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호 | 은하해방전선

은하해방전선

정작 영화는 말이 많아도 유쾌하다

인디스페이스 개관식 때 영화를 봤으니 꽤 오래된 건데 이제껏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알기로는 내가 본 버전이 최종 공개버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 감독은 ‘오늘 버전에서 편집을 좀더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크게 변한 게 있겠나, 싶기도 하고, 굳이 다시 가서 보고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감성에 살짝 어긋나는 부분들도 있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나보다 젊고, 조금 어리다. 아무래도 내가 이 영화를 ‘꼰대같은’ 시선 – 재미있다, 공감된다, 라는 말보다는 ‘기특하다’ ‘귀엽다’ 같은 말이 먼저 나오는 – 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건 나 스스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모평론가는 이 영화가 “88만원 세대가 소통하는 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던데,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88만원 세대의 소통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 쓰신 캐즘 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나는 그게 꼭 88만원 세대만의 문제가 아닐 뿐 아니라 주인공 영재(임지규)가 소통의 첫 단추의 비밀은 찾아냈다고 믿고 있다. 그건 ‘듣기’이다. 그가 은하와 헤어진 건 소통의 문제 때문인데, 연애 시절에 대한 회상 장면을 보면 영재는 정말 더럽게 말이 많으면서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르고, 배려할 줄도 모르고, 그저 누가 내 말을 들어주기만을 바라며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한다. 은하뿐 아니라 그 어떤 여자들도 질려서 떠날 수밖에 없지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영재도 영화 후반이 되면, 성장한다. 제목은 ‘은하해방전선’인 주제에 이쁜 새 여자친구를 사귀는 건 좀 식겁했지만, 하여간 그는 과거의 실패를 통찰하고 그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새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훌륭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은성이 청각장애를 가진 만큼 소통의 외적 조건은 더 어려워졌음에도, 그는 은성의 말에 귀울이고 은성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위 ‘어른’이 되고서도 이걸 못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블로그를 둘러보면 온통 ‘내 말을 들어줘’라며 떠들고 떠들고 계속 떠드는 인간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보이는데, 영재의 이런 발전은 얼마나 눈이 부신지. 나 역시 삼십대 중반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고 고치려 애쓰는 걸, 영재는 이미 그 나이에 하고 있다.


사실 영재는 참 부족하고 단점도 많으며 그 나이의 어린남자 답게 유치한 면도 많고 한계도 또렷하다. (아직 ‘남자’가 아니라 ‘소년’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영화에 박수를 치고 칭찬해줬으면 좋겠다는 그 유치하고도 치기어린 욕망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고, 영화와 연애 양면에서 맞게 된 ‘인생의 총체적 난국’ 앞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부정하거나 변명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는다. 비록 방황하고 헤맬지언정, 그는 자신의 단점과 부족함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거기에서 조심스럽게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사실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보다 서투르고 미숙한 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수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자신의 서투름과 미숙함을 인정하지 못한 채, 변명만 주렁주렁 늘어놓으며 폼만 잡다가 결국 자폭하고 만다. 영화 속의 영재는 소박한 솔직함으로 이 함정을 가볍게 돌파한다. 그리고 이제 첫 장편영화를 내놓은 윤성호 감독 역시, 아직 미숙하다 하더라도 그걸 감추려 하지 않는 솔직하고 소박한 영화, 그리하여 더욱 빛나는 영화 <은하해방전선>을 통해 그 함정을 잘 통과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은하해방전선

사실 이 장면에서 눈물 찔끔.


ps. 진지하고 심각한 영화인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연출한 양해훈 감독이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여 보여주는 코미디 연기는 발군이다.


ps2.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에서도 주연을 맡았던 임지규의, 자연스럽고도 일상적이며 소박한 연기. 이 잘생긴 배우가 이 영화에서는 정말로 “평범하고 미숙한” 초짜 영화감독으로 보이더라는. 계속 관심갖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배우.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3 Comments

    • 잘 모르겠어요. 사실 상업영화 vs. 독립영화란 구분 자체도 애매하거니와, 특히 < 하해방전선>의 경우 명백히 독립영화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 영화가 비상업영화인가? 라고 했을 땐 좀. 치고빠지는 타이밍이 좋은 유머감각이 있다고 그게 곧바로 상업적 감각이 있다고 하는 것도 좀.

      참, 얼마 전에 < 스라이> 봤는데, 영화 좋더군요. < 하해방전선>이 20대용의, 20대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면 < 스라이>는 분명 30대용 영화예요.

    • < 하해방전선>은 독립영화인게 맞죠.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연출 역량을 곁들인 독립영화요.

      < 스라이>가 좀 어설프다는 평을 얼핏 읽었던 터라 기대를 안하고 있었는데, 봐야겠군염. 예고편을 보니 쓰디 쓴 맛이 느껴지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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