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 깊고 푸른 밤 (1985)

깊고 푸른 밤

세련된 장미희, 섹시한 안성기.


이전에 비디오로 보았을 때의 <깊고 푸른 밤>과 이번 배창호 특별전에서 필름으로 본 <깊고 푸른 밤>이 명확히 다른 영화로 여겨지는 것은,그 사이 10년 이상의 공백이 존재하기도 하려니와, (모든 영화가 그렇긴 하지만)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역시 필름으로 봐야그 진가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Deep Purple의 ‘Highway Star’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한국인 젊은 남녀가 자동차를 몰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데쓰밸리로 진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차 안에서도 닭살행갈을 일삼던 이들은 데쓰밸리의 어느 계곡에서 정사를 나누는데, 이 장면은 여배우의 의상뿐 아니라 그 ‘어색함’ 때문에 다소 촌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곧바로 정서적으로 반전이라 할 만한 장면이 이어진다. 정사를 마친 후 옷을 매만지고 있던 여자를 남자가 사정없이 후려치고 버려둔 채 지갑을 털어 도망가는 것이다. 이 남자의 이름은 백호빈(안성기)이고, 그는 미국에 불법체류 중이다. 그리고 이후 장면은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제인(장미희)에게 호들갑스러운 중개인이 ‘껀수’가 있다고 달려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소위 ‘미국 올로케’로 이루어진 <깊고 푸른 밤>은 배창호의 필모그래피에서 아주 중요하면서도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순수하고 착한 낙천주의 계열의 영화와 냉정하고 비열한 인물들의 영화로 나눌 수 있겠는데, <깊고 푸른 밤>은 <적도의 꽃>에 이어 후자의 목록을 차지하고 있으며 <적도의 꽃>보다 훨씬 세련된 미감의 화면을 보여주는 한편,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에서부터 보여줬던 ‘사회적 인간’의 면모를 놓치지 않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오오 아메리카! 아메리카!!) 또한 내가 확인하지 못한 <철인들>을 제외한다면, 배창호 감독 특유의 360도 회전이동씬이 아주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첫 영화이기도 하다. (라고 써놓고 자신이 좀 없어지는…) <적도의 꽃>에 이어 배창호-안성기-장미희 3총사의 작품이면서(실은 여기에 원작/각색 최인호의 이름도 붙여야 더 완벽해지지만), 비로소 배창호 감독이 뛰어난 흥행감독으로서 안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결정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깊고 푸른 밤>이 <적도의 꽃>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언제나 ‘착한 낙관주의’가 한계로 지목되곤 하는 배창호 감독의 영화에서 이 영화만큼은 ‘그런 식의’ 착한 인물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적도의 꽃>에서의 선영(장미희)이 유부남의 정부로 살고 있는 것은 현실적 욕망과 계산보다는 (아마도 애정결핍에서 연유한) 절대적 사랑에 대한 기대와 환상 때문이며, 그녀는 하다못해 정부에게 ‘콩알만한 다이아 반지 하나 달라고 조를 생각도 없는’ 착한 정부이다. 그리고 영화 전체를 통해 탐욕스러운 남자들의 욕망에 이용되거나 배신당하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그녀의 잘못이 있다면, 그건 번번이 잘못된 남자를 선택했다는 사실뿐이다. 반면 <깊고 푸른 밤>의 제인(장미희)은 다르다. 그녀는 계약결혼 첫 날 섹스를 시도하는 호빈에게 권총을 겨누며, 법적으로 결혼상태라는 사실과 임신을 호빈에게 무기로 쥐고 흔든다. 우리는 그녀가 정말로 임신을 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도 없다. 그리고 엔딩.


깊고 푸른 밤

냉소적이 된 제인은 뜻밖에 '못된' 호빈에게서 강한 부성을 발견한다.


<깊고 푸른 밤>은 ‘닳을 대로 닳은’ 두 남녀의 상호 배치되는 욕망을 건 권력게임이다. 애초 ‘누이좋고 매부좋은’, 서로 원하는 바를 챙길 수 있는 상호 윈윈 게임으로 보였던 두 사람의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겪고, 정작 계약의 목적을 이루자마자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욕망의 충돌로 나아간다. 애초 계약대로 호빈은 영주권을, 제인을 돈을 얻었으되, 둘의 욕망은 모두 좌절된다. 아이를 갖고 안정적인 결혼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새로이 품은 제인은 호빈이 그것을 이루어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으며, 영주권을 얻고 고국의 (사실혼 관계의) 아내를 데려오기 바랐던 호빈은 아내로부터 결별 통보를 듣는다. 이들은 처음부터 서로를 절대로 신뢰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계약을 통해, 그리고 상호 위협적인 협박과 상대로부터 ‘얻어낼 것에 대한 기대’ 때문에 유지된다. 그 모든 것이 깨지는 순간, 둘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 빵. 그리고 빵.


애초 반복되는 계약결혼과 파경을 겪으며 남자에 대해 냉소할 수밖에 없는 제인이 호빈에게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되는 것, 그에 대한 설득력있는 이유는 호빈의 총체적인 매력이다. 제인은 거칠 것 없이 사악함과 비열함을 드러내는 호빈이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순수에 대한 욕망을 본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에게 호빈이 대하는 태도를 통해 호빈이 그 누구보다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을 보며, 거칠 것 없이 욕망만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그가 실은 저 멀리 고국의 그녀를 향해 자신의 양심과 순수를 향한 지향과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과연, 이것을 드러내는 안성기는 연기뿐 아니라 총체적인 존재 그 자체에서 매우 설득력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한 마디로 <택시 드라이버> 시절의 로버트 드니로다. 로버트 드니로의 트레비스가 (헤어 스타일을 바꾸기 전까지) 얼마나 아찔한 섹시함을 선사하는지 전혀 동감을 못 하겠다면 이런 비유가 필요가 없겠지만. 차이나타운을 걷는 백호빈의 이미지는 <택시 드라이버>의 오리지널 포스터에 등장한 로버트 드니로의 모습 그대로인데, 호빈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영화의 등장인물 중 한 사람 – 오프닝에서 백호빈 때문에 죽을 뻔했던 – 의 입으로도 명시된다. 지옥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 매력을 뿜는 존재. 이 영화에서 안성기는 바로 그런 존재를,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깊고 푸른 밤

아아아 저 삐딱한 안성기 자태. 실제로 영화에서 조낸 섹시하시다.



ps. 4:30 pm, Sat. May 24, 2008,  서울아트시네마


ps2. 배창호 감독님의 사모님이자 <러브 스토리>와 <정>의 배우인 김유미 씨와 “이번 특별전은 ‘안성기의 재발견이라며 공감의 수다를 떨었다. 아, 정말 이건 극장에서 필름으로 확인한 사람들은 진짜 공감 곱하기 백을 외칠 수 있을 듯.


ps3.  오래 전 비디오로 봤을 땐 장미희의 양식적 발성이 거슬렸는데 다시 보니 캐릭터와 너무 잘 어울리고… 별로 거슬리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당대에 장미희는 ‘예쁘고 섹시한데 심지어 연기파’ 배우였겠구나, 싶다. 사실 장미희는 굉장히 지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ps4. 진유영의 너스레 연기도 인상깊다.

ps5. 이 영화를 찍는다고 한국에서 꾸려간 스탭팀이 불과… 11명이었다고 한다. (110명이 아니다 -.-;;; 연출부가 곽지균 조감독 혼자였다고.)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One Comment

  1.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영상자료원 홍보담당 민병현입니다.
    연락을 드릴길이 없어 부득이하게 이곳에 덧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6월 20일(금)부터 29일(일)까지 상암동 시네마테크KOFA에서 김기영 감독 10주기를 맞아 < 기영 감독 전작전>을 실시합니다. 전작전에서는 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23편을 모두 상영할 예정이며 다양한 부대행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영상자료원에서는 < 기영 전작전>에 앞서 영향력 있는 파워 블로거분들과 영화기자들을 초청하여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된 김기영 감독의 < 녀> 디지털 복원작 시사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하고자 합니다.

    ㅇ 행사명 : 디지털 복원 < 녀> 최초공개 파워블로거 시사회
    ㅇ 일 시 : 2008년 6월 13일(금) 19:00
    ㅇ 장 소 : 한국영상자료원 B1층 시네마테크KOFA 1관 (상암동 DMC단지 문화콘텐츠센터)
    ㅇ 상영작 : < 녀>(1960, 김기영) / 디지털 복원작 국내최초 공개
    ㅇ 참석자 : 파워 블로거 및 영화담당 기자

    ‘13일의 금요일 밤’ 다시 살아난 < 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문의사항은 언제라도 아래 연락처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ㅇ 한국영상자료원 기획홍보팀 민병현
    – 전화 : 02-3153-2018
    – 핸드폰 : 010-7727-7630
    – 이메일 : als2525@koreafil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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