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 러브스토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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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표정이 너무 귀여우셈.

배창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결국 ‘사랑’에 관한 영화요 자신의 영화적 주제 역시 영원히 ‘사랑’이라고 누차 강조해왔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화는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부터 가난한 꼬방동네를 배경으로 한 삼각 멜러물이었으며, 이후 영화들 역시 그 방향이 왜곡됐건 아니면 지고지순한 일편단심이건, 계속해서 사랑을 다루고 있는 게 사실이다. 원래 배창호 프로덕션의 창립작품이 될 뻔했으나 <젊은 남자>에 이어 두 번째 제작영화가 된 <러브스토리>는 그 제목부터 아예 대놓고 사랑 이야기다. 배창호 감독과 그 부인 김유미 씨가 자신들의 실제 경험을 녹여넣되 상당히 픽션화한 이 영화는, 각본부터 두 사람이 함께 썼고, 심지어 주연배우로도 두 사람이 직접 등장한다. 그런 이 영화, 정말이지 너무 웃기고 사랑스러우며 따뜻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사랑’에 관한 영화, 게다가 그것이 ‘코미디’ 색채가 상당히 가미되면 다소 평가절하하는 습성이 있고, 따라서 <러브스토리> 역시 배창호 감독의 소품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러브스토리>가 배창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단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이 연인과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사랑이기도 하고, 주인공 성우(배창호)의 노총각의 신분과 최근의 지지부진한 영화경력이라는 현실에서 ‘사랑’이 이중적으로 발화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과 아울러 영화 자체에 대해, 혹은 영화만들기에 대해 자기 반영적인 영화를 만들며 감독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재정비하는 영화들을 필모그래피 중간에 만들곤 하는데, 이 영화 역시 그런 영화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주인공의 직업을 영화감독으로 설정하면서, 결국 철저하게 그냥 ‘연애 이야기’로도 완결적인 해석이 가능하게끔 느슨하게 장르영화의 틀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분들 뿐만 아니라, 영화의 내용과 맞물려 구체적인 형식과 스타일의 차이에서도 매우 중대한 변화를 보인다.

이전 작품들 대부분, 심지어 전편인 <젊은 남자>까지만 해도 지극히 장르의 ‘양식적인’ 측면에 기대며 인물들을 다소 거리를 둔 채 건조하게 그려왔던 배창호 감독은 <러브스토리>에서부터 인물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그 인물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는 듯한 화면을 선사한다. 물론 그는 이후 <흑수선> 같은 영화에서 다시 양식적인 상업영화를 만들긴 했지만, <정>의 경우에서도 이런 따뜻하고 보다 가까운 거리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이것이 <러브스토리>에서의 일회적인 특징이라기보다 배창호 감독의 ‘스타일’의 면에서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길>까지 봤다면 좀더 확신을 갖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길>을 놓쳤다.) 이전의 영화에서 감독의 인물에 대한 애정이 약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었다면, <러브스토리>에서부터는 보다 구체적이고 내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앞서 만들었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이 감독의 실제 내력을 반영하면서도 인물과의 거리는 여전히 ‘먼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러브스토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인물 옆에 밀착해서 가장 구체적인 일상과 생생한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바꿔 말하면,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러브스토리> 이후 감독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화’의 시초 혹은 원형을 간직한 영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러브스토리

역시나 감독님 표정이 하이라이트.

사실 배창호 감독은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범상치 않은 로맨틱 코미디에도 재능이 있음을 슬쩍 내비치기는 했지만, 이는 <러브스토리>에 와서 비로소 활짝 핀다. 영화 속 양식화된 인물들이 아닌 평범한 ‘일상형 인물들’이 지지고 볶고 알콩달콩한 그 과정을 지극히 능숙한 솜씨로 장르의 법칙을 잘 활용해 전개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배창호 감독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법칙을 크게 고려하는 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고 뛰어넘음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있어 가장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물론 처음 두 사람이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고 데이트를 하고, 점점 가까워지지만 다툼과 갈등을 겪고 헤어질 뻔하다가 다시 만나 행복해진다는 일반적인 플롯은 여느 로맨틱 코미디들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디테일들이다. 첫 데이트를 하러 나가기 전 미리 드라이클리닝을 맡겨둔 옷을 입을 뿐 아니라 ‘콧털 소제’한다거나, 전화기 앞에서 몇 번을 망설이고, 때마침 자기 앞에 찾아와 인사하는 영화과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 이런 사람이에요”를 자연스럽게 과시할 수 있어 뿌듯해하는 게 뒷어깨로도 다 드러나고, 다소 둔한 눈치로 쩝쩝대며 음식을 먹고 어느 동네에 어느 맛집이 있는지 줄줄 꿰고, 구체적인 동네와 장소가 거론되고, 구체적인 영화가 거론된다. 수인도 그렇다. 알람이 울리기 직전 스스로 일어나는 것부터 먼지 하나 머리카락 하나 참지 못하는 습관, 바늘이 떨어졌을 때 서랍에 넣어둔 자석을 꺼내 찾고(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팁!), 침대보는 사방 똑바른 직선으로 접혀있어야 하며 옷도 종류별로 똑같이 가지런히 정돈해야 하는 그녀는 심지어 성우와 함께 치른 첫날밤에서도 자신과 성우의 옷을 얌전하게 게켜 한쪽에 반듯하게 놓아둔다.

습관도 사고방식도 이러헥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상대를 알아가는 이것은 막상 둘이 헤어졌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자는 남자와 이야기했던 영화의 음악과 그의 말을 흉내내고(“컷, 컷, 컷!”), 남자는 그녀가 없는 빈 자리와 그로 인해 다시 얻게 된 어두운 지하방의 우울한 공기에 둘러싸여 괴로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화해. 그리고 요란한 이벤트식 ‘연애놀이’가 아닌, 함께 밥을 지어먹고 편안히 서로에게 기댄 채 시간을 공유하는 그 일상적이고 편안한 모습. 이같은 방식은 영화나 소설들이 장르 관습을 빌어 자행하게 되는 소위 ‘낭만적인’ 과장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오히려 속으로 더 뜨거운 열렬함과 낭만적인 사랑 예찬의 성질을 강화한다.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빠져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가 돼도 상관없다는 식의 자기애가 아닌, 진정으로 다른 이와 만나 소통하고 서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며 자신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마음을 주고받는 과정이 유기적으로 묘사해나간다. 그리고 이는 다시 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둘러싸고 관객과의 진정한 소통과 애정에 관한 문제와 중첩된다. 영화 속에서 수인은 직접적으로 영화를 ‘러브레터’에 비유한다. 또한 그가 영화에 대해 묘사한 말, 즉 ‘어두운 밤길을 비추는 작은 불빛’이라는 말은 다시 개인의 삶에 있어 사랑이 갖는 의미로서도 매우 적절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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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실연을 하면 왜 항상 머리를 자를까.

그런데 이 영화가 역시 시대보다 많이 빨랐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적어도 영화 세상에서는 마치 20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사랑과 연애의 주인공들이 30대 소위 ‘노처녀’와 갓 마흔이 된 ‘노총각’이라는 점이다. 서른 넘은 여자의 연애가 상업영화 씬에서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활발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96년에 이미 이를 다루며 꼭 결혼을 향해 달려가는 숨가쁜 경주가 아닌, 그러나 20대의 전유물도 아닌 사랑과 연애를 이토록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는 건 매우 놀랍다. 12년이 지난 지금 봐도 이 영화를 보며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듯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절절이 공감되는 것은, 시대가 바뀌며 겉 모양새는 바뀌되 본질은 바뀌지 않는 그 ‘사랑’의 정수에 이 영화가 곧장 걸어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배창호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이자, 영화에 대한 메타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는 배창호 감독의 영화 세계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가장 유쾌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자, 사랑과 인생과 영화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함께 섞여 있는 아름다운 영화다.

ps. May 28, 2008 수요일 저녁 7시, 서울아트시네마

ps2. 김유미 씨의 배우 데뷔작인 셈인데, 발성이나 다른 기술적인 면에서 어색함이 느껴지긴 해도 그 ‘능글맞음’과 남자주인공과의 케미스트리만큼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ps3. ‘ 배우’ 배창호의 연기는 언제나 놀랍다.

ps3. 신촌역 카페에서의 첫 데이트에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의 영민의 대사가 인용된다. 혜린에게 다짜고짜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해서 혜린의 깔깔대는 반응을 얻었던 영민의 그 서투른 고백이, 이 영화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당황스러운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우에게 연기지도를 할 때의 시범 대사로 다시 활용된다.

ps4. 읽어볼 만한 리뷰 : Chulgoo, 러브스토리 – 명불허전, 노장은 죽지 않는다

ps5. 역시나 360도 회전이동 씬 : 성우가 처음 공중전화에서 수인에게 전화를 걸 때. ‘공중전화 박스’라는 점에서 <깊고 푸른 밤>과 같다.

ps6. “영화는 어두운 밤길에서 빛나는 작은 등불”이라는 말은 많은 영화감독들이 사용하는 영화에 대한 비유이고, 그 중엔 잉그마르 베르히만도 있다. 베르히만의 자서전부터 재목이 ‘Magic Lantern’이다. 국내에는 [마법의 등불]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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