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 적도의 꽃 (1983)

적도의 꽃

이런 삘 포스터, 어릴 적부터 정말 싫었다.

배창호의 뮤즈였던 장미희와 처음 함께 한 작품이다. 80년대를 풍미한 이른바 배창호-안성기-장미희 삼총사 영화의 첫 시작격인 셈인데, 배창호 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과 계몽영화인 <철인들>을 만든 이듬 해에 만든 영화다. 주인공(안성기)은 다니는 직장마다 오래 못 견디고 그만둔 뒤 아파트에서 (아마도 부자인 것으로 짐작되는) 아버지가 부쳐주는 생활비로 혼자 생활한다. 그의 취미는 카메라에 달린 망원렌즈로 아파트 주변을 몰래 구경하며 사진을 찍는 것. 어느 날 아파트 건너편에 새로 이사온 아름다운 선영(장미희)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반하지만, 그녀가 부유한 유부남 김성두(남궁원)의 정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을 찾고있던 그는 ‘미스터 M’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꽃과 선물을 보내고 전화를 건다. 하지만 소심하고 마음 약한 그는 그녀가 받으면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말을 더듬기 일쑤. 간신히 그녀에게 전화로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의 일방적인, 그리고 정체를 감춘 사랑이 보답받을 리 없다.

관음증을 정면으로 끌어들인 덕에 이 영화는 종종 히치콕의 <이창>에 비유되지만, 이 영화가 <이창>과 다른 점은 너무나 명백하다. 영화는 철저히 미스터 M의 시선으로 진행되며 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끝이 나지만, 그는 결코 우리가 충분히 감정이입을 하거나 연민을 느낄 만한 주인공이 아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미스터 M의 사회부적응자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이상성격을 확실히 감지하게 된다. 이를테면 여자에게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며 말을 더듬던 그는 여자가 자신의 성질을 거슬릴 경우 어느 순간 매우 폭력적으로 응대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성적불능자에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의심할 수 있는데, 과연 김성두를 거쳐 김준환을 사랑했던 그녀가 차례로 파경을 맞은 뒤 그녀가 비로소 미스터 M의 존재를 크게 느끼며 그에게 적극적으로 유혹해도 미스터 M은 그녀와 섹스하지 않는다.

대체로 옛 영화들은 우리가 현재 ‘폭력’이라 정의하는 것들을 폭력으로 보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이를테면 스토킹은 현재엔 범죄이자 이상행동으로 여겨지지만 불과 저 시대 때만 해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로 미화되곤 하였으며, 관음증 역시 범죄나 폭력이라기보다 지독하게 소심한 남자’의 나쁜 습관 정도로 가볍게 여겨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적도의 꽃> 역시 무려 25년 전 영화이므로 이런 한계를 가질 법한데,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주인공 미스터 M의 행동들을 지금의 가치관처럼 명확히 범죄나 폭력으로 인지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를 동정받을 만한 주인공이 아닌 결국 이상성격자로 그려놓는다는 점이다. 일련의 행동들을 통해 결국 그의 행동이 처음부터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의 폭력임을 명확히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봤다고 하니 배감독님이 혹시 보기에 불편하지 않았냐고 물어보셨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았던 게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최고의 악당은 주인공 미스터 M이다. 주인공을 포함해 이 영화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자기 중심적이고 탐욕스럽다. 여자들 역시 별 다를 바는 없지만, 적어도 선영은 매번 잘못된 남자를 선택해서 그렇지 꽤나 지고지순한 순정파다. 문제는 그녀가 자기파멸적인 캐릭터이고,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그렇기에 번번이 나쁜 남자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영화 말미에 그녀가 결국 자살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선영이란 캐릭터의 비극성이 더욱 배가되고 있기도 하다. 그녀는 서너 번의 자살 시도를 한 바 있고 이때는 거의 수면제였지만, 마지막 자살 때 가스를 틀어놓고 잠이 든다. 일반적으로 수면제는 정말로 죽고싶다는 자살시도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인데, 반면 가스 자살은 확고한 자살의지가 느껴진다.

적도의 꽃

실제론 상당히 긴박감 넘치는 장면, 차 앞에 안성기가 매달려있다.

아마도 개봉 당시 10대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몰래 보고픈 영화 제1순위에 올랐음직하다. 실제로 장미희의 올누드 씬과 나영희의 가슴노출씬이 있기도 하고, 바스트 샷으로 잘리긴 해도 정사씬이 여럿 있고 이것이 노출은
적더라도 꽤 감각적이고 야하게 연출됐다. 하지만 영화가 전체적으로 꽤나 솜씨좋게 매만져져 있어서, 영화적 재미는 상당하다. 워낙
다른 영화들이 너무 훌륭해서 내겐 상대적으로는 호감이 덜 가긴 하지만. 비정한 도시 한켠에서 비정한 욕망을 추구하다 추락하는 일련의 배창호 감독 영화의 첫 단추이기도 한 셈인데, 83년 개봉 당시 관객들에겐 꽤 충격적이었겠지 싶다. 심리 묘사가 탁월한 편, 물론 여전히 ’80년대 영화스러운’ 장면들이 있기는 하지만. 게다가 안성기 씨가 (물론 스턴트맨을 썼겠지 싶지만) 달리는 차 보닛 위에 매달리거나 조수석의 열린 문을 잡은 채 질질 끌려가는 등의 난이도 있는 액션연기를 선보인다. 섹스, 관음증, 폭력, 지배욕, 체이스… 자극적인 영화의 필수요소들이 모두 들어있고 이것을 매만지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들의 새로운 면모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결국 이들의 심리변화에 기초한 것인지라, 이 영화가 스릴러적 문법을 변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된 화면은 인물들의 ‘화려한 심리변화 묘사’ 덕에 빈 곳 없이 꽉 차보인다.

엔딩의 내레이션은 아무래도 지저분하게 덧붙은 설명 같아 좀 그렇다. M이 결국 man의 약자임을 밝히는 것도 그렇다. 하긴, 그걸 명시하고 나니, 결국 “남자들이 여자에게 원하는 건 뭐니뭐니해도 처녀성” 따위의 말들을 공식화시켜주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ㅋㅋ

ps. May 30, 2008, 금요일 5시, 서울아트시네마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뜬금없지만, 어릴 때 앞집 이모 집에서 < 인들>을 티비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조선소에 헬멧 쓴 안성기의 얼굴도ㅎ

    • 계몽영화란 말만 듣고 제꼈는데, 특별전 2주차부터 영화들 챙겨보다가 그렇게 제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게다가 이번 특별전은 나한텐 ‘배창호의 재발견’일 뿐만 아니라 ‘안성기의 재발견’이기도 했는데, 그 안성기 아저씨가 엄청 멋지게 나온다고 해서 더욱 아쉬워하는 중이다.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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