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필성 | 헨젤과 그레텔

헨젤과 그레텔

전 이 포스터가 더 끌리네요.


국내에서 ‘미녀와 뱀파이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기묘한 마법의식의 표식이 손에 그려진 어린 남매의 시체가 발견된 사건을 그린다. 어린 아이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술렁이기 시작한 마을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손에 그려진 표식이 마법의 의식에 사용되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살인자가 마녀들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결국은 마법에 관심을 가진 10대 소녀들을 (자신의 딸도 포함해) 마녀의 화형대로 보낸다. 물론 어린 아이들은 한스와 그레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괴물이 어린 아이로 변신해 마을 사람들은 꾄 것이었고, 이 사건은 곧 우리의 주인공 버피와 그 친구에 의해 진상이 밝혀진다.


부모에게 버려진 가여운 남매가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못된 마녀에게 꼬임을 당하지만 결국 남매가 마녀를 이긴다는 동화 ‘헨젤과 그레텔’은 한편에서는 마녀사냥에 대한 기독교 입장의 변명과 왜곡이라는 매우 전복적인 해석을 낳기도 한다. 대체로 전통적인 서구의 동화에서 마녀는 매부리코와 커다란 점과 털들을 가진 매우 추악한 외모를 가지고 언제나 사악한 의도로 음모를 꾸미는 늙은 노파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마녀’에 대한 가부장적 기독교의 공포가 반영돼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 들고 혼자 사는 여성들을 골라 사회의 불안과 불만을 전가시키는 속죄양으로 삼았던 사건이 바로 마녀사냥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마녀의 존재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헨젤과 그레텔’ 역시 완전히 다른 속살의 이야기를 갖게 된다. 즉, 이 동화는 오히려 탐욕스러운 아이들(혹은 아이들로 위장한 광기의 기독교 추종자들)이 죄없는 마녀를 모함해 아궁이에 태워죽이는(혹은 화형시키는) 끔찍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의 에피소드는 이런 해석을 그 시리즈의 원래 스타일에 맞춰 변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임필성 감독의 야심찬 영화 <헨젤과 그레텔>이 취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러한 해석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이 영화가 분명 저 해석을 인식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의 집에 찾아오는 또 다른 손님인 변집사(박희순)의 존재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광기어린 기독교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캐릭터는 영화의 맥락상 굳이 그런 식으로 설정할 만한 필연적인 이유를 갖고 있지 않으며, 그가 보여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광신도’의 이미지와도 약간 차이가 난다. 엔딩 자막에 굳이 특정 종교와 상관없음을 나타내는 자막을 다는 수고를 감내하고, 관객의 입장에서 상당한 이질감이 느껴짐에도 이 캐릭터가 그렇게 설정된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인 것이다.


헨젤과 그레텔

저 맑은 동안 때문에 천정명이 캐스팅된 건 알겠는데, 정작 연기는 국어책 신공이다 ㅠ.ㅠ


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이질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비주얼은 물론,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작동한다. 예컨대 집의 구조라던가,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난감들을 비롯한 갖가지 소품들, 벽지는 물론이고 숲속에 있던 비밀의 집의 문에 있는 문양까지도 관객에게 상당한 이질감을 제공하는데, 이는 철저하게 서양의 아이들이 갖고 놀았을 법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 속에서 한국말을 하는 한국배우들이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낯설다고 여겨질 정도다. 아이들 중 하나인 영희(심은경)가 은수(천정명)에게 처음 나타나는 장면에서도, 그녀는 마치 빨간모자의 소녀를 연상시키는 듯한 모습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전래동화보다는 서구의 동화책들을 더 많이 읽고 들으며 자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정서나 무의식까지도 서구화돼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콩쥐 팥쥐의 이야기로, 백설공주의 이야기를 장화 홍련의 이야기로 전이시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세계에서의 낯선 이질감을 제공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미장센이라고 이해하려고 해도, 어쩌면 <헨젤과 그레텔> 같은 영화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혹은 유럽에서 나와야 했던 영화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그 이질감의 정도가 심해서, 이 이질감이 아무리 낯선 세계의 신비한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설득이 되지 않을 정도다.


헨젤과 그레텔

어떤 고아의식


오히려 이 영화는, 한국의 ‘정치적’인 맥락에서 재미있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지금의 386 세대들(감독 자신도 속해있는)은, 이승만 독재정부에서 기나긴 군사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굴절되고 폭압적이었던 역사 때문에 국가의 정통성이나 부모 세대의 정당성 등을 부정하며 자신을 일종의 ‘고아 세대’로 여기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는 인터넷 논객인 한윤형 씨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드라마 <환상의 커플>을 다루며 지적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이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어른이 되고 기득권이 되는 상황을 직접 겪으면서도, 심적으로는 여전히 ‘어른’을 증오하고 어른 세대가 되기를 부정하며 자신을 여전히 ‘나쁜 어른들로부터 여전히 탄압받는 아이들’로 여기는 한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그런 이미지의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국회의 다수파를 차지하면서도 그렇다.) 물론 그들이 겪은 엄청난 상처는 그 누구도, 어떤 것으로도 보상해줄 수 없는 대단한 트라우마이지만, 엄청난 힘을 갖게 되었으면서도 성장해야 할 때 성장하지 못한 어른-아이들은 결국 (아무리 원치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임필성 감독의 진짜 의도에 이런 해석이 포함돼 있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영화 <헨젤과 그레텔>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어른을 증오하고 어른의 힘을 함부로 휘두르다 벽에 부딪힌 386세대의 무의식을 반영하고 성찰하며 위로하는 영화로 보는 것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 준다.


헨젤과 그레텔

아주 신비롭습니다. 아이의 얼굴과 어른 여자의 얼굴이 공존해 있는.


그리고, 프레시안무비 기사에선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


1. 전 그 플래시백 시퀀스가 정말 징하게 싫습니다. 왜 한국영화들은 뻑하면 구구절절한 사연과 이유를 만들어놓고, 그걸 그렇게 늘어지고 재미없는 플래시백 시퀀스로 낑겨넣으며 영화의 맥을 싹독싹독 짤라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까? 정말, 이 장면 나오는데 비명을 지르고 싶어질 정도였습니다. 그건요. 소설에서, 주인공이 쓰는 단편 내용이라던가, 뭐 이런 식으로는 들어갈 수 있어도, 영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넣을 땐 전체 맥락과 리듬감을 고려해 넣어야 하는 거잖아요. 압축적인 편집 플래시백을, ‘씬’으로 분할해서 넣던가, 몇 장면만 넣으면 될걸, 굳이 구구절절 구구절절 설명하는 시퀀스 길이로 넣어야 하는 것인가요?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하라고요.


2. 영희 역의 심은경, 아주 신비롭더라고요. 이 친구가, 얼굴은 애인데, 그 얼굴에 어른의 성숙한 표정이 있어요. 아주 묘하더라고요. 애가 울면서 은수(천정명)에게 매달리거나 할 때 “우아, 저게 바로 진짜 요부로구나” 싶었다니까요. 그런데 이 친구가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또 어찌나 요정같은지. (실은 ‘빨간 모자의 소녀’ 같습니다. 그 장면 자체는 좋은데, 이 영화가 주는 심한 괴리감과 이질감을 더해준 장면이에요.) 참,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은수의 아내의 얼굴이 이 영희의 얼굴과 꽤 닮았습니다. 이거 정말 의도였다고 봐요.


3. 클래이막스 이후 나오는 대사들 때문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성의없고 어색한 대사들이라니. 배우들도 어색해 하는 듯.


4 박희순의 연기는 좀, 아쉽습니다. 배우보다는 감독의 문제란 생각이 들어요. 연기도 당연히 통제와 연출이 필요한 법입니다. 연극 식의 과장된 연기가 좋은 연기고 훌륭한 연기라는 그 이상한 평가잣대는 도대체 어떤 놈이 퍼뜨린 거랍니까?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4 Comments

  1. 그냥 한 마디를 하고 싶어 만든 영화 같더군요.

    “그 세상에는 아이들이 행복한가요?”

    •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무고하시지요?

      남자애가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이 처연했어요. 어린 아이가 그런 분노를, 그런 상처를 가슴에 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지요. 좀 고루하긴 하지만, 전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되도록 즐겁고 예쁘고 아름다운 걸 보여주며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 아무래도 ‘저 이쁘지 않아요? 어른들은 저더러 이쁘다고 해요.’ 같은 대사가 가장 무서웠다죠;;

      애 낳고 기르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 아직 아이 낳을 자격이 없다는 새삼스러운 결론이…;;

  2. 자격으로 따지면 “` -_-;

    그 대사는 저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처음에는 어른들의 애정을 확인하고자 하는 아이의 욕구같은 걸로 생각하고 보다가 나중에 그게 아니라 동생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

    • 저는 그 대사 처음 나왔을 때부터 아동성학대를 바로 알아챘어요. 뉘앙스가 딱 그렇거든요. 변집사가 아이 볼을 쓰다듬기도 하고. 정말 끔찍한 게 그겁니다. 애초의 원장뿐 아니라 그제껏 그 집에 들렀던 수많은 어른들 중 꽤 많은 수의 어른들이 그 아이를 그렇게 학대했을 거라 생각하면 머리가 확 뒤집히는 것 같죠. 역시 제가 여자라 그쪽에 민감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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