란 단절이 있는 한국영화 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하명중 감독의 신작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에서 그런 ‘촌스러운’ 느낌을 주는 장면들은 오히려 현대의 젊은 관객들을 인식해 집어넣은 씬들, 예컨대 손녀와 할아버지의 문자 교환씬 같은 것이다. 영화의 몸통인 “노작가의 회고 속에 나타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오히려 생동감있는 연기와 솔직담백한 구성으로 현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울림을 줄 만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철저하게 아들의 ‘기억’ 속에 회고되고 재구성된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 어머니는 아들의 기억 속에서 죄책감을 덜기 위한 반작용으로 더욱 신성화되며 왜곡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아들이 아동이었던 시기에 희미한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 어머니는 당연하게도 젊고 아름다우며 아무런 인간적 결점이 없는 선녀 내지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동기의 기억이 그러하듯 이 시기의 어머니는 유난히 뽀얗게 필터를 끼운 화면 속에서 마치 판타지의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아들이 점차 나이를 먹고 기억이 명확해질수록, 영화 속 어머니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띄어간다. 예컨대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의 어머니는 아들이 읽어주는 신문연재소설인 주인공을 향해 ‘미친년!’이라 반응한다.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아마도 40대가 되었을) 어머니는 자신을 흠모하는 동네 복덕방 아저씨를 솜씨 좋게 요리하고, 음식점에서 음식을 싸가기 위해 추태를 부리기도 하며, 아들의 여자친구를 질투하며 심술을 부린다.

평생 떠나지 않을 거라던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나면서, 아들은 ‘변명’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 곁을 떠나 있는 동안 아들이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영화는 제시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떠나버린 자식들을 기다리며 외롭게 늙어가는 어머니를 보여주고, 이는 분명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난 아들의 죄책감의 표현이지만, 그 죄책감이 구차한 자기 합리화의 모습을 띄거나 모성의 신성화를 강화하는 기만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이가 들어 어머니 곁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당연한 귀결로 보여줄 뿐이며, 이에 대한 죄책감은 죄책감대로 표현될 뿐이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아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와 딸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다르며, 종종 딸에게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기억’은 폭력적인 것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그 자신은 못 배우고 무식했지만 자식들은 식자로 키웠던 어머니, 그리고 종종 이기적이라며 부당하고 왜곡당하는 자식의 독립에 의해, 외롭게 남겨지면서도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고립되어야 했던 어머니를 그리면서, 딸들에겐 다소 낯선 어머니와 너무나 익숙하고 친근한 모습의 어머니를 동시에 보여준다. 무엇 때문에 아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어머니를 버려두며 찾지 않았는지, 왜 어머니의 편지 역시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제시해주지 않기에 다소 아쉬운 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노장의 신작은 그저 조용히 묻히기엔 아까운 묵직한 중심과 품위를 갖고 있는 영화다.

ps.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간 글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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