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 풍경, 2월 11일 ~ 14일

2월 11일.

<주노>, 대한극장 – 한국의 많은 여자들이 주노보다 배의 나이를 먹고서도 주노만큼의 처신도 못 하는 경우가 많은 건 이 사회가 편견에 맞서 내 식대로 살겠다 결심하기엔 너무 험악하고 터프하며, 여자들에게 특히 더 그러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선 <주노>가 코미디였을지 몰라도 한국에선 참 많은 여자들을 몰래 눈물짓게 할 영화가 될 게 틀림없다. 인터넷에서 더러운 방식으로 왈왈대는 남자들과, 애 낳는 날 운동복 입은 채로 뛰어와 주노를 꼭 끌어안아 주고 있는 폴리 사이의 간극.

<터질 거야>, 하이퍼텍 나다 – 좌석수도 많지 않은 하이퍼텍나다인데, 여기서 하는 시사회는 언제나 자리가 널널하다. 스크린이 좀 작은 걸 빼면 참 운치있는 곳이다. 예전엔 자주 다녔는데, 근래엔 시사회 아니면 거의 올 일이 없는 듯. 여기서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를 봤던 기억이 난다. 영화는 그저 그랬다. 자의식에 똘똘 뭉쳐있는 것도 별로인데 안 그런 척 하는 건 많이 짜증난다.

<매뉴얼 오브 러브>, 명보 – 3호선 을지로3가 역과 명보극장은 참 가까운데 이상하게도 출구에서 극장까지 5분이 넘게 걸린다. 이유가 뭘까. 자국에서 흥행폭풍을 일으키는 영화들은 분명 이유가 있고 봐두는 게 좋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나도 이토록 여유롭고 유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달달한 영화도 좋아라 하는 거 보면 역시 내 취향은 꼼짝없이 상업 기획 장르영화인데(이게 뭔 말이다냐), 종종 예술영화 애호가로 오해받곤 한다.

2월 12일.

<점퍼>, 용산CGV – 맨 앞에서 보려니 눈이 훽훽 돌아가두만. 조금 늦게 도착해서 허겁지겁 명함을 냈는데, 난 늦게 와서도 여유만만한 기자들은 이해를 잘 못하겠어;;; 마음은 급한데 앞에서 떡하니 막고는 시간 질질 끌 때는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다행히 예고편을 여러 개 상영해준 덕분에 처음부터 제대로 봤다는. 덕 라이먼이 원래부터 그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자기 작품 후속편의 폴 그린그래스 영향을 받았나, 컷을 너무 짧게 끊어 우다다 붙인 장면들이 많다. 액션씬을 이렇게 찍어놓으면 참 난감하다.

<밤과 낮>, 용산CGV – 사실 이 영화 때문에 DSLR을 낑낑대며 가져갔는데, 감독, 배우들이 베를린에서 아직 안 왔다고 그냥 영화상영만. 그러고 나서야 감독, 배우 안 온단 보도메일을 본 것 같아서 요즘 안 그래도 멍청한 실수를 연발하는 자신을 탓하고. 일반관객 시절엔 절대 볼 일이 없던 홍상수 영화지만, 지금 내 처지에는 개인적 호불호와 상관없이 봐야만 한다는. 영화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아니면, 홍상수 영화가 원래 30~40대 감성이었던 거거나. 아니면 내가 이제 남자들처럼 적당히 타락한 거거나.

<스파이더위크 가의 비밀>, 용산CGV – <매뉴얼 오브 러브>와 마찬가지로 일반시사의 자리 한 켠에서 본 것. 사람이 너무 없어서 상영관 맞나 하고 직원에게 물어봤을 정도. 아동 대상 판타지라고 하면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무조건 안 보는 경향들이 있나 보다. 이 영화는 분명 아동 대상, 그것도 저연령 아동층 대상이 맞지만 영화는 또 나름 훌륭하셔서. 이 집안에서 자발적 동의에 의한 가모장 가정이 완성되는 그 폭력의 순간이야말로 정서적으로 클래이막스 장면일 터이다.

2월 13일.

<3:10 투 유마>, 용산CGV – “3시 10분 유마행 기차”라고 제목을 붙였으면 더 좋았을걸. 이틀 연속 세 편씩 본데다 잠이 부족했더니 이 영화를 보면서 우왕ㅋ굳ㅋ 하면서 보는데도 계속 졸았다는. 이럴 때가 괴롭다. 재밌다고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정신차려 보면 깜빡 졸았고, 근데 존 시간은 길지 않았던지 장면은 그럭저럭 다 연결되고, 이게 계속 반복되고. 영화를 제대로 못 봤다는 느낌 때문에 짜증은 쌓이고 몸도 너무 힘들어진다. (차라리 푹 자버리면 몸은 덜 힘들지.) 제임스 맨골드는 딱히 팬은 아니고, 언제나 연출에 좀 문제있거나 지지부진해지곤 하지만 캐릭터를 워낙 잘 뽑아낸다, 라고 생각해왔다. 이 영화도 그런 듯. 난 모두가 좀 아니라고 하던 이 영화의 엔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가 추측하고 있는 헐리웃 영화들의 어떤 경향을 보여주고 있고, 그건 영화미학적 고뇌보다는 윤리적 고뇌의 결과라 생각한다. 하여간 다시 봐야 할 영화.

<연을 쫓는 아이>, 용산CGV – 한 30분쯤 보다가, 재미없던 것도 지루했던 것도 아닌데, 그냥 푸욱 자버렸다. 역시, 너무 무리하면서 시사회를 보러 다녀서도 안 되고(하루 세 편 이틀 연속이라니 내가 미쳤지), 그런 와중에 수면시간을 소홀이 해서도 안 되며(생각해보니 3시간 자고 나왔어, 이틀 연속 코피도 난 주제에), 반드시 커피를 먹고 극장에 들어가야 한다. (이 날은 몸도 피곤했던 주제에 커피를 깜빡했다는. 아무 생각없이 콩차를 사서 들고 들어갔다는.) 간만이다, 이렇게 푸욱 자버린 것도. 제대로 다시 봐야지 싶다.

2월 14일.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명보 – 저 쩜쩜쩜을 ‘그리고’ 다음에 붙였으면 더 좋았겠다 싶다. 기사 하나를 급히 쓰느라 <데쓰노트 L> 시사회는 패스하고, 이 영화는 워낙 칸영화제 수상작이라 반드시 챙겨봐야 한다며 보러 갔는데, 결국 5분 지각. 아쒸 사무실과 극장은 겨우 지하철 두 정거장,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인 데다 15분 전에 나왔는데 5분을 늦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눈앞에서 지하철 한 대 문닫는 걸 놓치고 다음 차 기다리는데 플랫폼에서 5분이 지나도 안 오더라고. 4호선은 3분 간격으로 제깍제깍 오는데 3호선은 종로3가 을지로3가 같은 곳을 지나는 주제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래도 영화는 좋았다. 이 단순한 얘기를 이렇게 단순하게 찍으며 픽스된 카메라로 롱테이크 씬 남발하는 주제에 어쩜 2시간 내내 조금도 지루할 틈없이 얘기를 끌어나갈 수가 있는 거지? @.@

애초 이 시리즈를 써보자 했던 직접적인 계기는 <어톤먼트> 시사회였는데,  그놈의 구정 연휴 때문에. 음, 근데 이런 게, 재미가 있나… 서너 번 더 해보고 재미없으면 때려칠 테야.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8 Comments

  1. 시사회 풍경이라..ㅎ 무언가 색다른 느낌이..?

    직업…때문인지는 몰라도, 영화 무지하게 보시는군요..와..=_=;

    • 시사회를 빙자한 잡담입니다;
      저렇게 시사회들이 몰려서 요즘 보고싶었던 빈센트 미넬리 특별전엔 전혀 못 가고 있습니다 ㅠ.ㅠ

      근데 하루에 영화 두 편, 세 편씩 꾸준히 보는 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체력이 너무 딸립니다.

  2. 다른 세상을 보는것같은 느낌. 호기심 만땅^^

    •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일터’ 풍경은, 모르는 사람에겐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긴 하죠. :)

  3. 재미없으면 때려칠 테야<-ㅋㅋㅋㅋㅋㅋ 아 놔....조낸 재미있다고 해 드려야겠다. 재밌어요! 이든이 보러 가고 싶은데 아직도 못 봤어요 점퍼!!!(<-미넬리 회고전 보느라 도리어 최근 개봉작을 거의 못 본 사람-_-) 영화가 재밌다고 생각하면서도 졸려서 의식이 희미해져 갈 때 정말 싫어요ㅜ 이젠 하도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다 보니 그냥 '좀 잤지만 내용 이해는 다 했고(참 신비로운 점 중 하나입니다) 좋은 영화였으니 됐지 뭐....'이러고 넘어갑니다. N.님은 아무래도 일이다 보니 그렇게 속 편히 생각하실 수 없으시겠지만요ㅎ 몸 관리 잘하세요! 코피 쏟지 마세요ㅜㅜㅜ 덧글 달 때 덧글창 위의 날짜가 초단위까지 움직이는 게 재미있네요~

    • 아마추어로 블로그에나 감상문 쓰던 시절에도 ‘제대로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선 감상문을 쓰지 않았는데, 소위 기자랍시고 글을 쓰는 건 더욱 마음에 걸리네요. 요즘은 시사회 가서 영화 보는 건 제대로 영화를 즐기고 감상한다기보다 ‘간을 보는’ 느낌이 더 커져서 한편으론 좀 우울하더군요. 영화들에게 미안한 느낌도 많이 들고요. 기자시사회 다니는 게 영화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그리 좋은 경험도 아닌 것 같다고, 요즘 종종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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