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일색 박정금> (프리미어 드라마리뷰)

버버리 코트를 휘날리는 멋진 형사가 아니라 생활형 아줌마 형사다. <천하일색 박정금>(이하 ‘<박정금>’)은 가족시청자 대상의 주말드라마답게 문제 많은 가족이 등장하지만 시종일관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혼당한 어머니와 살고 있는 정금(배종옥)은 그 자신 역시 남편에게 이혼당했고, 그 와중에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여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경찰계에 투신해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과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매일 “벌어먹고 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투덜거리고 때로 칼을 맞으면서도 형사일을 그만두지 못 한다. 어머니를 내쫓고 안방을 차지한 청주댁(이혜숙)과 그녀의 딸 유라(한고은)는 정금과 원수지간이고, 간간이 나오는 대사들을 통해 유라가 정금의 아픈 과거에 대단히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을 둘러싼 두 남자, 즉 용준(손창민)과 경수(김민종)는 정금을 둘러싸고 삼각관계를 만들어갈 예정이다.

경수의 말을 빌면 ‘얼굴이 다 구겨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사는 정금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일과 생활에 대단히 충실한 여자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어떤 억울한 일에도 그저 착하게 참고 사는 캔디형 여자는 아니다. 성격도 급하고 새어머니에게는 꼬박꼬박 청주댁이라 부르며 목소리를 높이며, 심지어 새어머니의 얼굴에 봉투를 던질 정도로 성격이 괄괄하다. 하지만 그녀는 성년도 안 된 아이가 소매치기 초범으로 붙잡힌 뒤 겁에 질려 떨자 놔줘버리고, 폭력행위를 고발한 남자가 오히려 뻔뻔스러운 파렴치범임을 알자 고발당한 남자를 동정하며 고발한 이에게 린치를 해버리는 따뜻한 면을 가지고 있다.

정금이라는 캐릭터를 한층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건 바로 배종옥의 존재다. 언제나 똑 부러지고 당당한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종옥은 불과 2002년 출연했던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서만 해도 문성근과 박해일을 동시에 휘어잡은 싱글여성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억척스러운 ‘아줌마’ 역할로 연기폭을 넓혀왔다. 그런데 <박정금>에서의 배종옥은 여전히 억척스러운 아줌마이면서도, 기존의 아줌마 역할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대체로 아줌마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나 똑부러진 이혼녀 역할이 대부분이었던 배종옥은 <박정금>에서 무려 고등학생을 둔 엄마이고 똑부러진다기보다는 털털한 면이 더욱 많이 드러나며, 위장 근무를 흔히 하는 형사라는 직업상 갖가지 위장과 변신의 모습을 선보인다. 배종옥의 팬들이라면 매회 범인을 잡기 위해 전력질주하고, 다소 어설픈 면이 있긴 하지만 범인과 싸우는 액션연기를 선보이며 때때로 갖가지 변신과 위장을 하는 배종옥을 보는 재미만으로도 주말을 손꼽아 기다릴 법하다.

천하일색 박정금

주부이자 생활형 형사, 박정금 여사는 오늘도 달린다, 범인 잡으러!

하지만 이 드라마가 갖는 매력은 단순히 배종옥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회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약혼자인 경수를 사이에 두고 정금과 신경전을 벌이며 제대로 악녀의 역할을 해주는 유라(한고은)에게도 그만큼의 관심과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이에게 독하고 막돼먹게 대하며 심지어 친어머니에게서도 ‘미친년’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막 가는 유라는 청주댁과 함께 정금의 인생에 가장 큰 굴곡과 고통을 주는 인물이지만, 유라 역시 청주댁의 비뚤어진 모성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정금 못지않은 상처를 지고 있기도 하다. 씩씩하게 고통을 이겨내며 생활을 영위하는 정금과 달리, 유라의 막돼먹은 성격은 죄책감과 모멸감으로 인한 강력한 방어벽이자 자기파괴적인 위장이다.

그간에 해온 수많은 악행과 모진 말버릇과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실은 어머니의 악행의 뒷수습을 하며 원치 않게 공범자 역할을 강요받으며 분열한다. 7회에 이르러 정금이 잃어버린 아들 지훈과 자신의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유라는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고통 못지않게 어미의 죄짐을 그대로 지고 가야 하는 자식의 고통과 오열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금에게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달려갔던 그녀가 결국 입을 다무는 것 역시, 그녀 입장에서는 정금의 이기주의로밖에 볼 수밖에 없는 일련의 행동들로 받은 상처 때문이다. 경수의 말대로, 유라는 어느 면에서는 그 어떤 인물보다 순수함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더욱 고통스럽게 자기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 와중에 정략결혼으로 약혼한 경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리고 경수가 정금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을 보면서 유라는 더욱 ‘준비된 악녀’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사실 유라의 캐릭터야말로 주말드라마로서는 파격적인 인물이며, <박정금>을 다른 여타의 주말드라마와 차별화해주는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경성스캔들>에 이어 완숙한 퇴폐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한고은의 연기 역시 배종옥만큼이나 드라마에 강력한 무게를 제공한다.

변호사인 경수와 의사인 용준, 두 남자가 정금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며 삼각관계로 치닫게 되는 것은, 그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온 정금의 인생에 일종의 보답으로 주어진 상황일 것이다. 두 남자의 직업이 남편감의 직업으로는 최고라 여겨지는 변호사와 의사라는 설정, 과연 주말드라마다운 통속성과 속물스러움을 적당히 보여주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러한 통속성이야말로 우리가 주말드라마를 보는 이유 아니겠는가. 처음엔 동병상련과 연민에서 시작했던 경수와 정금 사이의 감정은 점차 중요한 시간들을 함께 나누며 서로 호감을 품지만, 매우 더딘 속도로 서로 감정이 발전해가면서도 이 감정은 유라와의 관계 때문에 번번이 자체 검열과 자기 금지의 길로 들어서며 정체를 맞곤 한다. 한편 아파트 사기를 당해 어쩔 수 없이 정금네 가족과 한집에서 살게 된 용두, 용준 형제의 경우 처음엔 마치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지만, 용준이 정금의 초등학교 짝꿍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한껏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진전된다. 정금의 고통을 함께 나눠주는 이가 경수라면, 정금의 일상에서 즐거움과 씩씩함을 한껏 배가해주고 정금에게 힘을 주는 이가 용준인 셈이다.

<박정금>을 보면서 가장 감동을 하게 되는 장면들은 재미있게도, 정금이 범인의 뒤를 쫓아 질주하고 있는 장면들이다. 그 ‘달리는’ 장면들이야말로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정금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들일 터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며,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전력을 다해 즐거워하고 열심히 사는 정금의 모습, 그리고 그런 정금에게 무한한 자격지심과 죄책감을 느끼고 그 때문에 더욱 망가져가며 고통을 받는 유라,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을, <박정금>은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그려내고 있다.

ps. [프리미어] 168호.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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