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개봉작 – 2008년 2월 넷째 주

아카데미 시즌의 정점이라 해야 할까요. 이번 아카데미상의 작품상 후보는 총 5편, 이중 작년에 이미 개봉한 <마이클 클레이튼>을
빼면, 나머지 4편 중 3편이 이번 주에 한꺼번에 개봉합니다. 세 편 다 날씬하게 잘 빠진 영화들인 데다 재미도 훌륭해서 별 이견없이 추천할 수 있는 작품들이에요. 세 편 다 이번
아카데미상의 주요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부문에 다 후보로 올라있죠. 8개 부문, 7개 부문, 4개 부문. 세 작품 다 각본상이나 각색상,
작품상, 감독상, 거기에 여우조연상이니 남우조연상이니 하는 상들까지. 하지만 제가 추천작 중에서도 추천작으로 꼽을 ‘이주의 추천작’은
아카데미상에서 고작 사운드상과 음악상 2개 부문에 만 오른 <3:10 투 유마>입니다.

작년에 한국영화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당장 생각나는 영화가 <기담>과 <스카우트> 정도밖에 안 되니까…)
헐리웃은 물건들이 쏟아진 해였던 듯. 아카데미상이고 골든글로브고 전미/뉴욕/LA 비평가협회고 다들 상 뽑으면서 신났겠다 싶습니다. 올해
한국영화들은 사정이 좀 나아지려나요. 나아지길 빕니다.

이주의 추천작

3:10 투 유마

3:10 투 유마

감독 : 제임스 맨골드 | 주연 : 크리스천 베일, 러셀 크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끊겨있던 서부영화의 맥을 잇는다는 홍보사의 자랑스러운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닌
영화이긴 한데, <용서받지 못한 자>는 사실 기존 서부영화를 배반하는 서부영화이기도 했죠. <3:10 투 유마>가 딱
그렇습니다. 멋진 영웅들이 활약하는 서부가 아니라, 야만적이고 지저분하며 잔혹한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서부를 배경으로 두 남자가 ‘적대적
우정’을 만들어갑니다. 서로 적이기에 결국 어느 한 쪽이 죽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짠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 우정이 기반하고 있는 곳,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 동의하게 된 어떤 지점은 상당히 미래지향적이에요. 결국 자식 세대를 위한 거니까… 만약 두 사람이 저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드는군요. 전 두 주인공이 결국 한 사람의 이면이란 생각을 합니다. 이 둘이 그토록 배려하고 구하려던 존재는 결국 댄의
아들, 윌리엄이고, 그래서 혹자들이 고개를 저었던 마지막 엔딩이 저는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살짝 늘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원래 제임스
맨골드는 플롯이나 미장센보다는 캐릭터, 그래서 캐릭터를 위해 플롯이 살짝 늘어지거나 망가지는 일이 제임스 맨골드 영화에 왕왕 있지요. 한번 다시 보고 긴 감상문을 쓰고 싶군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감독 : 이선 코언, 조엘 코언 | 주연 : 조쉬 브롤린, 하비에르 바르뎀

영화광들 사이에 코언 형제의 유머를 이해 못 하는 건 촌스러운 것이란 식의 스노비즘이 오랫동안 존재해왔습니다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코언
형제의 유머나 그들의 영화세계는 저와 맞지 않고 제 취향도 아닙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마찬가지,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이 영화의 완성도라는 건 정말 억 소리가 나오게 훌륭합니다. 영화 자막 올라갈 때 그저 ‘허허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는. 원래 존재하는 원작을 각색했다던데, 그럼에도 이 영화는 천상 코언
나라의 코언 영화. 그러면서도 뭐랄까, 과거의 코언 영화에서 한 단계를 또 훌쩍 뛰어넘은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뭐랄까, 숭고한 느낌이랄까.
원래 코언의 세계를 좋아했던 미국 평단이 이 영화에 그토록 호들갑떠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톤먼트

감독 : 조 라이트 | 주연 : 키라 나이틀라, 제임스 맥어보이

<오만과 편견> 감상문이 여기 뒤져보면 어딘가에 나올 텐데, 역시 전 조 라이트와는 맞지 않습니다. 특히 이 사람이 인물들의 심리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퀵줌을 쓴다던가 하는 식의 카메라 장난을 부릴 땐 거부감이 팍 들어요. 뭐랄까, 그런 식의 격렬한 카메라 움직임이 영화의 전체 분위기와 따로 논다는 느낌. 그럼에도 이 영화가 <오만과 편견>보다 낫다면, 그건 10대 초반의 소녀(브라이어니)의 성적인 호기심이나, 10대 중후반 소년 소녀(세실리아와 로비)의 에로스에 대한 그 미묘한 태도와 행동들이 아주 잘 묘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 연기도 아주 좋네요. 어린 브라이어니를 연기한 시어샤 로난(Saoirse Ronan, 전통 게일어 이름이라 발음이나 표기가 쉽지가 않네요. Shaoirse는 게일어로 ‘자유’란 뜻, 대강 seer-sha 내지 sur-shuh로 발음이 된답니다.)의 연기는 특히 빛이 납니다.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로 올랐던데, 아무리 아카데미 협회가 매년 욕을 먹는다고 해도 그래도 이 사람들 기본적으로 눈이 있단 말이죠. 원작소설을 사놓은 상태, 곧 읽을 예정입니다.

주노

감독 : 제이슨 라이트먼 | 주연 : 엘렌 페이지, 제니퍼 가드너

성과 사랑을 제대로 알기 전에 임신부터 덜컥 한 16살의 쿨한 소녀 주노의 아기낳기. 작고 재미있으며 감동적인 영화지만 미국에서 그렇게까지 열광했던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반은 대사, 나머지 반은 주노의 캐릭터와 엘렌 페이지의 매력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는데, 자막을 통해 접하는 우리로서는 대사가 주는 재미의 반은 날려먹을 수밖에 없죠. 주노의 캐릭터와 엘렌 페이지의 매력은… 물론 동년배들에게도 어필하겠지만,
제가 의심하고 있는 건 영화 속 마크가 그랬듯 3, 4, 50대 아저씨들한테 우리 식으로 하자면 ‘국민여동생’ 모드로 어필한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만두소희가 저 임신했어요, 하는 캐릭터로 나올 때 아저씨들의 반응이라 해야 할까. 물론 영화는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하게
감정변화를 묘사하고 있고, 바람직한 가족상도 보여주기 때문에 감동적인 것도 사실이지만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기냥저냥 나머지들

보딩게이트

감독 : 올리비야 아싸야스 | 주연 : 아시아 다르젠토, 마이클 매드슨, 오가룡

크게 보자면 현재의 연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과거의 연인을 죽이는 여자의 이야기. 그런데 이게 만만한 얘기가 아닙니다. 과거의 남자는 금융계의 큰 손이었으며 지금은 몰락의 위기, 거기에 꽤나 가학적이고 지배력이 큰 남자로, 과거 그녀에게 사업상 파트너를 접대(!)하도록 강제한 일이 있죠. 그녀는 더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의 지배력과 영향력 하에서 빠져나오기가 힘이 듭니다. 킬러이기도 한 현재 연인에게 저 과거의 남자를 처단해 달라는 청부살인 의뢰가 왔을 때 그녀가 참여한 건 어쩌면 돈보다도 과거를 끊는다는 이유가 더 강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영화보다도 장만옥의 남편으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의 노장 올리비야 아싸야스 감독의 신작. 약간 B스럽고, 저는 꽤 좋았는데 남에게 추천했다간 원성을 더 많이 받을 것 같은 영화로군요.

미확인 개봉작

아주르와 아스미르

감독 : 미셸 오슬로

미셸 오슬로가 처음으로 3D 컴퓨터 그래픽을 차용했다고 하던데, 일반시사회 일정까지 받아놓고 너무 피곤해서 결국 확인을 못 한 영화. 보고 싶어요, 흐윽.

나비두더쥐

감독 : 서명수 | 주연 : 판영진

지하철 2호선의 베테랑 기관사의 이야기. 지하철 2호선도 베테랑 기관사도 모두 제 관심을 끄는 소재들. 한동안 가보지 못했던 인디스페이스에 나들이 가야겠습니다.

내부순환선

감독 : 조은희 | 주연 : 양은용,  배용근

같은 이름을 가진 남녀의 엇갈리는 인연에 관한 얘기라고 합니다. 게다가 남자 주인공의 직업은 또 지하철2호선 기관사라네요. 역시 가서 확인해 봐야죠. 인디스페이스 개봉작.

데스노트 L : 새로운 시작

감독 : 나카다 히데오 | 주연 : 마츠야마 겐이치, 쿠도 유키

이전 <데스노트>도 만화도 보지 않아서,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들지만 감독이 나카다 히데오라고 해서 슬쩍 궁금증이 들었다가, 그러나 굳이 보러 갈 것 같지는 않군요.

IT 버블과 함께 잔 여자

감독 : 사토 후토시 | 주연 : 가네코 노보루, 마츠야 요코

현대판 신데렐라 얘기라곤 하는데 과거 원작소설 및 영화화 버전이 금융계 큰손과 엮이는 여자 얘기였다면 이번 리메이크는 IT업계 큰손과 엮이는 여자 얘기라고 합니다.

도발적 관계 : M

감독 : 히로키 류이치 | 주연 : 미원, 코우라 겐코

누구에게나 설정을 듣는 것만으로 보기 싫어지는 영화들이 전세계 영화의 반이라곤 하지만,  특히 성을 소재로 한 영화들의 경우 십중 팔구는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다보니 (뭐 명분이야 이것저것 잘도 갖다 붙이지만요), 이런 설정을 갖고 있는 영화는 줄거리만 들어도 일단 거부감이 듭니다. 뭐 정말 좋은 영화를 편견 때문에 놓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제가 가진 게 편견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픈 생각도 들지 않는 거 보면…

일렉트로닉 걸

감독 : 유보현 | 주연 : 안천문, 왕서기

설정은 좀 웃긴데, 역시나 제가 별로 재미있어 할 영화 같지는 않군요.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6 Comments

  1. 어디에 말하면 제발 알아들을까? ‘댓가’가 아니라 ‘대가’란 말이다!!!!!!!!!!!!!!!!!!!!!!!!!!!!!!!!
    인터넷 사전 한번 뒤지면 나오는 걸, 왜 안 하냔 말야! 그놈의 네이버는 검색어 순위랑 연예기사 볼 때만 가냔 말야!
    요 며칠간 얼마나 자주 ‘댓가’를 봤는지!!!
    저러고 영어 스펠 틀리면 창피해하지. 창피해할 거면 둘 다 창피해하고 무심할 거면 둘 다 무심해하라고. 이메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말 박대하는 거잖아.

    이젠 이렇게 흥분하는 내가 국수주의자에 민족주의자에 꼰대에 꼴통같이 느껴지는구나. 흥분하고 싶지 않은데. -_-;

    • 제가 본문에 댓가라고 썼나 싶아 Ctrl+F로 찾아봤는데 없어서. 도대체 뭐지, 이러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써놓고 못 찾고 있는 건가요?

      사이시옷 문제는 저도 많이 헷갈립니다. 한자어 단어에는 사이시옷 넣는 거 아니다, 라는 거 아무리 알아도. 그 ‘대가’의 경우는 저도 자꾸 ‘댓가’라고 써놓고 싶어진단 말이죠. ‘바람'(hope)이 맞다는 거 알지만 ‘바램’으로 자꾸 쓰고 싶은 것과 비슷하게… 뒷소리가 거센소리화되는 것도 표기에선 많이 헷갈리고요. 소리나는 거 표기에 웬만하면 반영한다는 게 한글 표기법의 원리 중 하나기도 하니까, 댓가라고 쓰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는 사실 어쩌면 당연한 거죠. (문법 바뀌기 전에는 ‘댓가’도 맞는 표현이었을걸요, 아마. 불과 20년 정도 전인가…) 오랫동안 소리를 반영한다는 원칙을 적용하다가 지금의 표기체계는 어원을 밝혀서 쓴다, 와 소리를 표기에 반영한다, 가 어정쩡하게 절충돼 있는 상태기도 하고.

    • 너한테 할 소리면 이렇게 안 쓰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라오.
      요즘 이런 포스터를 자꾸 보네… -_-

      반드시 누구나 맛춤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은 지켜 줘야 한다고 봐.

    • 포스터에 오타나 띄어쓰기 틀린 게 있으면 영화의 격마저 떨어져 보이는 게 사실이죠. 근데 뭐… 심지어 한글’제목’에서조차 맞춤법 틀리는 예가 부지기수라서 말이죠.

      게다가 < 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좀 낫지만(번역이 틀리긴 했지만 노력은 인정), < 톤먼트>, <3:10 투 유마>처럼 영어제목 그대로 음차한 제목들도 어이없는 건 마찬가지죠. < 톤먼트>는 이미 ‘속죄’란 제목으로 원작소설이 출판돼 있는 상태인데. 3:10은, 저런 식 제목이면 결국 ‘쓰리 텐’으로 읽어야 하는데, 여기가 무슨 식민지 조선도 아니고…

    • 하긴 ‘바람 피기 좋은 날’에서 이미 좌절 한 방 먹었구나;;;

    • 흐. 그 영화 제목 처음 봤을 때 한숨을 푸욱 쉬었다죠.
      맞춤법 틀린 영화제목 대기도 꽤 재미있는 놀이가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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