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터 키튼 | 셜록 주니어

2008년 서울아트시네마의 첫 프로그램인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이하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작, 즉, 서울아트시네마의 2008년 첫 상영작이 버스터 키튼의 <셜록 주니어>인 것은 물론 서울아트시네마 스탭들의 취향이 심하게 반영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시네마테크 영년’을 선언한 올해의 서울아트시네마에 있어 대단히 의미심장한 선택이라 할 만하다. (나아가 앞으로 서울아트시네마가 매년 첫 상영작을 버스터 키튼의 영화로만 트는 것도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가 되리라 생각한다.) <셜록 주니어>는 감히 말하건데 ‘영화의 모든 것’이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이 대체로 다 그렇긴 하지만 이 영화는 모험과 코미디, 미스테리와 로맨스, 액션이 모두 들어가 있으며, 나아가 영화 속 영화의 형식을 취하며 허구와 현실간 긴장과 충돌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코멘트하는 메타영화이기도 하다. 키튼은 결코 심도깊은 사상가나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화는 종종 영화라는 것의 본질을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언어로 관객 앞에 드러내 보이며, 영화와 현실간의 관계 – 모방, 반영, 긴장, 상호침투 등 – 을 폭넓게 아우르며 즐거운 ‘탐구와 성찰’의 모험을 펼친다.

Sherlock Jr.

탐정이 되고싶은 영사기사 키튼.

현실의 생업은 영사기사(Moving Picture Operator)이지만 탐정을 꿈꾸는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갔다가 라이벌인 바람둥이 녀석 때문에 도둑의 누명을 쓴다. 의기소침한 상태로 극장에 돌아와 영화를 틀다가 잠이 드는데, 그의 영혼이 (심지어 모자까지 챙겨쓰고) 영사실에서 나와 스크린의 영화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현실(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스크린이 아직 존재하는)과 영화가 공존하던 처음에는 아직 현실의 영사기사인 그는 영화 속 장면과 심한 모순을 일으키며 고생하지만(버스터 키튼의 의도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바뀌는 영화 속 배경장면 때문에 펼쳐지는 일련의 몸개그들), 곧 영화 속 영화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 즉 영화 속 현실이 되면서 – 그는 ‘시대의 명탐정’ 셜록 주니어로 재등장해 온갖 아슬아슬한 활약을 펼친다. 그는 악당들의 간계를 꿰뚫어보며, 위험한 상황에서도 재기를 발휘해 그 상황을 벗어나며, 결과적으로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고 덤으로 여자의 사랑도 얻는다. 하지만 셜록 주니어는 기본적으로 셜록 영사기사인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덤벙대고 여전히 빨리 뛰고 여전히 곤란한 상황들을 맞는다.

비록 영사기사인 그는 가진 것 없고 초라하며 그 와중에 마음도 약하고 소심하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쓴 누명도 스스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여인의 적극적인 대처와 해결에 의해 벗게 되지만, 셜록 주니어는 영사기사인 그보다 훨씬 뛰어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마도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스타들을 보면서 꾸는 꿈 역시 비슷할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꾸는 꿈은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나, 조금 더 나은 현실이고, 현실의 비루한 내가 그토록 영화로 빠져드는 것 역시 그러한 소망 때문이다.사랑하는 여인의 손 한 번 못 잡는 이 소심남이,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는 건 결국 자신이 틀고있던 영화의 주인공을 따라하면서인데, 여기서 영화-현실간 긴장과 모순, 그럼에도 상호영향 관계가 드러난다.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하지만, 현실은 다시 영화를 모방하고 반영한다. (그러므로 영화 주인공을 따라 사랑하는 여인에게 비로소 스킨쉽과 함께 애정을 고백하는 버스터 키튼의 모습이 영사실 창의 ‘프레임’ 안으로 보이도록 앵글을 잡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다.)

Sherlock Jr.

영화 속 영화로 걸어들어가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찰리 채플린의 위력이 더 세지만, 서울아트시네마와 시네마테크부산에서의 대대적인 특별전 덕인지 이제 버스터 키튼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그렇게까지 드문 일은 아니게 됐다. (이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무언의 동지애가 샘솟으면서 괜히 반갑다.) 영화, 특히 무성영화가 주는 그 시각적 쾌감, 영화적 경험이라는 것을 극대화시켜 보여주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영화가 왜 영화인지, 왜 영화는 드라마가 혹은 문학이 아닌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에 나는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에서의 키스씬이 아마도 영화 사상 가장 로맨틱한 키스씬이 아닐까, 라고 쓴 적이 있는데, <셜록 주니어>에서의 키스씬은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수줍고 귀여운 키스씬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것은 자칭 버스터 키튼 빠순이이기에 내뱉을 수 있는 극악한 과장과 배타의 발언이기는 하지만. 버스터 키튼의 일련의 영화들 중에서도 <셜록 주니어>는, 키튼의 영화에 나타나곤 하는 쓰디쓴 삶의 슬픔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은, 그러나 단순히 코미디 이상의 것이다. <카이로의 자줏빛 장미>에서 완벽한 톰 백스터가 세실리아를 찾아오고 <마지막 액션 히어로>에서 대니가 잭 슬레이터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기 이미 훨씬 이전(<셜록 주니어>는 1924년작이다.)에 버스터 키튼은 영화와 현실을 섞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우리들의 미래를 이미 예견해 놓았다. 뛰어난 배우일 뿐 아니라 뛰어난 감독이었던 그는, 뛰어난 영화이론가로 불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ps. 사실 <셜록 주니어>는 이제까지 본 그 어떤 버스터 키튼 영화들과 달랐다. 대체로 나는 키튼의 영화를 미친 듯이 웃으면서(그리고 혼자 몰래 울면서) 보게 되곤 하는데, 키튼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영화를 통털어서 나도 모르게 영화를 보는 도중 경이와 충격과 경악의 비명을 질러댄 영화는 <셜록 주니어>를 제외한다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ps2.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댔는데, 실은 그 전에 자는 도중 영혼이 몸을 이탈하는 장면에서부터 충격을 받았다. (다시 한 번, 이 영화는 1924년작이다.)

ps3. 이 놀라운 영화를 확인할 기회가 다행히 한 번 더 남아있다. 월요일(14일) 오후 8시에 무려 “현장 연주”와 함께 상영된다. 물론 나도 다시 볼 예정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4 Comments

  1. 필름으로 키튼을 다시 만나서 좋았습니다. 저도 월요일에 또 갈 듯합니다.

    • 버스터 키튼을 모른다 해도 밥먹고 생존하는 데엔 하등 지장이 없지만, 키튼과 그의 영화를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 중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
      이전에 특별전을 할 때에도 < 록 주니어>를 번번이 놓쳤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필름으로 보게 되어 저도 너무 행복했습니다. 다만… 금요일 상영 땐 오후 3시라 관객이 많지 않아서, 어째 분위기가 썰렁하더라고요. 다들 (이심전심으로) 미친 듯이 같이 웃고 박수치며 봐야 더 재미있는데 말입니다. :)

  2. 개막식날 보았어요. 그 날은 영화제 첫날이고 살짝 들뜬 분위기였는데, 거기에 < 록주니어>가 틀어지니 약간 웃음의 도가니였다랄까요. 정말 ‘미친듯이 같이 웃고 박수치며’ 보았던 것 같습니다. 같은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같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 키튼에게 왠지 엄청 고마워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구요.. ☞☜… 우우우우 키튼 정말 최고 맞는 거같아요!!!!!ㅠㅠㅠㅠ(왠지 써놓고 보니 키튼 빠순이 같네요.) 흐흐흣 요약하자면 그냥 키튼 짱이예요 정도.. :)

    • 키튼의 영화는 정말 사랑스럽고 즐겁죠. 다음에 기회가 되신다면 키튼의 단편들과 다른 장면들도 꼭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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