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시사회 잡담

온라인을 이리저리 다니다가, 일반관객들이 의외로 기자시사회에 관해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기자시사회에 대해 잠깐 잡담을 늘어놓고자 합니다.


한국영화 시사회

기자시사회는 한국영화와 외화가 굉장히 다릅니다. 외화 기자시사회는 여느 일반시사회와 다를 바가 없어요. 반면 한국영화는 아무래도 공식적으로 영화를 첫 공개하는 자리이다 보니 취재진이 몰리기 마련이고, 화제작에 스타가 출연한다면 더더욱 그렇죠. 온라인/오프라인, 활자/방송 매체들이 총출동하고, 보통은 이때 감독과 배우들도 함께 영화를 보며 영화 시작 전엔 간단한 무대인사를, 영화가 끝난 후엔 기자들과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소위 기자간담회라는 행사도 하지요. 그렇기에 한국영화 시사회라면, 시간에 조금 늦었다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고 가는 편입니다. 어차피 무대인사 때문에 적으면 10분, 많으면 30분까지도 영화상영이 지연되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화려한 휴가>처럼 초미의 관심사가 된 영화의 경우, 저같은 듣보잡 기자 – 매체는 훌륭한데 기자가 듣보잡이다 보니 – 는 정시 시간 맞춰 갔다가 자리가 없다며 입장을 거부당하는 사태를 맞기도 하지만요.  (흑흑 실화입니다.)


무대인사, 눈치보기 및 탐색전

무대인사 때 영화의 질을 잠정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보통 영화가 잘 나왔다 싶은 경우는 감독도 배우도 굉장히 자신만만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유난히 ‘애정’과 ‘관심’ 나아가 ‘요즘 한국영화 어렵다’는 약간의 협박과 ‘우리 영화는 그냥 오락영화다’라는 변명이 강조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감독, 배우들이 의례껏 하는 ‘열심히 했거든요, 잘 봐주세요’ 하는 말을 좀 웃기다고 생각하지만(열심히 안 하는 배우, 감독도 있나요?), 생각해 보면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저런 말이라도 하는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어 일종의 관용어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기자들을 홍보도우미로 착각하고 있는 배우들을 보면 살짝 화가 납니다. 기사 잘 써달라고 애교 어린(?) 부탁을 하는 건까진 좋은데, 말이 더 나가서 ‘많이 홍보해주시고 입소문 내주세요’ 같은 말을 아무 생각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말은 일반시사 때 관객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죠. 아무리 영화사 사람들의 입장으로는 기사도 자신들의 광고의 장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자기들 속마음인 거고, 상대에게 그걸 공공연히 드러내는 건 예의가 아닌 거죠. 글로 먹고 사는 사람한테 ‘그래봤자 넌 우리 광고해주는 사람이야’라고 선언하는 말이나 다름 없는데 그런 말 듣고 기분 나쁘지 않으면 기자도 아닌 게죠. 하긴, 보도자료 그대로 베껴서 기사 쓰는 기자라면 그런 말이 별로 이상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건 기자가 타락한 거지, 기자란 기본적으로 펜을(요즘으로는 키보드가 되려나요) 칼처럼 들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기자간담회, 공격과 방어

기자간담회는, 역시 영화가 재미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오는 얘기도 갈립니다. 사실 저는 이 기자간담회 자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기자들의 질문도 뻔하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대답도 뻔하기 마련인데, 문자 그대로만 보면 뻔하고 의례적이지만 대단히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들도 간혹 있어요. 말하자면 예의바르고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말들이 실은 치열한 공격과 방어인 경우들이 있는 거죠. 하지만 별로 아닌 영화에 기자가 호들갑을 떨면서 막 칭찬을 해대거나, 수준 이하의 질문들이 나오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예컨대 <기담> 기자간담회의 경우, “정남(진구가 연기한 초짜 의사 캐릭터)의 머리칼이 왜 새는 거냐?”라는 질문이 나왔을 땐, 제가 다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해지더라고요. 물론 예컨대 <천년학> 때처럼 “영화가 전체적으로 좀더 밝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색감이 의도한 것 맞는가, 아니면 서울극장 영사기 렌즈가 의도보다 좀 어두운 것인가?” 같은 멋진 질문이 나오기도 하지만요. (네, 이건 서울극장에서 원래 의도보다 어둡게 영사된 게 맞다고 합니다.) 보통은 영화가 좋으면 감독에게 질문이 몰리고, 별로였으면 배우들에게 신변잡기에 관한 질문이 몰리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영화가 좋아도 (너무 좋아서) 질문 없이 썰렁~한 경우도 봤어요.


상영도중, 무매너 전쟁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여타 모든 영화관람 환경 중 기자시사회 때가 가장 개판으로 안 좋습니다. 일반 관객들의 눈에는 영화기자란 사람들이 영화보는 매너가 없다고 욕하기 쉬운 문제이긴 한데, 실제로는 좀 다른 시선으로 봐야 합니다. 기자시사란 게 아무래도 영화를 보는 거니 남들에겐 노는 걸로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들에겐 엄연히 ‘일’이거든요. 회사에서 언제 급한 연락이 올지 모르는데 전화기를 꺼버릴 수가 없는 거고, 영화 도중 전화가 온다면 받을 수밖에 없겠죠. 영화가 엉망이라면 앉아있는 게 고문이 되는 자리. 한 시간 반동안 꼼짝 못하고 화면만 봐야 하는데 그게 놀이가 아니라 일의 일환이라면, 자막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튀어나가고 싶은 게 사람 심리죠. 기자시사회장에는 핸드폰 불빛 켜고 시간 확인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여기 반짝 저기 반짝 반짝반짝 작은 별… 저도 요즘은 무작정 전화 꺼놓기가 무서워지기도 하고, 헐레벌떡 뛰어들어간 경우 전화기 끄는 걸 깜빡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리 이해가 가도 짜증나는 건 마찬가지.

파레토 왈,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거의 매일 시사회가 있는데 하루에 한 편 혹은 두 편, 많은 경우 세 편까지 보고나면 녹초가 되고(어제 오늘 연속 세 편씩 봤더니 아까 코피가 나더라는.), 가끔은 굉장히 고역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며, 분노만 가득 안고 시사회장을 나오게 되는 일도 허다합니다. (개봉하는 모든 영화가 다 좋은 영화일 리 없고, 행여 계속 며칠째 안 좋은 영화만 보다보면 급기야 폭발하기도 하고요.) 제가 <클로버필드>에 대해 영화 매체 자체의 폭력을 극대화했다며 그토록 격렬하게 반응한 것도 실은 이런 환경들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사를 쓰지 않더라도 일단 개봉되는 영화들은 되도록 많이 봐두려는 노력을 하다보니, 개별 영화보다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 그리고 지금 현재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이야기들의 경향과 시대의 흐름 같은 걸 더 많이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제껏 이 블로그는 주로 개별 영화의 감상문으로 채워졌지만, 앞으로는 아마 앞에 있는 경성에 관한 글처럼 개별영화를 넘어서서 여러 영화를 함께 다루고 경향성을 찾거나 하는 글도 자주 쓰게 될 거예요. 어쨌건 원래 영화 보고 글 쓰는 걸 좋아했고, 입을 댓발씩 내밀고 투덜대면서도 “나처럼 신선놀음하며 사는 사람도 없어”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매일 시사회 전선에 나가고, 좋았던 영화는 개봉한 후에 제 돈 주고 다시 반복해서 보기도 하며, 주말만 되면 “영화는 징글징글해!”라고 외치면서도 어찌어찌 시간을 쪼개서 아트시네마에 가서 이런저런 회고전이나 특별전의 영화들을 보고 있는 자신을 보노라면, 저 확실히 영화중독자 맞구나 싶습니다. 제게 영화는 여전히 ‘수줍은 소녀의 팬심’의 대상이 맞습니다.

ps. 앞으로 그 날 그 날 있었던 기자시사회와 관련한 가벼운 글들을 부정기적으로 연재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나의 즐거운 일기>의 영문제목을 딴 Dear Diary 카테고리로 분류될 예정입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8 Comments

  1. 저도 궁금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는데..;
    아.. 저렇군요.

    • 앗, 카님도 궁금해하시던 분들 중 한 분이셨군요. ^^

  2. 그치만 말이지, 영화에 대해 글을 쓸 때는 그냥 보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아? 다들 총명한가… 난 집중해서 보고도 머릿속에서 영화 정리하기가 쉽지 않던데. 영화에 대해 왈가왈부를 하려면 앉아서 보는 자리에서는 열심히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적어도 시사회에서 영화 보는 건 알리고 나왔을 텐데, 심지어 통화도 하잖아. 혹 받아야 할 전화가 있는데 시사회에 들어온 거라면 전화기 들고 나가든가. 다른 건 몰라도, 자기는 그때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영화에 집중할 수도 있다구. 엔딩크레딧 올라갈 때 뛰쳐나가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닌데 보는 동안 만이라도 제발… 하는 생각은 들어.
    그런데 요즘은 극장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게 추세야? 나 사는 데만 그런 건가(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겠다). 이제는 나아가서, 그냥 평소 목소리대로 대화하는 커플을 옆에 두고 영화 보았다오. -_-

    • 아마 상대적으로 영화잡지의 기자들은 저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대체로 일간지, 방송, 인터넷 쪽일 텐데, 그쪽 매체들 영화기사들은 아무래도 소개와 단평 위주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실 저렇게 이해하는 것도 그나마 짜증을 덜 내기 위해 스스로 이해시키려는 측면이 큰 거죠.

      그나저나 전 어제 시사회 가서… 영화 내내 푹 자고 나왔다는. 이런 일도 생기더군요. 자다가 코라도 골았으면 어쩌나 무지 쫄았다는…

  3. 무매너 전쟁터라…=_=;; 그렇군요..;

    다른 이야기지만,
    종종 영화를 보다보면 ‘인상적인 대사’가 나오는 데
    그 순간 어딘가에 ‘저장’하고 싶은데 하지 못해서 아쉬운 적이 많아요.ㅠ.ㅠ

    • 영화기자나 평론가들 중 일부는 그런 대사들 때문에 영화 시작부터 수첩과 펜을 들고 영화를 보기도 한답니다. 저는… 그냥 imdb를 뒤지고 마는 편이죠. 한국영화는 뭐 어쩔 수 없고요.

  4.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 특별히 환상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일반시사회보다 좀 시크(….)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무심결에 터지는 폭소나 야유도 조금 억누르는 분위기일 것 같고, 그런 걸 은근히 즐기는 저로서는 별로 재미가 없을 듯한….
    앞으로의 포스팅도 기대하겠습니당.

    팔팔할 중고딩 때는 절대 그러지 않았고, 지금도 마땅히 그러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저도 근래에는 가끔 영화 보다가 졸거나, 2개 연속으로 보면 다음 날 몸상태가 메롱이 된다거나 합니다;;(오늘이 그렇습니다. 어제 빈센트 미넬리 회고전에 다녀왔더니ㅜㅜㅜ) 이거 원 체력 보강이라도 해야지 이렇게 일도 아닌 취미 생활조차 제대로 못 즐겨서야…흙.

    • 대체로 인터넷 매체 기자들이 20대나 30대고 오프라인 매체들 기자들은 30대에서 40대들이 많으니까, 어떤 기자들이 더 많이 왔냐에 따라 분위기가 좀 달라지긴 합니다. 기자나 평론가들도, 그 전에 일단은 ‘관객’이니까요.

      빈센트 미넬리 회고전 갔다오셨군요. 여기에 포스팅까지 하고 그렇게 기대를 했는데도 이번 미넬리 회고전은 인연이 없는 듯해요. 마감이 닥친 원고 하나 때문에 주말에도 드라마를 몰아서 보고 있었다는… 근데 제가 평소 모토가 “영화, 하루에 두 편까지만!”인데, 서울아트시네마에 자주 오는 분들은 이 얘기 들으시면 오히려 재미있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전 정말, 두 편을 넘어가면 체력도 딸리고 영화 느낌도 섞여서 힘들던데, 안 그런 분들은 여전히 하루에 서너 편씩 쭉 연달아 보는 걸 당연하게 여기시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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