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배창호 영화 : 배창호의 영화를 보며 얻은 사적인 깨달음들

네오이마주의 네오plus에 6월 10일 실렸던 글인데, 네오이마주에서는 블로그로도 글을 서비스하는 고로 여기에는 그냥 링크만 매답니다.

나와 배창호 영화 : 배창호의 영화를 보며 얻은 사적인 깨달음들 (혹은 여기)

1.
내게는 ‘옛날 한국영화’에 대한 아주 안 좋은 편견이 있어서, 그러니까 7, 80년대 한국영화들이란 죄다 섹스,
섹스, 섹스만 부르짖는 촌스러운 영화들인 줄 알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무렵까지 살던 곳은 지금은 집창촌의 폐허로 변해버린 미아리
근처로, 판자집을 겨우 면한 여인숙들과 그 여인숙을 개조해 월세를 놓았던 다 쓰러져가는 집들로 가득한 미로 골목들 사이에 있었다. 꾀죄죄한
뒷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동네 동시상영관 포스터는 언제나 옷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기묘하고 야릇한 포즈로 서 있는 여주인공의 사진에 덕지덕지
성적인 농담의 낙서글이나 낙서그림이 그려져 있기 일쑤였다. 학교를 가기 위해 언제나 지나쳐야 했던 골목 어귀의 그 포스터들을 보면서 나는
남자들이 여체를 대하는 시선을 배웠고, 동시에 여성이라는 내 성에 대한 혐오감을 키웠다.

… (하략)

이 글의 반 이상이 배창호와 별로 상관이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돼 있는 것은, 네오이마주 밑에 달린 고마운 댓글에도 드러나다시피 배창호 감독이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군림하던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여성’ 영화팬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보통 영화팬들과는 다른 경험과 다른 영화적 자장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기록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얼마 전 영진공의 철구님께서도 동시상영관의 추억에 대해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만, 사실 한국의 많은 영화팬들이 이 동시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노라, 나의 영화적 시작은 사실 대단히 고상한 고전 걸작이나 우아한 영화들이 아니라 홍콩무협 / 홍콩누아르 혹은 에로영화였노라, 그리고 실은 바로 그것이 영화의 본질이라 생각한다는 식의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이미 중견이 된 영화평론가나 이론가, 감독 등뿐만이 아니라 좀더 젊은 일반 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일반’으로 얘기된다 한들, 어디까지나 ‘남성영화팬들 일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전 여기서 남성과 여성을 가르려는 의도는 없으며, 모든 남성영화광들의 시작이 그러했고, 모든 여성영화광들의 시작이 그렇지 않았다고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대부> 시리즈를 호러 장르의 그 어떤 호러영화보다 무섭게 여기고, 에로영화들에 대해 불편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건 제가 지나치게 예민하고 꽉 막힌 사람이어서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단적으로, 80년대 후반에 예컨대 <스카페이스>와 <산딸기> 시리즈가 동시에 상영되고 있는 동시상영관에 입장을 한 여고생이 있다면, 이 사람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학생들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라는 사실에 과연 이견이 있을까요?

영화적 추억을 기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재개봉관 혹은 동시상영관의 추억이, 실은 여성을 배제한 남성들만의 문화였고, 이것이 지금 현재 여성평론가와 여성이론가의 입지가 좁은 이유와 어떤 식으로도 연결이 된다면, 그런 식의 ‘일반적인’ 경험 외에 다른 경로의 경험은 적극적으로 다시 기억되고, 발굴되고,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전 이렇게까지 배제당한 경험으로 과연 여자인 내가 영화글쟁이는커녕 제대로 된 영화팬으로 인정이나 받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때가 있곤 하거든요.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것 때문에 꽤 자괴감도 컸고요. (거울 앞에서 you talkin’ to me?를 따라하며 쿨하다고 여기는 남자애들 심리를 30대 초반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

뭐, 사회문화적, 그리고 시대적 환경이 그렇게 주어졌었고, 거기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가지고 제가 열등감을 갖거나,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어떤 일이 있었고 이것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식의 영화문화는 대체로 남자들의 문화였다” 정도의, 보편을 특수로 드러내는 일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또다른 특수의 경험들을 늘어놓고 발굴하는 것… 원래 영화비평의 역사가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당대엔 쓰레기 취급을 받은 것의 가치를 발굴하고 드러내는 것, 혹은 기존의 평가에 대한 재평가, 등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성인 제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영역은 또 따로 있겠지요. 예컨대 멜러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 특히 스크루볼 코미디가 실은 계급과 젠더 차이에 관해 어떤 코멘트를 하고 있었나 등을 밝힌 선배 페미니스트 평론가들처럼요.

배창호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특별전 당시 배창호 감독.

하여간에… 저 ‘동시상영관 문화’가 아주 일반적이었던 80년대는 배창호 감독이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기였고, 그 시절에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던 저는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평론가/이론가/감독들보다 밑의 세대입니다. 여성일 뿐 아니라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영화적 자장 역시 꽤 다릅니다. 단적으로 전 독일문화원이나 프랑스문화원 등의 문화원 세대가 아니라 PC통신 세대거든요. 2000년대 들어, 이제 나름 안정화된 시네마테크에서 배창호 감독의 영화를 보며 80년대를 기억 속에서 재구성해보자니, 제가 앞으로 가야 할 어떤 방향성 같은 게 좀 그려지더군요. 여러 모로 이번 아트시네마에서의 배창호 특별전은 제게 아주 특별한 경험과 방향을 제시해주는 듯합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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