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 하녀 (1960) (2008 디지털 복원판)

하녀

약간 비스듬히 세로로 가로지르는 칼의 이미지.

김기영 감독은 살아 생전 32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언제나 그의 영화세계는 주로 <하녀>, <화녀>, <충녀>, 그리고 <육식동물> 등의 여자 시리즈 위주로만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 (<육식동물>은 제목에선 그렇지 않지만 내용은 충분히 여자 시리즈로 구분할 만하고, 반면 <수녀>는 여자 시리즈로 넣기가 힘들다.) 혹은 컬트영화로서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가 특별히 선호되거나. 그건 아마도 이 작품들이 김기영의 독특한 영화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작품들이기도 하지만, 비디오테입 등으로 구하거나 스크린 상에 상영되는 게 다른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어도> 같은 작품은 그 뛰어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는 경향이 있다. 여자 시리즈로 김기영의 영화세계를 처음 접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가 김기영 감독을 처음 접한 건 10년도 훨씬 전 애니메이션센터에서 필름으로 본 <이어도>였기 때문에,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면서 누구나 여자 시리즈의 미스테리 스릴러의 서스펜스와 김기영식 팜므파탈을 먼저 얘기할 때 나는 <이어도>를 보면서 느꼈던, 화면에 어리는 ‘귀기’를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최근 복원돼 작년인가 올해초인가 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됐던 <고려장>에서도 역시 ‘귀기’를 느꼈다.) 그럼에도, 어쨌건 저 여자 시리즈를 빼놓고 김기영을 말하는 것은 분명 팥호빵은 치워놓은 채 야채호빵만 얘기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야채호빵을 훨씬 더 좋아하지만.) 그렇기에 <하녀>는 김기영의 여자 시리즈 중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이후 다른 여자 시리즈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번 김기영 전작전에서 상영된 <하녀>는 마틴 스콜세지가 수장으로 있는 WCF(World Cinema Foundation, 세계영화재단)의 제1호 복원작으로 지정돼 WCF의 후원하에 디지털로 복원된 버전이다. 실제로는 영상자료원이 WCF에 공동복원을 제안했고, <하녀>가 WCF의 복원 원칙에서 다소 벗어난 감이 있음에도 마침 김기영 감독의 팬인 마틴 스콜세지가 적극적으로 밀어줘서 복원이 성사됐다고 알려져 있다. 디지털라이징을 통한 화질 개선뿐 아니라 프린트에 있는 영어자막을 지우는 것까지 복원과정에 포함돼 있는데,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버전이나 이번 김기영 전작전에서 상영된 버전은 복원작업이 아직 덜 끝난 상태이다. (영어 자막은 영화 전체에 그대로 남아있으며, 전체 롤 중 약 두 롤 정도가 아직 디지털라이징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영상자료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전체 디지털 복원 작업이 끝나는 시기는 대충 올해 말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저 영어자막 지우기가 복원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 한다. 어쨌건, 이번 복원된 버전의 <하녀>는 스크래치나 세로줄, 혹은 플래시 같은 것이 간혹 눈에 띄긴 해도 놀랍도록 깨끗한 화질을 보여준다. 이것은 영화 중 섞여있는 아직 복원이 덜 끝난 롤에서 확연하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디지털라이징이라는 게 아무래도 아날로그 필름에서 어느 정도의 손상을 감안해야 하는 만큼 다소 인공적인 명암도가 안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알다시피 <하녀>는 흑백영화라 ‘색감’을 얘기하기가 힘들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작품의 아우라를 느끼고도 남을 정도.


영화는 중산층 인텔리 가정에 ‘하녀'(이은심)가 들어오면서 가정이 망가져가는 과정을 그린다. 얼마 전 <더 킹> 리뷰에서도 썼듯 낯선 이방인에 의해 중산층 가정이 깨지는 건 실은 그 이방인이 가정을 깨는 것이라기보다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던 불안과 모순이 이방인의 등장이라는 변수를 통해 외연화하고 폭발하는 것이다. 본질적인 불안과 모순은 이 집의 큰 딸이 다리가 마비돼 있다는 점에서 이미 예고돼 있는 부분. 남편에게 극존칭을 쓰는 아내(주증녀)가 소위 조신하고 현숙한 아내이자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하녀는 이 집에 처음 들어오기 전부터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거침없는 말로 내뱉어 버리는 다소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캐릭터다. 남자(김진규)는 자신에게 대쉬해오는 (수줍은) 공장 여공들은 단호하게 내치지만, 대차고 당당한 하녀의 노골적인 유혹은 뿌리치지 못한다.


하녀

<하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 창 안과 밖, 여자들의 표정의 대조. 실제로는 엄앵란이 김진규를 유혹하는 장면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서 핵가족의 남성 가부장은 대체로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일쑤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에 단호하고 의젓해 보이던 가부장으로서의 권위와 카리스마는 하녀의 등장 이후 공갈빵 종이호랑이였음이 드러난다. 엄앵란에게 화를 내며 단호하게 구는 장면도 이후 하녀에게 넘어가는 장면을 보면 단호하고 엄격한 카리스마라기보다 여자한테 겁이 난 것을 짐짓 버럭으로 커버치는 것으로 느껴진달까. 그렇기에 그의 권위에 순순히 복종하는 이에게는 마음놓고 가부장 내지 권력관계에서 우월한 위치의 버럭을 행사하지만, 그 따위 것, 하고 코웃음치며 달려드는 여자에겐 뒷걸음치지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그냥 계속 당하는 모드가 된다. 종이호랑이 공갈빵에 불과한, 핵가족의 무력한 가장의 모습. 그리고 자신의 계급(중산층) 바깥에 존재하는,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 바로 이것이 <하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영 감독이 언젠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그는 당시 시골에서 상경한 수많은 농민의 딸, 혹은 도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 대부분이 여공, 급사, 하녀, 혹은 창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를 이주노동자 여성이 채운다.)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공포는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자신의 아내에게조차 두려움을 내비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즉,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공포는 그가 하녀에게 압도되는 방향뿐 아니라, 나중에 아내에게조차 쭈뼛거리는 형태로도 드러나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비록 중산층 인텔리의 아내로 초반엔 그에게 다소곳했을지언정, 계속해서 집안에서 가사노동뿐 아니라 남편의 수입을 보조하는 맞벌이 노동을 해왔기 때문에 그가 허약하게 하녀의 침실로 끌려들어갈 때, 그리고 거기에서 마지못해 나왔을 때 자신의 아내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노동하는 여성이면서도 인텔리의 아내로서의 한계에 갇혀있고, 자신의 남편을 꿰차고 앉은 하녀에게 무력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다는 짓이 하녀의 국에 쥐약을 놓는 것인데… 사실 영화 초반에 쥐를 보고 난리법석을 떠는 장면에서부터, 그녀의 한계는 이미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하녀는 쥐를 보고 웃음을 지으며 꼬리를 잡고 쥐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하녀

놀라운 카리스마와 흡입력을 보여주는 이은심. 손에 들고있는 담배와 양갈래머리의 충돌.


영화의 결말은 다소 뜬금이 없지만, 확실히 <하녀>는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뛰어난 스릴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만 해도 김기영 감독의 ‘자의식’이 그토록 과잉스럽게 분출되지는 않고 있으면서도 영화미학적으로도 유려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보다 보기에 다소  편했다. 특히 하녀 역의 이은심은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닌 배우. 시대를 너무 앞서 나타나 그런 카리스마를 연기하는 바람에 <하녀> 이후 변변한 역을 맡지 못하고 너무 일찍 묻혔다. 아쉽기 그지 없다.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했을 당시 김기영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매회 언제나 영화 중간 벌떡 일어나 이은심을 가리키며 “저 년 죽여라!” 외치는 중산층 여성이 있었다던데, 확실히 남편을 뒤흔듦으로써 남편에게 종속된 자신의 중산층 여성의 위치를 위험에 빠뜨리는 유혹자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중산층 여성에 있어 악몽 그 자체로 다가왔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여성들의 권력다툼을 자신은 쏙빠진 채 여성들끼리의 제로썸 게임으로 몰아가는 남성 가부장 질서의 단면인 것이다.

ps. 6월 20일 금요일 7:00pm,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김기영 전작전 개막식)


ps2. 7살 남짓의 어린 꼬마 아들은 어린 시절의 안성기이다. 처음엔 잘 모르겠더니 보다보니까 그때에도 지금 얼굴의 일부가 좀 보이더라는.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3 Comments

  1. 하녀 덕분에 다시는 배우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신 불운의 명배우 ‘이은심’님…
    이화시님의 경우처럼 다시 인정받는 날이 올까요?
    그러기엔 시간이 많이 걸릴것 같네요.

    • 이화시 씨는 그래도 김기영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많이 출연을 했는데, 이은심 씨는 어쩌다 이거 한 편으로 이력이 끝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이화시 씨도 다른 영화엔 거의 출연을 못했고 화천공사가 스타로 키워보려고 했으나 인상이 너무 강해 결국 잘 안 됐던 걸로 알고 있거든요. 뭐 워낙 김기영 감독님이 자신의 배우들이 다른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는 걸 못마땅해 하셨다고는 하지만요.

  2. 이은심씨는 지금 브라질에서 잘살고 계십니다.
    1남1녀의 어머니로써.연기력도 강한 이미지로 시대에 걸 맞는 인상을 주셨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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