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칠인 | 뜨거운 것이 좋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들은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화)마케터들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타겟 대상이 아니었다. 모든 영화들은 언제나 메인 타겟을 20대 초반에서 중반의 커플관객 혹은 남성관객들로 잡았고, 단 하나의 예외였던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애초에 다른 영화들만큼 큰 수익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고, 홍보에 있어서도 그리 큰 돈을 들이지 않았다. 즉, 티켓파워가 여성들에게는 미미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헐리웃에서 10대 소녀들의 티켓파워가 얼마나 센지, 그리고 얼마나 효율적인 이익을 거둘 수 있는지 파악한 이래 틴에이저 로맨틱 코미디물이 쏟아졌고(<쉬즈 올 댓>으로 시작했던 일련의 틴에이저물들을 기억하라, 여기엔 <브링 잇 온>,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열 가지 이유>처럼 아주 매력적인 작품들도 포함된다), 곧 틴에이지물은 나름의 고유한 시장을 확보했다. 이제 국내에서는 최근 몇 년간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심지어 30대 중후반까지도 아우르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됐다. 이들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재개봉하여 장기상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 2>를 성공시킨 기반이 되었으며, <오만과 편견>의 알찬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다.

뜨거운 것이 좋아

다양한 세대의 세 여자 이야기로

대학을 졸업해 직장을 갖는 게 당연하고, 그렇게 번 돈을 자기자신을 위해 쓰는 게 너무 당연해진 20대 여성층은 매우 까다로운 입맛으로 대상을 고르는 대신 한번 선택한 대상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충성도를 다짐한다. 이들의 까다로운 입맛은 문화 및 예술 전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안목을 기반으로, 롤 모델 없이 더욱 경쟁사회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아가 성공하기 위해 가상의 롤 모델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게 되며, 현대의 ‘성장동화’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대중문화, 특히 영화가 이 영역을 일부나마 담당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혹자들은 이 여성들의 요구를 ‘된장녀들의 된장질’이라 폄하하지만,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하룻밤에 몇백씩 뿌리는 취향보다야 훨씬 고상하고 생산적이며 창의적이다.) 이제 지금의 영화 마케터들은 이제 10대에서 30대 초바 범위 내에서, 커플관객 혹은 여성 관객을 메인 타겟으로 잡는다. 당연히, 이 영화들은 과거처럼 사랑에 목숨걸며 지고지순한 헌신과 희생을 다 하는 여자주인공을 그리지 않는다. 이제 우리 여자주인공들은 사랑도 중요하지만 일은 더 중요하며,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계기를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로는? <싱글즈>는 매우 선도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남성감독이 여성들을 이해하는 척한다는 일각의 불쾌해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은 <싱글즈>를 이 정도만도 어디냐며 감지덕지 받아들이며 자신의 은밀한 애정작으로 꼽는다. <싱글즈>는 직장여성이 겪는 애환 – 성희롱을 포함해 주로 남성 상사에 의한 부당한 권력횡포 – 을 상당히 상투적으로, 그러나 속시원하게 그려낼 뿐 아니라 결혼과 일에 있어 둘 다 가질 수 없는 현실, 그렇기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강요된 선택지를 드러내는가 하면, 그러한 여성들의 작은 복수와 연대를 그려내고, 아울러 섹스와 미혼 출산에 대한 여성의 선택까지도 묘사한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아미(김민희)를 중심으로, 그녀의 언니 영미(이미숙)와 조카 강애(안소희)의 연애를 다룬다. 물론 20대 후반으로 아직 자기 기반이 불확실한 아미의 경우 자신의 ‘일’과 관련된 에피소드에도 강하게 무게를 부여하긴 한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은 모두 아미가 여관방에서 혹은 영화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모습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보면 어느새 일은 뒷전, 그녀는 두 남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연애 얘기만이 스크린을 채우기에 바쁘다. 영미에겐 폐경기의 딜레마가 부여되긴 했지만 이것은 경수와의 관계를 좀 더 불안정한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만 기능할 뿐이며, 강애의 에피소드는 오로지 사랑에 집중돼 있다. ‘뜨거운 것이 좋아’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세 여자는 모두 너무나 ‘쿨한’ 사람들이다. 물론 아미의 경우 바람 피우는 현장을 들킨 남자에게 피의 매질을 가하고, 술주정을 하거나 방에 틀어박혀 혼자 소주를 까며 폐인노릇을 하는 등 쿨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행동들이 다수 나오기는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술김이라곤 해도) 원나잇 스탠드를 감행하고 오히려 승원(김성수)에게 들러붙지 말라고 큰소리를 친다. 영미는 어떤가? 쿨하다 못해 차갑기 그지없는 그녀는 함께 밤을 보낸 경수(윤희석)에게 ‘내일부터 생까자’며 화대를 던진다.

뜨거운 것이 좋아

솔직히... 이쁜 애들은 그냥 남자들 돈 쓰는 걸로 만족해줬음 좋겠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틀린 생각이란 거 나도 안다.)

영미가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정은 이미 성취된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싱글맘으로서 어떤 힘든 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았는지, 그저 살아남은 것뿐 아니라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41살에 고등학생 딸이 있다면 20대 초중반에 아이를 낳았다는 건데, 그녀의 성공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구석이 많다. 강애는 어떤가? 강애의 학창생활의 묘사는 엄밀히 한국의 여고생의 모습이 아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은 강애처럼 한산하고 여유로운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며, 그렇게 아르바이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친구들과 어울려 돌아다닐 만큼 한가하지 못 하다. 영미는 아미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20대 후반 여성관객에게 ‘워너비’의 모습으로서만 기능할 뿐, 어떻게 그런 성취를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롤모델은 되지 못한다. 다만 강애의 에피소드가 만족스러운 것은, 이것이 현실과 동떨어져있기는 해도 내 조카 내지 딸의 세대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좀더 이상적인 미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호모포비아들이 이 대목에서 어떤 발작을 하든 난 신경쓸 마음이 없다. 강애의 선택과 행동은 ‘이상적인’ 것 맞다.)

좀더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었던 <싱글즈>의 나난과 동미와 달리, <뜨거운 것이 좋아>의 아미는 손쉬운 상상과 판타지에 근거한 인물이다. 아무리 1년간 잘 안 풀리는 커리어 때문에 고생했다고 해도, 아미의 커리어는 그래도 큰 어려움없이 매우 손쉽게 풀려나가는 편이다. <싱글즈> 시대보다 더한 경쟁과 생존위기에 직면한 – 이른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이 될 정도로 – 지금의 여성들이 과연 아미를 보며 얼마나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싱글즈>에서의 나난과 동미 역시 현실적이지 않으며 다소 ‘판타지’에 속해있는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현실에 한쪽 발은 디디고 있으면서 그 현실과 상당히 밀접한 애환, 그리고 바로 그 현실에서 근거한 판타지를 제공해줬다. (남성 상사에게 동미처럼 ‘맞장 뜰’ 배짱을 가진 여성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바로 그 ‘액션 플랜’의 순간 여성관객들이 느꼈던 속시원한 대리만족감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 남성 관객들은 짐작도 못할 것이다. 혹은 임신한 동미에게 ‘내가 애 아빠가 돼줄게’라고 말하는 나난의 말이 준 위안이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도.) 하지만 아미나 영미가 제공하는 판타지는, 너무 쉬우며, 자신들이 얻는 것에 대한 대가도 별로 치르지 않는다. 현실과 완전히 괴리돼 판타지 수준도 아니고 ‘공상’ 속에서 둥둥 떠다니면서 현실적인 척하는 아미를 보는 건 대리만족감이나 속시원함보다는 비참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뜨거운 것이 좋아

예쁘다, 미숙언니.

다만 <뜨거운 것이 좋아>가 빛나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너무나 중요한 ‘리듬감’이다. 근래에 한국영화에서 이토록 ‘치고 빠지고’의 리듬감이 훌륭하고 생기발랄한 영화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씬을 자르고 붙이는 일련의 연출 감각이 아주 리드미컬해서 흠잡을 만한 군더더기는 별로 보이지 않으며, 그래서 인물들에게 공감할 순 없더라도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싱글즈>보다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기술적으로 더 완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싱글즈> 쪽에 더 애정이 가는 것은, <싱글즈>의 인물들이 더 현실에 발을 딛고 있기 때문이다. 남성감독이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는 데에 있어 함부로 여성의 욕망을 재단하고 제한하는 것, 나아가 멋대로 상상하고 그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로맨틱 코미디의 주요 타겟인 여성들에게 매우 불쾌한 경험이 될 수 있다.

ps. 김민희에 대해선 ‘괄목상대’라는 항간의 평에 대충 동의하는 편이지만, 이건 배우가 잘했다기보다 역시 연출 감각의 역량 덕분인 듯 보인다. 적절한 곳에서 자르고 톤을 조절한 능란한 연기 연출과 편집 솜씨가 눈에 띈다. 반면 김민희의 대사가 반 가량 알아듣기 힘들었던 것은 단순히 서울극장의 사운드 시스템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다른 배우들의 대사는 무리없이 알아먹을 수 있는 한.)

ps2. 이미숙이 얼마나 근사한 배우인가를, 제발 감독들이 인지하고 이를 잘 살려줬으면 좋겠다. 재수없고 정신나간 캐릭터가 될 수도 있었던 영미를 이토록이나 그럴 듯하게 꽉꽉 눌러준 데다, 그런 싸늘함이 ‘걸어다니는 카드로 이용당한 뒤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먼저 선수치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준 건 전적으로 이미숙의 공.

+ 2:00PM Jan. 2, 2008, 서울극장 2관, 기자시사회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7 Comments

  1. 95% 이상 공감되는 글이군요. 싱글즈를 못 본 터라, 권칠인 감독에 대한 찬사에도 그닥 동의하지 못했는데요… 연기만 본다면, 주연보다는 오히려 조연이나 상대역들의 연기가 더 빛을 발했던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흥수와 김범은 빼고 말이죠.

  2. 음.. 이미숙 팬입니다만(한국 여배우중 최고로 좋아하는 외모입니다. 한국에 장만옥.공리 같은 여배우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요.) 영화는 굳이 안 보러 가겠네요. 요즘 영화 거의 못 보고 삽니다만 – –

  3. 엔디 / 뭐, 김흥수야 계속 떼쓰는 캐릭터였고, 김범은 별 캐릭터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소녀들의 가슴뛰는 두근거림도 좋았고 이미숙의 그 날카로움도 좋았으니 어딘지 좀 낭비된 느낌, 그래도 권칠인 감독의 연출감각만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sang / 좋은 배우들이 ‘낭비’되는 경향이 뭐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 거운 것이 좋아>의 경우 이미숙의 더 많은 면들을 보여주고 있긴 합니다.

  4.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 참 미지근한 영화더군요. 영미와 아미의 사랑은 뜨겁지도 쿨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침드라마식 신파적 애정관’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크나큰 실망을 안고 극장을 나섰답니다(역시 < 글즈>의 팬으로서 말이죠). 쿨하고 칼 같고 육체적 교류에 경도된 커리어우먼의 애정관은 이미 10년 전에 < 녀들의 저녁식사>에서 강수연이 보여줬던 거 아닌가요? 극중 영미는 10년 전의 강수연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거기에 ‘폐경’ 같은 우중충한 상황을 덧입혀 놓고 폐경기 우울증에다가 상대 남자의 뜻밖의 진정성에 마음이 움직여 영미의 쿨한 가오가 결국 무너진다는 이야기. 아…짜증 지대롭니다. 아미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다른 건 둘째 치고, 아미는 오승원(김성수)와 잘 되면 안되는 거였을까요? 아미 같은 여자는 상류층 부르조아하고는 결국 안되고 옛 사랑으로 회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성취를 위해 매진하는 모습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미 같은 캐릭터가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길일까요? 오히려 승원 같은 남자와 아미같은 여자가 잘 되는 방향으로, 신데렐라스럽지 않게, 쿨하고도 뜨겁게, 그렇게 이야기를 꾸몃으면 더 보는 재미가 있지 않았을까요? 이 영화에서 아미 이야기야 말로, 원단 ‘아침드라마’였습니다^^

    < 글즈> 이후에, 이미 우린 < 스 앤 더 시티>와 < 기의 주부들>과 < 레이 아나토미> 같은(메디컬 드라마지만 이것도 만만찮은 애정극지요), 도시 여성의 성과 사랑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봐버린 것이죠. 차라리, ‘영미는 선수의 탈을 쓴 애송이 순진남을 뜨겁게 요리해먹은 후 쿨하게 인생을 가르쳐주는가’, ‘아미는 어떻게 회계사를 요리하여 ‘순수하지만 꼬질한 사랑’ 이상의 새로운 사랑의 전망을 세워가는가’ 따위의 이야기가 되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강애의 동성애코드는 참으로 어이가 없을 정도였는데, 걍 호기심 많은 여고생의 상큼한 첫경험 이야기로 스트레이트하게 달려갔어야되는 거 아닌가 싶고…요즘 세상에 그런 뜨뜨 미지근한 이야기로 승부를 보려 들다니 작중 주인공들 처럼 너무 순진하신건지 원…암튼 돈이 아까웠다는…김민희의 연기는 뭐 그럭저럭 괜찮앗지만 그 헤어 스타일은 영 아니더군요. < 글즈>의 나난 같은 숏커트 스타일에서 뭔가 새로운 컬러를 찾아냈어야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개인적으로, 모든 주인공들에게 별로 눈길이 가지 않았고 오히려 강애 친구로 나오는 신인배우에게 눈이 반짝, 사심이 생기더라는^^;;;;(그러고 보니 그녀야말로 나난의 헤어스탈이더군요)

    • 얼마 전 < 의주도 미스 신>에서도 그렇지만, 요즘의 ‘여성의 자아찾기’란 남자를 거부하고 일을 선택하거나 유학을 가는 것, 이라고 거의 공식으로 굳어진 듯하더군요. 뭐 < 글즈> 때야 유학비 다 대준다는 남자를 거절하고 지 힘으로 일해보겠다는 게 꽤 혁명적인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요즘 영화들마다 다 그러니 슬쩍 짜증이 나더라고요. 일도 사랑도 다 똑 따먹으면 안 되나? 싶은. 게다가, 남자가 지 좋다고 덤벼들고 지도 좋아하는데, 말씀하신 대로 승원이랑 왜 연결되면 안 되는지… 더 안습인 건, 그런 게 쿨한 거고 멋진 거라고, 마치 영화가 가르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40대 남자감독이 20대 여성에게 여성의 주체성을 가르친다? 이건 너무 재미없어요;;;

      전 강애 에피소드 재미있었어요. 다만 아미 이야기의 곁다리로 그렇게 들어갈 게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단편으로 만들었다면 더 좋을 뻔했을텐데 싶더라고요.

  5. 말씀하신대로 ‘자신들이 얻는 것에 대한 댓가도 별로 치르지 않는’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그게 다 영화니까 가능한 일이라는 거 다 알지만 상대적으로 갑자기 허무해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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