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 | 오만과 편견

아쉬움과 수긍, 그 사이 어정쩡 어드메에서…

 

존심과 편견

드디어 봤네요, <오만과 편견>. 우려만큼 엉망은 아니었는데다 미스터 다아시 = 콜린 퍼스 공식이 너무나 확고하게 들어차있는 저같은 인간에게 맥페이든의 다아시가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어 스스로도 의외였고, 그럼에도 BBC 시리즈의 팬인 제겐 역시나 밍밍하네요. 게다가 문제는 배우들이 아니라 감독과 촬영에 있었던 듯합니다.

전체적으로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영화 안 공간이 너무나 답답하단 것이었습니다. 좁디좋은 공간에 사람 잔뜩 우겨넣고 발 디디거나 몸 움직 틈도 없이 춤추는 것도 거북살 스러웠고, 애들이 야외에 나와있는데도 답답함은 여전하더군요. 카메라 렌즈의 문제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인물을 잡는 앵글이 클로즈업과 숄더샷이 너무 빈번하다는 게 가장 컸을 겁니다. 좀 떨어져봤자 웨이스트 샷이고 꽉 채운 풀샷은 조금밖에 안 돼요. 롱 샷(더 멀리서 주변과 함께 인물을 잡은 샷)은 영화에서 몇 번이나 나오더라. 심지어 춤추는 장면들마저도 웨이스트샷으로 처리해 버리더군요. 그러다 덜컹, 하고 갑자기 급작스럽고도 격렬하게 카메라 이동하는 샷이 몇 번 나오는데, 이거 정말 뜬금없구요.

도대체 왜 이렇게 찍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감독이 원한 게 뭘까요? 이렇게 가까이 인물한테 파고들고,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도…

사실 맥페이든의 다아시는 콜린의 다아시보다 덜 오만하고, 좀더 자상합니다. 워낙에 ‘사연 있어뵈는 얼굴’이라 그런지, 사실 별로 오만해 보이지도 않고, 그냥… 뭐, 뭔가 사연있는데 말 않는 사려깊은 왕자님으로 보여요. 그런가 하면 리지는, 참으로 에너제틱하고 발랄합니다. 원래 키라 양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그녀의 리지가 꽤 좋았습니다. BBC 시리즈의 제니퍼 일리가 좀 노숙(…)했던 것이 좀 아쉬움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약간 철딱써니 없는 자존심 혹은 프라이드가 훨씬 10대답게 생기있고 그럴싸하게 여겨졌죠. 그리고 결론. 카메라가 그렇게 인물에게 들이댄 것도, 그 인물들이 제인 오스틴 특유의 사카스틱하고 숨겨진 공격성의 면은 쏙 빼버린 채 그렇게 간 것은, 나름 ‘현대적 감각'(…) 운운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란 짐작을 하게 됐죠.

사실 지금의 티켓 파워를 좌지우지 하는 젊은 층에겐 그런 감각이 더 잘 먹힐진 모르겠습니다. 원작의 리지는 없는 주제에 잘난 척만 하는 왕재수, 미스터 다아시는 돈 좀 있다고 재는 왕재수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세계 그 수많은 제인 오스틴의 팬들은 그런 ‘모던한 감각’ 때문에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겁니다. BBC 팬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구요. 오히려 제인 오스틴의 팬들은, 그리고 BBC의 팬들, 그리고 더 정확히 하자면 BBC의 팬노릇을 거쳐 제인 오스틴의 팬노릇을 하게 된 사람들은 일견 달달해 보이는 러브 판타지의 외양을 뚫고 삐죽삐죽 솟아나와 있는 주인공들의 날카로움과 냉소, 그리고 또다시 이들의 그 부족한 면을 살짝 비틀며 냉소하는,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따뜻한 애정을 잃지 않는 제인 오스틴의 필치를 사랑하는 것일 거예요. 게다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19세기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시대와 배경이 다른 고전 – 그것도 서양 고전 – 을 읽는 이유는, 일부러 그들과 나의 갭을 유지함으로써 우회적으로 감정이입을 하는 즐거움도 있기 때문이죠. 이 영화는 그 부분을 완전히 깎아내려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더이상 제인 오스틴의 소설의 영화화가 아니죠. 그건 그냥, 제인 오스틴의 공식을 가져다 만든 흔하디 흔한 로맨스 영화가 돼버립니다. 내세울 것 없지만 존심 강하고 발랄하며 똘똘한 여자와, 부와 지를 갖춘 왕싸가지(그러나 알고보면 따뜻한 면과 상처도 갖고 있는) 남자의 사랑이라, 이건 얼마나 전형적인 로맨스의 공식인가요.

그러나 로렌스 올리비에의 다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눈에는 분명, 콜린 퍼스의 다아시 역시 지나치게 달달하고 지나치게 격정적일 겁니다. 고전은 끊임없이 시대에 맞춰 재해석되고, 재구조화되고, 새로운 팬을 찾아나서기 마련입니다. (사실 그게 고전의 매력이자 힘이죠.) 그러니 사실, 이 <오만과 편견>이 내게 이토록 달달하고 개성없게 느껴진다 해서 그것에 불평하는 건 팬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객관적 작품성과 의미 자체를 폄하할 객관적 근거가 되지는 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실 시종일관 불쌍하고 우울해 보이는 맥페이든의 다아시가 조지아나와 함께 있을 때, 그리고 펨벌리 저택에서 리지와 만나고 그녀를 초대했을 때 보여주는 함박웃음(정말 의외이고, 앞에서 계속된 뚱한 표정 때문에 정말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기도 하지요.)은, 미스터 다아시가 “정말로 말주변과 사교성이 없어서 오만을 가장하는 사람”이란 해석을 강하게 보여주긴 해요. (우리의 콜린 퍼스 버전 미스터 다아시는 별로 그래보이진 않죠. 어디가 그 사람이 ‘말주변이 없다는’ 단점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겠습니까. 리지와 그토록 불꽃튀는 설전을 벌였던 사람인데 말예요! 게다가 그에겐 사교성 같은 것도 별로 필요없어 보이잖아요. 지는 가만 있어도 모두가 좋다고 덤벼들 만한 사람인데!)

그래도… 제겐 역시 BBC 버전이네요. 이 영화가 그토록 정신없이 몰아치다가 가끔, 지나치게 설명조가 될 때 불편했던 것, 위에서도 말했지만 영화 내내 숨이 막힐 듯 답답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전 역시, 오만하고 싸가지 없고, 그런 자기 모습을 직시하게 되면서 당황하고 새로운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다아시가 훨씬 좋습니다. 지나치게 호들갑스러운(그래서 유쾌한) 미시즈 베넷도, 철딱써니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리디아 / 키티 베넷도 BBC 버전이 더 마음에 들고, 이 영화의 너드 콜린즈보다는 얍삽함과 비굴함으로 똘똘 뭉칭 BBC 버전의 콜린즈가 조금 더 사랑스럽습니다. (사실 ‘너드 콜린즈’의 매력이 좀 막강하긴 했어요. ㅎㅎ)

ps. 모든 “시각화된 <오만과 편견>”의 피할 수 없는 딜레마인가 봅니다. 소설에서 “근동에 소문난 미인”으로 설정된 제인이 언제나 리지보다 못한 외모의 배우로 캐스팅되는 것은…

ps2. 브렌다 블리씬은 정말 낭비됐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아니, 그 연기 잘 하는 아줌마를… 데임 주디 덴치는 원작에도 없는 장면을 만들어 넣어주면서 말이죠! (우와, 근데 데임 덴치의 그 위엄이란! 물론 데임이 <미스 라벤다>에서 보여주는 왕 귀여운 (약간 푼수) 연기에 껌뻑 넘어간 저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데임 덴치가 보여주시는 그 왕재수에 도도한 레이디 캐서린 드 버그도 정말 멋졌어요.)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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