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부어맨 | 엑스칼리버

Excalibur

엑스칼리버~!!!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는 워낙에 이야기로도 영화로도 버전이 많지만, 존 부어맨이 토마스 말로리의 ‘아서 왕의 죽음’을 바탕으로 만든 <엑스칼리버>에서는 심지어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도 조연에 불과하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제목이 보여주는 대로 바로 ‘엑스칼리버’라는 칼이다. 호반의 여신(부어맨의 딸 중 스탭으로 참가했던 텔체 부어맨이 연기한다)이 선물한, 진짜 왕을 위한 칼 엑스칼리버는 아서의 아버지 우터(가브리엘 번)의 손에 잠깐 머무른 뒤 오랫동안 바위에 꽂혀있었고, 아서의 손에 들어간 뒤에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아서는 기사 중의 최고 기사 랜슬롯과의 결투 “때 이 칼을 한번 부러뜨려 먹는데, 호반의 여신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엑스칼리버를 선사하고(호반의 여신은 칼 수리 전문 대장장이?), 아서가 죽을 때 칼을 다시 회수해간다. 영화가 우터와 콘월의 전쟁으로 시작해 아서왕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엑스칼리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고 어떻게 사라졌는지가 이 영화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상당 부분이 아서를 중심으로 한다 해도, 결국 아서는 엑스칼리버라는 칼을 매개로 등장하는 존재인 것이다.


원래 켈트족의 신화였던 아서왕의 전설은 영국이 ‘왕국’으로 기틀을 다져가고, 신화와 전설의 시대에서 기독교로 통합되어 가는 그 과도기를 배경으로 한다. 아서와 귀네비어의 결혼은 기독교의 축복을 받았고 아서가 원탁의 기사들을 전세계에 보내 찾게 한 것은 성배, 즉 예수가 마지막 만찬 때 사용했던 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사 멀린과 모가나가 등장하며 멀린이 신화와 마법사의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것은 이 시대가 아직 기독교를 국교로 한 통합된 국가가 되기 전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신화의 시대가 역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절대왕권의 강화는 신의 뜻이 아니라 국가와 법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 것. 거웨인 경(새파란 시절의 리엄 니슨이 출연하지만 수염과 갑옷 탓에 얼굴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옆얼굴의 이마의 선이 젊은 날의 리엄 니슨의 모습을 추측하게 해줄 뿐.)이 귀네비어와 랜슬롯의 부정을 고발했을 때, 귀네비어가 섭섭함을 표함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아서왕조차 거웨인과 랜슬롯의 ‘결투’라는, 당시 국법에 따른 재판을 진행한 것은(그 법의 합리성은 차치하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81년작인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아는 아서왕의 전설, 예컨대 랜슬롯과 귀네비어 사이의 연애랄지 성배를 찾는 모험, 특히 그 성배를 찾아온 기사가 원래 랜슬롯의 몸종 출신으로 나중에 원탁의 기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 퍼시벌이라는 것 등의 이야기를 모두 포함하는 대하서사극이다. 칼 오프의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 그 중에서도 두 번째 곡인 ‘운명의 여신이여(O Fortuna)’가 주제가처럼 쓰이고, 이 곡은 원래 유명한 곡이었지만 <엑스칼리버>로 인해 더욱 대중적으로 익숙한 곡이 되어 온갖 CF 등에 쓰이게 된 까닭에, 원래 있던 곡이 <엑스칼리버>에 삽입된 곡이라기보다 마치 <엑스칼리버>에 처음 쓰여 대중화된 곡처럼, <엑스칼리버>를 대표하는 곡처럼 느껴질 정도다. 지금 보면 다소 조잡해 보이는 특수효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펙터클을 한층 강화시켜 주는 것이 바로 이 ‘운명의 여신이여’를 비롯한 음악들. 성배의 물을 마신 후 건강을 되찾은 아서가 다시 모인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모드레드와 싸우기 위해 진군하는 장면은 매화꽃잎이 날리는 아래 기사들의 은빛 갑옷이 번쩍이고 특수효과들이 쓰인 것 외에도, 이 ‘운명의 여신이여’ 때문에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황금빛 갑옷을 입은 모드레드가 결국 아서의 손에 죽는 것은 어찌 보면 아버지이자 형의 손에 죽을 수 밖에 없는 부정한 인간에게 예정된 비극적 말로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결국 국가의 기틀이 마련돼가는 와중에 ‘마법사’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퇴행적 역사에 대한 처단이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서는 왕이 된 후 멀린에게 그렇게 많이 의존하진 않는다.)


25년이 지난 후의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뿜어내는 장엄함, 특히 헬렌 미렌이 맡은 모가나의 카리스마가 주는 압도적인 힘에 대한 공감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마법사 멀린이야 원래 의도에서부터 약간의 코믹한 면을 가진 존재(마치 <반지의 제왕> 1부에서의 갠달프처럼)로 해석되었지만, 아서왕이 얼마나 품격있고 자비로운, 존경받을 만한 왕인지를 설득하기 위해 제시된 장면들, 예컨대 방금 전까지 대적했던 유리엔스에게 엑스칼리버를 내주며 자신을 기사로 임명해달라는 장면이랄지, 랜슬롯과 처음 마주쳤을 때 엑스칼리버의 신령한 힘을 사용해 그를 작살내 놓고는 금방 후회하는 장면, 성배의 물을 마신 아서가 기력을 되찾는 장면 등은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 당시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는데, 이것은 장면 전환의 시간적 격차가 원인인 것 같다. 만약 그 장면에서 아서가 갈등하는 장면의 시간이 1초만 길었어도, 관객들이 웃지 않았을 것 같다. 15년 전과 지금에 있어 관객들이 화면에 반응하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점이지 싶다.


몇 년 전 DVD로 보면서 워낙 그 작은 TV화면에도 불구하고 황홀경을 느꼈던 까닭에 이번에 충무로영화제에서 상영한단 얘길 처음 들었을 때 “내 생전 <엑스칼리버>를 극장에서 보게 되다니!”라며 흥분했건만, <THX 1138>도 그랬지만 상영시 쓰인 필름이 낡아서, 기스가 문제가 아니라 색이 날아가 버린 것 때문에 대한극장의 큰 화면으로 본 것으로 그리 만족스럽지가 못 했다. 그냥 칼 오르프의 음반이나 사서 ‘카르미나 부라나’ 전곡을 제대로 들어보자는 결심을 한 정도.




ps1. 텔체 부어맨 외에도, 부어맨의 (당시) 어린 아들이 어린 모드레드로, 딸 카트린 부어맨이 이그레인 역으로 출연한다. 거웨인 경으로 리엄 니슨이 나오는 것 외에도, 엑스칼리버를 바위에서 뽑은 아서에게 가장 먼저 충성을 다짐하는 리언데그란스 경으로 나오는 이가 바로 재비어 교수, 패트릭 스튜어트이다.


ps2. 귀네비어가 청순가련형이 아닌 말괄량이형으로 묘사된 것이 흥미롭다.,


ps3. 브레송의 <호수의 랜슬롯>을 보고싶다는 ‘자극’을 준.


ps4. 국내에 출시된 DVD는 화질이 사후에 보정된, 매우 깨끗한 색감을 보여준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10 Comments

  1. 브레송 영화는 < 수의 랑슬로>라는 제목으로 봤었다오. 처음 볼 땐 많이 졸리우니 각오를…요새 < 발론 연대기>읽고 있는데, 이거 소재로 만든 다른 영화들 좀 소개해주오. < 아더>는 뻬고…^^

    • 불어발음으로 하면 ‘랑슬로’가 맞긴 한데, 고유명사인지라… < 아서>도 ‘나름’ 재밌는데. 켈트 신화라는 걸 강변하듯 등장인물 모두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지 아마. 별로 추천할 만한 버전이? 나도 당장 생각나는 건 < 수의 랜슬럿>밖에 없어서. 예전에 아트시네마에서 할 때 보러갔다가 신나게 자고 온 경험이 있지. 뭐 밤새고 간 댓가긴 하지만.

  2. 브레송의 호수 랜슬롯은 보고 싶기는 한데, 지루하다는 것 외에 다른 감상을 들려주시는 분이 안 계기는군요. 먼저 보시고 색다른 리뷰를 보여주심이 어떨지….^^;
    관객에게 큰웃음….;; 실은 저도 어디선가, 이 영화를 살인토마토의 습격이나 에드 우드 영화와 함께 웃으며 볼만한 B무비로 소개된 것을 본 적이 있군요;; 그나저나 충무로 영화제는 필름의 질이라든가 화면비율이라든가 음향에 대한 불만을 꽤 여러군데서 들었는데 (특히 서스페리아 보고 온 언니가 분노하더군요. 화면은 위아래로 길쭉하게 늘여놨고 사운드는 꼬지더라고….), 엑스칼리버 필름도 색이 바랬던가요;ㅇ;

    • 오래된 영화니 어쩔 수가 없지요. ^^ 아주 오래된 영화면 차라리 몇주년 복원, 뭐 이런 과정을 거칠 텐데, 어중간하게 오래된 영화는 오히려 여러모로 사정이 더 열악한 게 당연한 현상이니까요.

      영화제와 관련된 잡음들을 저는 영화제가 끝나고 나서야 알게됐는데, 뭐랄까 좀… 영화제 측에서 명백히 잘못한 부분들이 많긴 하지만,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모습들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더군요. 부산영화제 때도 그렇고, 뭐 하나 잘못했다 하면 마치 건수 생겼다는 듯, “이 기회에 제대로 굴복시켜 발 아래 깔아뭉개고야 말겠다”는 전의가 불타오르는 듯한 반응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오히려 두둔을 해주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 수의 랜슬럿>은 조만간에 보고 감상문 올리겠습니다. ^^

  3. 호수의 랑슬로는 밤 안 새워도 보면 졸리오 ==’ 알다시피 란슬롯, 또는 랜슬롯은 영어 발음이고 랑슬로는 프랑스 발음인데, 아더왕 이야기 판본이 브리튼을 넘어 프랑스, 독일까지 퍼져나갔기 때문에 이름이 약간씩 변하지. 켈트 신화는 브리튼에서 발현되었지만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 각기의 신학과 상징 해석을 통해 이야기가 많이 덧붙여지고, 캐릭터도 상당히 변질되거나 덧붙여졌다오. 특히 란슬롯은 가장 뛰어난 기사로 각국에서 사랑받고 쉴새없이 재해석된만큼 프랑스 영화의 란슬롯은 ‘랑슬로’라고 불러주는 게 적합하겠지.

    엑스칼리버는 나름 영화 판본으로 괜찮더군. 비슷한 캐릭터를 합쳐버리는 솜씨도 괜찮았고…그래도 되게 아쉽던데, 그 졸린 랑슬로를 다시 봐야하는건지…

    • 그래도 난 이게 켈트신화인 만큼 랜슬럿으로 불러주고 싶소.

      엑스칼리버, 봤는가? 설마 어둠의 경로? ㅋㅋ 이거 개봉하던 81년만 해도 국민학생들 단체관람하던, 당대의 < 로이> 같은 영화였다지. 큰 화면으로 보니까 멀린이 참으로 코믹했어. 모가나 앞에서 쩔쩔매는 것도 그렇고. 많이들 웃더라. 필름 상태만 좋았어도… < 드맥스2>는 낡아서 기스는 많이 났어도 화면이 시뻘겋진 않아서 좋던데… 이 영화 특히 좋은 게 또, 음악을 참 잘 썼지. 특수효과는, 지금 눈으로 보면 좀 조잡한 부분도 있는데(유난히 번쩍이는 랜슬럿의 은빛갑옷이랄지 엑스칼리버에 감돌던 녹색빛이랄지.), 그래도 모드레드와 싸우기 위해 출정하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지. 그 장면에서 나오는 O Fortuna는 특히 웅장하고…

      참, [아발론 연대기]는 그러고 보니 1권이 집에 있다. 전에 출판사 놀러갔다가 선물 받아서… 이거나 읽어야겠다, 마침 [블랙 달리아]도 다 읽어감.

  4. 트로이가 아니라 와일드 오키드가 아니었을까 하던데…ㅋㅋㅋ;;;; 역시 헬렌 미렌은 hot…

    • 푸하하, 불타는 호르몬을 제대로 자극하는 영화이기도 하지. 헬렌 미렌의 카리스마도 너무나 훌륭하고. 아마 < 스칼리버> 찍을 때에도 헬렌 미렌이 그리 젊은 나이는 아니었을 텐데, 정말 아름다우셔서, 역시 ‘여자의 섹시미의 최고봉은 30대 중반’이라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아, 나는 뭐하고 있다냐;;;)

  5. 저,
    국민학생 때 어린이회관인가 어딘가에서 단체관람했습니다.
    기억나는 것은,
    음…
    역시 넘치는 리비도랄까…
    글 잘 읽고 있습니다. ^^

    • 앗, 남녀 누드가 나오는데 국민학생 단체관람… 하하;;
      하긴, 아서왕, 원탁의 기사, 이건 ‘소년들을 위한 이야기’로 쾅 찍혀있는 경향이 많았죠. 언젠가 다시 한번 좋은 필름으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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