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 페라라 | 복수의 립스틱

Ms.45

'총'을 든 '여인'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존재.

<복수의 립스틱>이란 국내판 제목은 ‘미스 45구경(Ms.45)’이란 원제와 영 거리가 멀지만, 한글제목을 지은 사람이 느꼈을 난감함이나, 대체 왜 저런 엉뚱한 한글제목을 붙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나 역시 오래 전 화질 나쁜 싸구려 비디오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주인공 데나(조이 태머리스)가 그 커다란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르는 장면에서 꽤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의미심장한 장면이기도 하다.) 눈 사이가 살짝 멀고 입이 대단히 큰 조 태머리스의 얼굴은 화장을 하기 전에는 어린아이의 얼굴 같다. 처음엔 촌스럽기 그지없던 헤어스타일과 지극히 평범한 옷에 화장 없는 맨얼굴을 한 거의 ‘무성(無性)적 존재’이던 데나는 총을 손에 넣고 ‘복수의 천사’(Angel of Vengeance는 이 영화의 다른 제목이기도 하다)가 된 후 짙은 스모키 눈화장과 함께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여성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옷들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몸매를 강조하는 딱 달라붙는 옷, 가죽바지, 길게 흘러내리는 망토 등.) 저 붉은 립스틱 바르는 장면이 그토록 인상적으로 강조된 것도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이는 여성성을 극단화시켜 표현해내는 한 가지 과정임과 동시에, 립스틱의 생긴 모양 자체가 남성 성기의 은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는 신체의 연장이며 총은 대체로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은유물로 제시되는 경향이 많은 만큼, 본격적으로 권총을 든 여성의 모습이 지독하게 어색하여 기묘한 불균형을 일으키거나, 지독하게 섹시해 보이거나 둘 중 하나이기 마련이다. <복수의 립스틱>의 경우 총=남성 성기라는 은유를 노골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권총, 즉 남성 성기를 손에 쥔 소녀의 어색함과 섹시함을 아벨 페라라가 유머 감각을 가지고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 조잡한 화면에서도 야수성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하면서도 장면장면 어색하고 멋쩍은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데나에게 있어 난처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여성성을 각성하게 된 계기가 두 차례의 강간 – 성적 행동에 있어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 – 이라는 사실이다. 총이 남성 성기의 상징이라거나 하는 말을 헛소리라 여길 사람들도, 그녀가 이후 길거리 혹은 카페에서 애무를 벌이는 커플들의 행동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몰입한 채 쳐다보는 씬들이 가지는 의미에는 분명 동의할 것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아벨 페라라의 진짜 목적은 섹시하고 몸매 좋은 언니가 여기저기 총을 쏴대는 모습 그 자체를 담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강간 역시 그저 언니 손에 총을 들려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만큼 언니가 너무 총 쏘는 데에 매혹돼 있으셔서… 하지만 이 총이 가지는 에로틱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언니의 그러한 몰입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남근이 ‘힘’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리고 ‘총’의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 이 힘이 주는 쾌감(당하는 자가 아닌 가하는 자로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최대치로 만끽하며 그 힘을 행사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어지는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가 강간 피해자이기 때문이며, 남성들이 세운 사회적 윤리에 포섭되어 있지 않은, 아주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강간은 성행위가 아니라 성적 행위를 빙자해 권력의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Ms. 45

이랬던 여자인데...

Ms. 45

이러고 있다.

그녀는 우리가 늘상 보아온 영화 속의 여주인공들처럼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러한 행위 자체를 약간 다른 버전, 보다 상징화된 버전이자 그 폭력성을 좀더 직접적으로(남성들이 이해할 만한 코드로) ‘재현’(이번에는 자신이 가해자가 된다)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자신이 접했던 그 ‘힘’의 파괴력을 확인하고 만끽하는 것이며, 나아가 2) 이 힘을 통해 남성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응징’을 내리는 한편, 3) 말하자면 ‘악을 악으로 정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제의가 되는 것이다. 할로윈 파티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그녀가 선택한 복장은 수녀복이며, 총알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는 행위로 그 제의를 준비한다. 그녀에게 착한 남자 / 못된 남자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으며, 그녀의 총은 바람둥이건 상습적인 성폭력범이건 견실한 연인이건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쏘지 않는다. 명탐정 님이 지적하신 대로, 그녀는 할로윈 파티에서 신부로 변장한 사람의 성별을 처음에 구분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린다.

Ms. 45

수녀복, 화장, 노출, 그리고 권총. 언니, 너무 섹시하셈. (특히 저 팔선을 보라.)

80분의 이 짧은 영화는 결국 데나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애초에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총을 들이댔던 남자들은 ‘소리지르면 죽인다’는 말을 반복하고, 두 번째 강간범은 처음엔 ‘소리 지르면 죽인다’더니 이번에는 말을 하라며 다그친다. 경찰을 찾거나 주변 인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대신, 그녀는 스스로 복수의 천사가 되는 방법을 택했다. 딱히 주변인물들이 믿음직하지도 않다. 회사의 남자 상사는 결국 그녀에게 추근대며, 이웃집 요란한 주인 아주머니는 자신의 개를 데나가 죽인 줄 알고 방을 뒤지며 ‘마녀!’라는 욕을 반복하니까.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그녀의 일련의 모험은 결국 할로윈 파티에서 피의 향연과 함께 마감된다. 파티에 온 남자들에게 총을 쏴대던 그녀는 그녀가 그렇게 응징하려 했던 남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직장 동료인 여자의 손에, ‘칼’로 찔려 죽는다. (심리학에서는 칼 역시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해석한다.  게다가 이 여자가 칼을 쥐고 있을 때의 자세라니.) 가부장적 덫이 얼마나 치밀한지, 그 안에서 가부장적인 시스템에 가장 가부장적인 방식으로 맞선 여성이 결국 어떻게 파멸해가는지는, 더없이 가부장적인 마초 감독이야말로 가장 탁월하게 그려낼 수 있다. (내가 이래서 지가 마초인 줄 아는 찌질이가 아닌, ‘지대로 마초’들을 사랑한다.) <복수의 립스틱> 역시 마찬가지다.

ps1. 주연을 맡은 조이 태머리스는 이후 결혼하면서 남편의 성을 따라 이름을 조이 런드(Joe Lund)로 바꾸었는데, <악질경찰>에서 아벨 페라라와 함께 공동 각본가 이름에 오른 그 조이 런드이다. <악질경찰>에서 단역으로 출연도 한다. 조이 런드는 마약에 의한 심장마비로 1999년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ps2. 극강의 블랙유머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저 심각하게만 보고 있는 사람들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유머감각을 ‘과시하면서’ 히스테리컬하게 과장된 웃음을 연이어 터뜨리는 사람들은 거의 증오한다. 18일 금요일 이 영화 상영때 뒷좌석에서 한두 번도 아니고 그렇게 미친듯이 웃어대던 인간들. 앞에서 옆에서 그렇게 눈치주고 짜증을 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 그 ‘잘난 영화감각’을 그렇게까지 과시를 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니들이 어려서 그런 거라면, 그 나이 땐 잘난척하고 과시하고 싶은 거 이해하니까 그나마 용서가 되는데, 나이를 처먹고도 그런 거라면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내가 조이 태머리스한테 그 45구경 총 뺏어서 니들한테 쏴갈기고 싶었던 거, 니들은 아니?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하셔. 내가 왜 니들의 그 웃음에 의한 특정한 해석을 강요받아야 하니? 내가 왜 그냥 ‘피식’ 웃고싶은 그 장면들에서 니들의 ‘우하하하’를 강요받으며 잡음이 섞이는 걸 감수해야 하니? 니들의 그 웃음이 그 조잡한 영화 중에서도 가장 조잡한 요소였다는 거, 아니?

ps3. 1월말인지 2월에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리벤지 45>라는 영화가 개봉되는데, 아무래도 <복수의 립스틱> 리메이크가 아닌가 싶다. <리벤지 45>의 원제는 <.45>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4 Comments

  1. 안녕하세요~ 늘 읽고만 가는데 ps가 너무 공감되어서 글 남깁니다. 저랑 같은 시간에 보신 것 같은데 그 뒷자석에 남녀 특히 여자 웃음소리 정말로 거슬렸어요. 전 가까이서 보면 화면이 어른거리고 멀미가 나서 보통 뒷좌석을 선호하는데 그날은 뒷쪽에 앉은 걸 정말 후회했었죠. 영화보면서 웃는 건 자유니까, 라고 넘기고 싶어도 너무하더군요. 제 뒤에 앉은 남자분은 그들에게 에이 씨~ 어쩌구 욕하시던데 남에게 피해라는 걸 그 둔한 사람들만 모르던 것 같더군요. 과시하고픈 유머감각의 1/100만 센스가 있었어도 그러진 않았을텐데 말예요.

    < 질 경찰>의 조이는 같이 마약하던 그 여자던가요? 김성욱 프로그래머도 말씀하셨지만 왠지 없는 대사였을 것만 같은데 또 모르겠는 그 마약하던 장면에서의 여자 대사 엄청 웃겼거든요.

  2. 아, 덧글 달고 나서 < 질 경찰> 읽었더니 거기에 조이 태머리스에 관해 첨언하셨군요. ^^

  3. 같은 내용이면 더 예쁜 언니 판으로 볼까 싶어서 조금 디벼봤는데,
    imdb 보니까 mrs.45 랑 .45 랑 내용이 전혀 다르다네요…
    귀찮아서 잘 읽지는 않았지만, mrs.45 는 가정 폭력이 어쩌구…

    어쨌든, 아쉽네요.(;;)

  4. sesism / 저랑 같은 회차에 보셨군요. 어떤 남자분이 소리내서 짜증내며 경고하는 소리도 들었는데, 뭐 영화 내내 계속되더군요, 그 웃음 퍼레이드는. 무슨, 초딩 교실에서 ‘선생님 저요저요 저 다 알아요’ 하는 애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뭐 그리고서 영화 끝나고 자기들끼리는 어디서 ‘저 웃기는 영화를 사람들은 왜 심각하게만 볼까’ 어쩌고 하면서 잘난 척 하고 있었겠지요. 안 봐도 디비딥니다.

    괴인k / 확인해 보니 내용이 다르더군요. :) 근데… < 수의 립스틱> 원제가 Ms.45이고, < 벤지 45>는 .45랍니다. 잠깐 헷갈리셨나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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