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빈폴영화제 후기

기자회견장에서 처음 영화제 트레일러를 봤을 때도 어이가 없어 푸핫, 실소가 나왔지만, 영화제 기간 중에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가 스크린 가득 그 트레일러가 상영되는 걸 보고 – 물론 당연히 매 상영마다 나온다, 본상영 앞에 나오는 이걸 ‘리더필름’이라 한다 – 구역질이 나왔다. 어마어마한 거금을 쾌척해줬으니 보답으로 광고해 주는 건 좋은데, 영화제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제 트레일러에서까지 노골적으로 광고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내가 갔다온 영화제는 부산영화제가 아니라 빈폴영화제였던 셈이다.


beyond frame

저 필름롤 자전거 그림이 행사장 여기저기에 마치 '영화제 로고'처럼 붙어있었다.


제대로 준비없이 부산에 간지라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곡절이 많았다. 정식으로 프레스 아이디를 신청하지 못하고 영화제가 닥쳐서야 취재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무려 호텔에 여장을 풀었지만 숙소가 안정적이진 못했고, 데일리프레스로 취재를 하려다보니 제약이 많았다. 게다가 내가 데일리프레스로 더욱 취재를 잘 못했던 이유는, 프레스룸에서 데일리카드를 받을 때 응당 같이 받았어야 할 ‘프레스가이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일리카드 신청서를 작성할 때 프레스룸의 담당자(아마도 자원활동가)는 내게 명함은 요구했지만 당연히 줘야 할 프레스가이드를 주지 않았고, 나는 이걸 10일 아시안필름마켓이 개막했을 때 들른 마켓쪽 프레스룸에서야 받았다. 그것도, 행사표 같은 거 없냐고 하니까 당황하면서(설마 데일리카드 목에 달고 있으면서 그걸 못 받았냐?는 표정으로) 주더라. 프레스 스크리닝이 따로 잡혀있다는 것도 그 프레스가이드를 받고나서야 알았다. ‘뉴커런츠’ 기자회견은 결국 놓쳤고. 영화제 유일의 경쟁부문에 대한 기자회견을 놓친다는 게 말이 되나? 나도 븅신인 게, 하여간 부산영화제 ‘취재’차 간 건 처음이라 엄청 버벅댔다. 내년엔 꼭, 미리 프레스아이디 받고, 노트북 끼고 취재계획서를 쓰고서 오리라.


언제나 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일정 정도의 ‘말’은 따르기 마련이지만, 소위 ‘국제영화제’ 중에서 이번처럼 말 많은 영화제도 처음인 듯싶다. 웬 상영취소는 그리 많은지. 부득이하게 필름이 도착하지 못해 상영이 취소되는 일은 원래 영화제마다 꼭 있기 마련이지만, 이번은 유독 많았지 싶다. 하루에 한 작품씩은 취소가 된 거 같으니까. 자원활동가들이 제대로 훈련돼 있지 않다는 소리도 들었다. 경험상 자원활동가들의 미숙은 영화제 사무국 시스템의 불안정이 원인이다. 자원활동가들 탓할 것 없이, 사무국의 시스템이 너무 방만하며 의사소통이 안 되는 구조가 돼버린 건 아닌가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이 차례로 레드카펫 밟았다는 소리에 ‘미친넘들!’ 소리가 절로 나왔는데, 이명박과 정동영이야 원래 무개념이라고 쳐, 영길이 형님까지 그 무개념 짓거리에 동참해야 했단 말인가? 그래, 엔니오 모리코네 영감님을 그렇게 쫓아내고 나니 기분이 좋으시던가?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영길이 형님이 영화제에서 주목을 끌고 박수를 받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예컨대 개막식 같은 행사엔 조용히 참석한 뒤 다음날 낮에 피프빌리지 앞에서 “스크린쿼터 원상복구! FTA 반대!”와 같은 현수막을 들고 1인시위를 했다면 관객들과 영화인들의 자발적인 박수와 환호성을 받았을 것이다. 나아가 “역시 민노당밖에 없구나”란 소릴 들었을지도 모른다.


빈폴영화제에서 내가 본 영화는 <공포분자>, <그녀 이름은 사빈>, <여배우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신세기 에반게리온 : 서> 이렇게 다섯 편이다. <중국영화의 어제와 오늘>은 표를 사놓고 늦어서 입장을 못 했다. 마스터클래스는 <클로드 를루슈> 편을 들었고, 에드워드 양 세미나와 독립영화전용관 세미나에 들어갔고, 중국과의 합작에 관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스타서밋아시아 행사는… 취지엔 그럭저럭 공감하지만 참 생뚱맞은 행사들로 보이고. BIFCON(영화박람회) 쪽 전시장과 3D에 관한 컨퍼런스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쉽고, 폴커 쉴렌도르프와 피터 그리너웨이 마스터클래스를 놓친 게 안타깝다. 동아시아 영화 정체성 연구 세미나는, 전날 늦게까지 기사쓰느라 늦잠을 자는 바람에 못 갔다. 역시 매우 아쉬운 부분. 기자가 여럿이면 취재를 배분해서 이것저것 좀 욕심내서 하고픈 것들이 있었는데, 혼자 그것도 처음 영화제 취재를 하려니 영 힘들었다. 영화제와 마켓을 동시에 취재하는 건 더욱 어렵다. 그래도 에드워드 양 감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마켓에 대한 정보들을 모으고, ‘아시아 영화’라는 화두를 안고 돌아온 것, 그리고 ‘영화기자’로서 정체성을 좀더 깊게 고민하게 된 것은 수확이라 할 만하다. 클로드 를루슈를 통해 엄청난 위로를 받은 것도, 영상자료원 부스에 들렀다가 최근 출시한 한국고전 DVD를 얻고 명함을 나눈 것, 독립영화 전용관 분들과 명함을 나눈 것도 마찬가지. 왜 유독 프랑스에서 ‘감독이 된 여배우들’이 눈에 띄는가도 고민해 볼 만한 주제다. 헐리웃에서도 조디 포스터를 제외하면 드문 케이스이다. <여배우들>은 정말 멋진 코미디였다.


Actrices

낯 좀 익다 싶은 프랑스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버라이어티에서 부산영화제에 대해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기사를 인상깊게 읽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니들 아시아 프리미엄급이라면서, 유럽쪽 쫓아다니며 작년 영화들 받아오는 거보다 아시아 영화 발굴에 좀더 신경쓰는 게 어때?”라는 건데,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버라이어티 기사에 의하면, 올해 뉴커런츠에 선정된 영화들은 퀄리티가 좀 들쑥날쑥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버라이어티나 헐리웃리포터에서 꼼꼼하게 아시아영화들을 보고 리뷰하는 걸 읽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할 뿐 아니라 무서운 느낌까지 든다. 씨네21 데일리에서도 대체로 유럽영화들에 눈을 더 주는 인상에 감독, 배우 인터뷰와 영화 리뷰 등에 페이지를 더 할애하고 산업관련 기사들은 짧게 스케치성으로 싣고 마는데, ‘미국 쇼비즈’ 잡지들이 그 누구보다 아시아 영화들을 꼼꼼히 챙겨보고 분석기사와 리뷰를 쓴다? 거기에 각종 마켓 관련 뉴스까지? (CJ가 <검은 집>, <리턴> 등 네 편을 패키지로 독일에 팔았다는 뉴스도 버라이어티를 보고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가 씨네21 데일리보다 버라이어티 데일리를 더 열심히 보고 있더라는.) 실제로 버라이어티는 아시아영화들을 취급하는 사이트를 따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경고! 속도가 좀 느리다.)


다만 부산영화제에서 그토록 유럽영화제들의 영화들을 기를 쓰고 받아오는 건 ‘흥행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느끼기론, 대체로 한국관객들은 한국영화들이 아시아 관객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지,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영화들을 수용할 준비는 안돼 있는 듯. 아시아 영화들에 가장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버라이어티나 헐리우드리포터 등의 미국쪽 쇼비즈 잡지 같더라는. 영화제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은 ‘아시아 영화’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이런저런 행사들, 예컨대 스타서밋아시아나 코프로덕션프로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마켓이 뭔 필요?’란 소릴 들어가면서 아시안필름마켓을 만들었는데, 정작 관객들은 아시아영화에 대해 아직은 관심이 부족한 듯. 이건 남 말할 처지도 아니다. 나야말로, 특히 동아시아 영화들에 대해선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인종주의적인 편견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영화들, 계속 눈여겨 봐야 한다. 한국영화들 만큼이나 비약적인 속도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취재성 기사에 확실히 내가 좀, 약하더라. 독립영화전용관 세미나 기사도 그렇고, 스타서밋아시아 기사도 그렇고, 마무리를 어떡해야 할지 참 난감하더라. ‘산업’을 커버하는 기자가 되겠다면 당연히 취재능력이 좋아야 하는데, 난 취재능력도 사람 만나는 변죽도 그리 좋지 못하다. 인터뷰는 아직 무서워서 시도도 못해보고 있다. 하지만, 나같은 성격이야말로 기자일을 하기 좋은 사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그랜드호텔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했다. 일단 호기심이 있고, 관심 방향이 잡스럽고, 그러나 사람들과 쉽게 섞여들지 못하고 겉돌면서 경계에 서 있는. 기자라는 직위는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말을 먼저 붙이고, 소스를 요구할 수 있는 대단한 특권이기도 하다. (이 특권을 부적절한 금품향응을 요구하는 데에 쓰면 결코 안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자료’와 ‘소스’에 한한 얘기다, 이 특권은.) 이 특권을 제대로 누리고, 제대로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기자노릇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갈 길이 멀더라는.


빈폴영화제를 총평하기에는 내가 자격이 좀 없다. 매년 온 것도 아니고, 와도 깊이있게 영화제 전체를 들여다보지 못했고. 다만 영화제가 앞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조금 감이 잡히는 것 같은데, 독립영화전용관 세미나 때 BALCON의 오석근 대표가 얼핏 드러낸 바 있지만, 이래저래 자조적인 냉소가 있는 듯. 성공적인 영화제로 부쩍 자랐지만, 부산영화제의 야심에 발목을 잡는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서울공화국 현상’인 것 같다. 1, 2년 내로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 더욱 심각한 문제다. 영화도시로서의 부산이 아무리 근사한 하드웨어와 인프라를 갖춘다 한들, 문화 생산의 중심이 무조건 서울이라면 그 간극은 과연 어떤 식으로 메워질 것인가. 서울이 지나치게 해쳐먹고 있다는 비난, 이것은 향후 30년까지도 유효한 비난이 될 터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5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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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 발레리아 부루니 떼데시와 루이스 가렐이 한자리에.(물론 방금 이름 찾아본거죠 ㅋㅋ)
    기억해뒀다가 개봉하면 봐야겠네요. 여배우들.

    • 발레리아 브뤼니-테데치는 프랑수아 오종의 <5X2>에, 루이 갸렐은 < 상가들>에 주연으로 나왔습니다. 이밖에도 지금 프랑스에서 한가락 한다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합니다. 근데 개봉을 할 수 있을지는 좀 미지수네요. ^^;;

  3. TV광고를 보면서 설마 설마 하면서도 에이, 진짜 그랬을라고 했는데 정말 그 빈폴광고를 리더필름(이라고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네요^^;;)으로 썼단 말입니까?? 무개념도 이런 무개념이 없다 싶네요;
    대선후보자들 레드카펫 밟는 거야 어느 정도 예상했던, 우리나라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지만서도 막상 그 양반들 들어서는 거 보니 욕지기가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는데…10년이 지난 영화제가 아직도 안정이 되지 못하고 불안불안하게 진행된다는 게 참 마음에 걸리네요(사무실도 아직 가건물에 있지 싶은데-_-a). PIFF에서는 자봉의 역할이 관객들에게 (영화만큼이나) 무척 크게 와닿기는 하지만 확실히 매년 갈 때마다 ‘아직도 이렇게 안정되지 못하다니’라는 생각을 늘 하곤 했거든요. 올해는 비록 못 가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으면 했는데 참 아쉽습니다.

    예의 그 서울공화국 문제는; 거의 저는 체념하고 있는 상황이라;; PIFF가 이렇게까지 성공하게 된 데에는 확실히 부산시민의 성원과 지지가 큰 몫을 차지했다고 봅니다. 아마 그동안 비수도권에 살면서 쌓인 한이 알게모르게 PIFF를 통해 폭발하는 건 아닐런지(네, 제 얘깁니다. ㅠ_ㅜ).

    • 영화제란 게, 저도 일해봐서 알지만… 한 해의 노하우란 게 다음 애로 그대로 전달되기 굉장히 힘든 체계예요. 말그대로 젊은 사람들 2, 3년 등골 빼먹고 내버리는 시스템이랍니다. 저도 부천영화제 딱 2년 하곤 다시는 영화제 안 한다고 돌아섰고, 실업 와중에도 영화제에서 구인광고 뜰 때도 모질게 외면했었어요. 친한 사람들 중 영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영화제에서 일하는 거 어떠냐고 물어볼 때마다, 한두 번은 할 만하지만 절대 뼈묻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곤 했죠. 부산영화제라고 다르진 않습니다. 물론 국내의 영화제 인력 중 부산영화제 인력이 그나마 가장 대우를 잘 받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죠.

      머리로는 ‘서울공화국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데, 그래도 역시 전 서울사람이더라고요. 서울 바깥은 생각할 줄 모르는… 그나마 부산서 1년 살았다는데도 이 모양인데, 평생 서울 바깥을 벗어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기도 하고요. 부산영화제의 성공은 분명 부산시민들의 폭발적인 성원과 지지가 큰몫을 했고, 그래서 최근 곽경택 감독에 대해 매우 전향적으로 평가하게 됐어요. 고고함과 우아함 떨어야 하는 여배우마저 처음부터 끝까지 부산사투리 쓰게 만드는, 로컬 시네마 만드는 것만으로도 칭찬해 마땅하다고요. (물론 그의 영화미학엔 여전히 찬성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그에게 영화미학이란 게 있긴 한가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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