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개봉작 – 2008년 1월 둘째 주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 주의 개봉영화를 간단히 소개하는 프리뷰 쯤 되겠습니다. 매체 기사에서는 쓸 수 없는 구어체와 속어들이 남발하는 데다 저의 사적인 취향을 듬뿍 가미한, 완전 제멋대로 소개 및 추천 리스트입니다.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제가 보지 못한 영화들은 ‘미확인 개봉작’으로 분류됩니다.

이 주의 개봉작은 총 10편, 그 중 저의 추천작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아스라이>, <마법에 걸린 사랑>, <미스트>, 이렇게 네 편이 되겠습니다. 두루두루 추천할 수 있는 영화들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한 편이고, 나머지 세 편은 장르 편향과 관객 취향을 좀 타는 영화들입니다만 객관적인 완성도와 매력들을 충분히 지니고 있는 영화들입니다.

이 주의 추천작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감독 : 임순례
| 주연 : 문소리, 김정은, 김지영
두루 알려졌다시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여자 핸드볼 팀의 투혼을 다룹니다. 평소엔 비인기 종목이다가 올림픽 때만 되면 ‘당연히 메달 따오는 종목’ 취급을 받으며 따면 당연한 듯, 못 따면 오히려 욕을 먹는 게 저 여자 핸드볼 종목인데, 누구도 환영해주지 않는 30대 중반의 아줌마들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투혼을 불태웁니다. 스포츠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기대한 만큼의 감동과 웃음을 주며, 임순례 감독의 진짜 장기는 자연스러운 코미디와 유머 감각 쪽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영화 나온다는 얘길 처음 들을 때부터 제발 ‘흥행감독 임감독’이 되시기를 빌었는데, 과연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할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기대를 해선지 아쉬움도 큽니다. 리뷰 예정작.

아스라이
감독 : 김삼력
| 주연 : 김상석, 심재원
만약 당신이 꿈을 위해 어떤 길을 선택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과연 내게 재능이 있을까 하는 고민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외롭다면,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합니다. 물론 이 영화는 당신에게 달콤한 희망의 말을 전해주기는커녕, 온통 우울하고 어둡고 스산한 장면들 투성이입니다. 서울도 아닌 영화과 하나 변변히 없는 대구에서 영화를 만드는 젊은 독립영화 감독의 이야기란 게 얼마나 우울할지 딱 짐작이 가죠?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 – 신파와 자기 연민이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보고 나면 오히려 격려와 응원을 받는 듯한 기분을 느낄 겁니다. 참 소중하고 귀한 영화입니다. 인디스페이스 단독개봉작이자, 역시 리뷰 예정작.

미스트
감독 : 프랭크 다라본트
| 주연 : 토마스 제인, 마샤 게이 하든, 로리 홀든
일찍이 스티븐 킹 퐈순이인 제 친구 E양은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마일>에 대한 평이 갈리는 현상에 대해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 바 있습니다. “다라본트 감독은 스티븐 킹의 너무 심한 빠돌이라서, 빼야 할 부분을 차마 빼질 못 해.” 그렇기에 E양은, 다라본트가 만약 스티븐 킹의 장편이 아닌 단편과 중편을 건드린다면 꽤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이를 테면 <미스트>가 그렇습니다. 정체불명의 습격자들 때문에 마트에 갇히면서부터 서서히 긴장감과 스릴감과 미스테리를 증폭해 나가고, 전투가 벌어지고, 한편으로 마트 안에서 광폭한 광기가 흐르는 일련의 과정을 차곡차곡 풀어가는 솜씨가 꽤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 주연인 토마스 제인의 연기가 많이 아쉬웠어요.

마법에 걸린 사랑
감독 : 케빈 리마
| 주연 : 에이미 애덤스, 패트릭 뎀시

네, 물론 이 영화는, 동화 좋아하고 공주님 좋아하는 여성 취향의 영화입니다만, 영화가 아주 깜찍합니다. 디즈니 만화 속에서 동물들과 얘기하고 그저 이슬만 먹고 살 것만 같은 공주님이 뉴욕에 떨어졌으니. 하지만 디즈니 영화의 전통 자체를 패러디하고 비꼬면서도 애정 충만한 박수를 함께 보내고 있다면, 게다가 그 솜씨가 꽤나 괜찮은 편이라면, 볼 만하지 않겠어요? 자뻑 왕자님의 자뻑 모험도 즐겁고, 이 연기를 유쾌하게 해내는 제임스 마스덴의 모습도 귀엽고요. 하지만 추천작 중에서 이 영화가 관객 취향을 가장 많이 탈 것 같네요. 고상한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껜 ‘유치하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겠고, 양키센스가 부족하신 분들에겐 영화의 재미가 반감될 수도 있겠습니다.

아스라이

이 주의 난감작

무방비도시
감독 : 이상기
| 주연 : 김명민, 손예진
그냥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아놔 우리 명민 오빠 어뜨케 ㅠ.ㅠ 김해숙, 손병호, 김명민 같은 좋은 배우들을 데려다가 이렇게밖에 못 써먹는 것도 범죄고, 이혜숙 같은 배우를 그렇게 카메오로만 써먹는 것도 범죄입니다. 거기다 로셀리니 감독 영화 제목은 왜 갖다 붙이셨는지. 리뷰를 쓸 의욕조차 꺾어버리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보고 나와서 하도 한숨만 푹푹 쉬어대니 같이 본 지인이 그렇게 아쉬웠냐고 물어보던데, 아니오, 별로 아쉬운 건 없었습니다. 잘 된 부분이 있었어야 아쉽기라도 하죠. 전 그냥, 새삼 자기연민에 빠졌을 뿐입니다. 이런 영화들만 계속 보다보면 내 안목이 상당히 저렴해지겠다는 우려와 걱정과 두려움과 함께 말입니다.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
감독 : 데이빗 슬레이드
| 주연 : 조쉬 하트넷, 멜리
들립니다. 조쉬 하트넷 주가 내려가는 소리가… 원작만화에선 폼나고 멋있었을 장면이 실제로 영화화되면 후져지는 건, 매체의 차이를 인식 못해서일까요, 그냥 연출 솜씨가 부족해서인 걸까요? 원작이 따로 있었던 만큼 아이디어도 좋고 몇몇 장면들은 꽤 괜찮았으며 잘 했다면 흥미 만점의 영화가 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초반 지나면 영화가 늘어지기 시작하는 데다 중반 이후로는 좀비가 별로 무섭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습니다. 삼십 일 동안이나 낮밤 없이 마을을 지배하고 있었으면서 그렇게밖에 못 한다는 건, 이 좀비들이 대단히 멍청하거나 대단히 허약하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전 일정한 장르영화들에 있어서는 별로 까다롭게 구는 편이 아닙니다만, 이 영화의 장점들이 단점들을 덮을 정도로 매력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미확인 개봉작

더 재킷
감독 : 존 메이버리
| 주연 : 에이드리언 브로디, 키이라 나이틀리, 대니얼 크레이그
다 좋아하는 배우들이고 감독의 이력도 독특한 편(실험영화)인데, 2005년에 개봉했던 이 영화의 ‘로튼 토마토’ 점수는 그리 높지 않은 편. 전 오히려 이 감독이 연출했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전기영화 <사랑은 악마>가 더 궁금합니다. (데렉 자코비 경께서 나오시거든요… 아직 풋풋한 시절의 대니얼 크레이그와 함께 말이죵.)

붕대 클럽
감독 : 쓰쓰미 유키히코
| 주연 : 야기라 유야, 이시하라 사토미, 타나카 케이
열아홉살 소년으로 부쩍 큰 야기라 유야가 나온답니다. 시놉시스만 보면 당의정을 잔뜩 입힌 귀여운 청춘영화일 것 같아요. 이런 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데 제가 확실히 나이먹은 꼰대가 돼가는 것 같아서, 조금 망설이는 중.

말할 수 없는 비밀
감독 : 주걸륜
| 주연 : 주걸륜, 계륜미
현재 중화권 최고의 엔터테이너 주걸륜이 심지어 감독으로도 데뷔한 영화인데 올해 금마장영화제에서 ‘올해의 대만영화’ 상까지 받았다고 하니, 분명 체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봉하자마자 보러 갈 예정.

그것에 대하여
감독 : 스티브 앤더슨
Fuck에 대한 ‘인류문화학적’ 고찰을 시도한 다큐멘터리라고 말은 거창하게 하는데, 글쎄요. 요즘 그저그런 에로영화가 단지 소규모영화라는 이유 만으로 ‘예술영화’의 탈을 쓰고 필름포럼에서 개봉하는 꼴을 너무 많이 봐서, 일단 의심부터 갑니다. 이건 다른 분들 리뷰를 보고 볼지 말지 결정할 예정.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14 Comments

  1. 세계 최초(?)의 핸드볼 영화, 그리고 임순례 감독님,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꼭 극장에서 보고 싶네요. ^^
    흥행이 잘 되었으면 합니다.

    • 이번 기회에 무난히 ‘흥행감독 임감독’님이 되실 것 같습니다. 영화가 관객의 정서를 쥐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아주 좋습니다. 배우들 케미스트리도 아주 좋고요. 그런데 저는 의외로, 임감독님의 컷과 미장센이 굉장히 뜨악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2. 우생순, 영화 잘 되길 바라는 마음 한결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기대 안합니다.
    뭐 당연히 좋은 내용일 것이고 잘 만들었으려니. 그러나 내가 영화관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과연 이런 거냐는 질문 앞에서는 아니다가 맞는 거 같아요.

    • 당연하죠. 우생순은 신어지님을 타겟으로 하지 않거든요. 딱 30대 초반, 중반, 후반의 언니들을 격려하기 위한 영화라는 게 작년 초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부터의 감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MK 심재명 대표님께 ‘저에게 이런 영화가 너무 필요했어요!’라고 흥분해서 어필을 했으나… 그러나 결과물은 제 기대를 살짝 배반하는군요. 흐.

  3. 저도 < 우생순>보고싶어요. 이렇게 줄여 부르는거 별로 안좋아하는데..대세가 그러네요.^^

    < 아스라이>도 물론 대중과의 접점 또는 소통 부분에 의견이 엇갈릴 수 있겠지만,
    무엇을 보고 발견할 것인가 라는 열린 자세로 영화를 접한다면 충분히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

    < 아스라이>가 작년 벤쿠버 영화제에 초쳥됐을 때, 장르 섹션이 코메디로 분류 됐어요. 그들은 재밌는 영화로 본거죠. 또 수상에서 제외된 이유에서 첫번째가 영화의 내러티브가 강하고, 대중적이기 때문이었어요. 이상하게도 많은 분들이 독립영화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딱딱하고 유연하지 않아서 자꾸만 어렵고 힘들어 하는 경향이 있지 싶은데..자주 보고 또 보면 익숙해 질 .. 현재는 낯설지만 진정성이 가득한 영화가 많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아셨음 합니다. ㅠ.ㅠ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요 며칠 기분이 살짝 다운돼 있었는데,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제가 < 아스라이>의 주인공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온 거죠. 전 그 영화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이라는 누군가의 옛 말을 기억해 냈거든요.

  4. 가난하고 게으른 중생에게 참으로 유익한 기획이네요>.< 더 재킷은 왜 안 들어오는 것인지 못내 불만스러웠는데(결국 못 참고 Love is the Devil과 함께 세트로 DVD를 질러버렸지요ㅠㅠ 참, 사랑은 악마는 작년 하반기에 토니와 프랭키가 번역되어 나왔고 하니, 이번에 더 재킷의 반응이 좋다면 조용하게나마 슬그머니 들어올 기회가 있으려나 희망을 가져봅니다.) 뒤늦게라도 개봉을 한다니 극장에서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스트레이트재킷 코스프레도 제대로 감상할 겸 다시 보고 싶군요.(그렇지만 지방 개봉은 요원할 것 같은 느낌이...;;) 에프유씨케이는 (제목에서부터 찌라시 느낌을 받은 제 선입견이 작용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변변찮은 것이 과대포장되어 들어온 듯한 불길한 예감이 먼저 듭니다^^;;

    • < 더 재킷> 시사회가 있었던 날이 < 써티데이즈 오브 나이트> 시사회와 같은 날, 거기에 같은 장소였어요. 딱 < 써티데이즈...> 끝나고 나면 바로 < 더 재킷>을 볼 수 있도록 돼 있었는데, 워낙 < 써티데이즈...>에서 힘을 빼고 나니 < 더 재킷>까지 볼 엄두가 안 나더군요. (게다가 로튼 토마토 점수가 그리 좋지 않았던 걸 확인했던 터라…) 그래도 에이드리언 브로디, 키라 나이틀리, 대니얼 크레이그, 거기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인데다가 보신 분들 평도 좋은 편이어서 살짝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개봉했으니 일반극장으로 시간 쪼개서 보러가야겠습니다.

      [토니와 프랭키]는 안그래도 북극찐빵님께서도 포스팅해주시고, 다른 분 블로그에서도 (영화와 함께) 글을 보았던지라 읽어야지, 하고 있습니다.

      프리뷰가 좀 손이 많이 가서 쓰다가 살짝 괜히 시작했나, 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쓰는 저도 재미있고(무엇보다 속시원히 막말한다는 기쁨!), 또 좋다고 해주시니 힘이 불끈 납니다.

  5. 요즘 한국영화나 드라마들이 미국고전이나 유럽영화들 제목을 (번한제목이라도..) 그 대로 해오는거에 대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지더군요 …

    • 이미 공인받은 과거의 아우라에 기대는 ‘게으르’고 ‘얍삽’한 짓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 그 영화를 현대적으로, 그리고 이 한국땅 위에서 재해석하거나 해체/재구성하는 거라면 몰라도, 아무 맥락없이 이유없이 틱, 하고 따오면서 마치 대단히 쿨한 것인 양…

  6. [미스트] 보고 왔습니다. 기대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결말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나와 ‘이거 내가 뭐가 잘못된건가’라는 생각도 했구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다라본트의 영화가 [쇼생크탈출]을 제외하면 TV물인 [생매장]이었기에, 이전부터 다라본트는 이 장르에 무척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얼추 맞은 듯 하여 기쁘네요.

    그나저나 게으른 저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도움이 될만한 연재입니다. 성원합니다.

    • 배드엔딩 중에서도 굉장한 배드엔딩인데 그 장면에서 웃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그건 전적으로 토마스 제인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그의 연기가 아쉬웠다고 한 것도 특히 그 장면들 때문입니다. 그 어색한 고함지르기라니… 어쨌건 그것만 제외하면, 스티븐 킹 원작의 괜찮은 영화 리스트(이 리스트가 지극히 짧다는 건 Arborday님이 더 잘 아시겠죠? ^^)에 또 한 편이 추가된 셈입니다. :)

  7. 붕대클럽 지난주엔가 봤는데 역시 이런 영화 보기엔 내가 너무 나이가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같이 봤던 저보다 8살 어린 동생은 재밌었다고-_-;;)

    • 사실 < 붕대클럽>도 별로 소화할 자신이 없어서 보러 안 가고 있었는데, hachi님 말씀 들으니 ‘역시…’란 생각이 듭니다. :) 확실히 나이대가 달라지면 볼 수 있는 영화들 종류도 바뀌나 봅니다. 20대 후반에서야 < 아이다호>를 보고선 “내가 늙었는가베”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가 하면 20대땐 별로 이해하지도, 좋아하지도 못했던 영화들에 이제 와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새삼 반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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