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루마키 카즈야, 마사 유키 | 에반게리온 : 서

Evangelion 1.0: You Are (Not) Alone

과연 당신은 혼자일까? 아닐까?

‘에바 세대’라는 말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국내에서도 뜨거운 신드롬을 일으켰던 일본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새로이 극장판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번에 개봉된 <에반게리온 : 서>(이하 ‘서’로 표기)는 3부작으로 구성된(마지막 3부는 다시 상/하 편으로 나뉠 예정) 극장판의 첫 편. 신지가 신도쿄 제3지구에 있는 요새도시 네르프(UN 직속의 전투기지)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도달해 곧바로 에반게리온 초호기에 탑승해 4번째 사도와의 전투를 치르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신지는 <에반게리온 : 서>에서 4번째 사도에서부터 6번째 사도까지, 총 세 번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전 블로그에서 언젠가 밝힌 적이 있지만 나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열혈팬도 아니었고, 신지 녀석의 징징거림에는 극단의 짜증으로 반응했으며, 게다가 이 시리즈가 실은 아이들의 소영웅주의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애정결핍증을 이용해 먹으며 아이들을 최전선으로 내몰고는, 아이로서는 당연한 두려움과 회피를 오히려 비겁한 것으로 단죄하며 심지어 죄책감까지 심어주면서 결국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희생을 착취해 먹는 스토리라며 분노를 표한 적이 있다. 나아가 이 시리즈가 실제로는 은비학의 요소들을 얼렁뚱땅 얄팍하게 끌어모아 놓고 그걸로 어떤 깊이를 담보하는 듯한 모습에 냉소를 하는 편이다. 이 시리즈가 실제로 의미를 갖는 건, 현대 사회에서 소통의 단절을 겪으며 점점 자신의 내부로만 침잠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고독을 은유한 이야기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니까.

12년 만에, 극장판으로 ‘재정비’된 <서>의 경우, 이전 TV 판에서 느꼈던 짜증이나 비판적인 지점을 어느 정도 상쇄를 해준다. “안노 이 자식, 또 우려먹는구나.”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극장에 몰려간 에바의 팬들에게 이 영화는 분명 의미 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서>가 TV 시리즈를 다시 편집하고 정비하면서, 오히려 이전 TV 시리즈에서는 갖지 못했던 어른스러움과 성숙을 획득해냈기 때문이다. <서>는 분명 TV 시리즈 버전의 장면들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TV 시리즈의 내용을 축약한 뒤 때깔만 업그레이드한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소심하다면 소심할 수 있는 신지의 바보짓을 매회 보면서 짜증을 느꼈을 사람이라도, <서>의 압축된 버전은 신지가 예전만큼 바보스럽게 굴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가 내보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을 한 것이라고, 설득을 당하게 된다.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아버지한테 불려오자마자 거대한 인조인간 병기를 타고 무시무시한 전투에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14살짜리 아이라면 누구나 신지처럼 반응할 수 있다. 게다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타인과 관계맺기에 서투르기 짝이 없는 사춘기 소년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신지는 자신의 처한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모종의 책임감과 함께 적응할 뿐 아니라 오히려 레이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성숙한 소년이 되어 있다. 신지의 아버지인 겐도에게 확실하게 딸로 자리매김된 레이를, 신지는 질투를 하면서도 진심으로 걱정한다.

Evangelion 1.0: You Are (Not) Alone

희대의 찌질 지존, 사람 되다.

TV 시리즈에서는 어른들, 예컨대 겐도나 미사토 등등의 캐릭터들마저도 실은 어른의 모습을 한 아이들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서>에서는 확실히 어른이 되어 있다. TV 시리즈에서는 미사토가 신지의 징징거림에 많이 휘둘린다는 느낌이었는데, <서>에서는 신지가 처음 징징거릴 때 바로 “정도껏 해, 하기 싫으면 그냥 가.”라고 단호하게 잘라버리며 선택과 책임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아서 훨씬 좋았고, 그러면서도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를 위하는 모습이 함께 보이니 훨씬 더 어른다운 처신이란 생각이 든다. 겐도도 마찬가지. 여전히 냉혹한 아버지인 건 분명하나, <서>에서 그는 진심으로 ‘딸에겐 팔불출의 애정을, 아들에겐 자신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기대를’ 하는 전형적인 권위있는 아버지가 돼 있다는 느낌이다.

결국 <예반게리온 : 서>에서 인상깊은 것은, 원소스가 같다 하더라도 확실히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체 작품의 퀄리티가 확 달라지고 캐릭터들이 훨씬 더 성숙하고 입체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또렷이 보여준다는 점이라고 해야 하나. 그림과 사운드가 월등하게 좋아진 것이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변화보다는 캐릭터들의 변화가 훨씬 더 크게 다가왔고, 그렇기에 이전엔 결코 좋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조금 더 안쓰럽고 짠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에바 세대의 일원이었을 뿐 아니라 굉장히 광폭하게 에반게리온에 몰두했던 청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J.는 함께 이 영화를 본 뒤 결국 다시 TV 버전을 찾아봤다는데, 나는 TV 버전은 절대로 다시 보지 못할 것 같다. 다만 <에반게리온 : 서>에 대해서만큼은 분명 좋은 평가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극장판 2편인 <파>에 대해선 <서>와 달리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가 보게 될 것 같다.

ps. 부산영화제 때 폐막식 기자시사에서 일찌감치 이 영화를 본 터라 개봉을 앞둔 기자시사회에는 따로 가질 않았는데, 결국 J.와 함께 보느라 CGV대학로에서 다시 보게 됐다. 에바 팬도 아닌 주제에 두 번이나 영화를 보면서 결국 두번째엔 중간에 깜빡 졸았는데, J.는 내가 졸았던 그 부분 – 미사토가 신지를 리리스 앞에 데려가는 장면 – 이 미사토나 겐도 등의 어른들을 더욱 어른스럽게 제시하는 장면이라고 강조한다. 어른들이 그저 아이들을 최전선에 내놓고 죽이려 드는 게 아니라 자신들 역시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나. 하지만 개봉해 있는 동안 열 번이고 다시 볼 거라는 J.와 달리, 나는 이 영화를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

ps2. TV 시리즈를 재작년에 다시 봤을 때 의외로 ‘아스카’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되며 응원을 했었는데, <서>에서는 그의 존재가 암시만 될 뿐 직접 나오진 않는다. 과연 <파>에선 어떤 모습으로 나오게 될지 기대 만발. 아울러 <서>의 막판에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낸 카오루의 경우, 과연 어떻게 새로운 캐릭터를 입게 될지도.

ps3. E양이 쓴 그대로, “모름지기 소년은 신화가 되거나 달을 향해 날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우타다 히카루 버전의 엔딩곡이 아무리 달달한 훅이 많은 팝이라 해도 여전히 적응이 안될 뿐 아니라, 새삼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라고 외치던 주제가가 그리워졌다는.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7 Comments

  1. 그렇게도 볼 수 있군요. 전 릴리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극적으로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지를 출격시키기 위한 설득과 릴리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오히려 그 장면은 극중 인물을 위한 장면이라기보다는 관객을 위한 장면이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에반게리온 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떡밥’인 셈이죠. 이르긴 하지만, 인류 보완 계획과 관련해 실마리가 되는 정보를 관객에게 제시는 해야겠고, 또 TV판과는 다른 설정이 있음(TV판에서 미사토는 릴리스의 존재를 한참 동안 모르고 있었고, 보고 난 뒤에도 줄곧 그것이 아담인 줄 알았죠)도 알려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어설픈 연출이라고 보았습니다.

    • 기능적으로는 인류보완계획 등등에 대한 정보 전달과 떡밥을 던질 목적의 씬이었겠습니다만, 애한테 무작정 나가서 싸워라, 가 아니라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어른들이 아닌 너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어른이란 존재가 아이들 생각하듯이 그렇게 모든 걸 다 완벽하게 해내는 존재가 아님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아이에게 설명을 하는 씬, 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 캐릭터들이 정말 어른임을 보여주는 장면, 이라는 거죠. 근데 저는 정작 그 장면에서 졸아버려서 말이죠… ;;;

  2. 저 역시 에반게리온 오덕후(이런 표현이 걸맞는진 모르겠지만)로서 극장에만 두 번 갔네요. 우타다의 엔딩 싱글음반에 OST까지… 백수 신세에 제대로 지름신께서 받춰 주셨다는…
    초창기 TV판, 97년도 극장판하고 비교해 보자면 N. 님께서 언급하신 그 부분은 [서]에는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지 않았으려나 싶었습니다. 첫번째 볼 때도 그랬는데 오늘 볼 때도 그랬거던요. 그리고 다섯 번째 사도를 쓰러뜨리고 가출하고 돌아온 뒤의 미사토와 신지의 대화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역시 묘한 단절감을 주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전의 작품들에서는 한없이 숨어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던 신지에게 “자신의 두 손, 어깨에 얹어지는 책임감”을 명확히 해 주고 진정한 히어로(왠지 표현이 수상하다는)가 되도록 해 주도록 만드는 미사토의 멘트에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는…
    [파]가 언제 국내에서 개봉할지 몰라도([서]는 지난 해 부산에서 보여주었군요. 역시 강사일을 하노라면 자유스럽지가 못해서… ㅜ,.ㅜ) 조조할인에 알라딘 티켓을 적절히 쓰면(어떻게든 일자리 다시 잡아서 책을 더 질러야겠지만) 밤을 새는 한이 있어도 보러 갈 생각입니다.

    • 아니, 트로츠키님도 에반게리온 팬이셨군요! 하하
      < >는 일본에서는 올해 여름에 개봉한다는데, 한국에선 어떨지 모르겠어요. < >도 일본에선 아마 작년에 개봉했을 겁니다. < >가 그래도 지금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니 분명히 수입은 할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저도 < >가 나쁘지 않아서 < >는 기꺼이 보러 갈 예정입니다.

      그나저나, 내일 < >를 한번 더 보러 갈 것 같습니다. 한 영화를 극장서 세 번째 보는 게 < 타워즈 3>(이건 뭐… 무려 일곱 번에 빛나는)랑 < 이하드4> 이후 오랜만이네요. (< 짜>랑 < 리비안 3>도 두 번이었다는.) 전 에바 팬도 아닌데 우째… 흐흐

  3. 신지의 찌질은 기존의 수퍼히어로들과의 차별이라는 관점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죠. 사실 좀 짜증유발이 되는 수준이긴 합니다만…^^

    • 사실 배트맨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애-어른인 것이고, 배트맨보다는 악당들(조커, 펭귄맨, 캣우먼 등등)의 유쾌한 정서 때문에 좋아합니다. 신지는, 극중에서는 14살이니만큼 당연히 찌질거리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현실적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니 극중 14살인 신지는 실은 20대, 30대의 현대 어른들을 표상하는 인물이고…. 아마도 신지의 찌질거림에 극도의 짜증을 보이는 사람들은, 저 포함해서, 실은 자신의 찌질함을 신지가 그대로 폭로해 버리기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더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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