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민 | 당신이 잠든 사이에 (2008)

당신이 잠든 사이에

대두짤 비율이 어설프다.


잘나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는 여자가 분수에 차고 넘치는 남자를 좋아하다가 미끄러진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녀의 주변엔 오랫동안 그녀를 흠모하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한, 나름 진국인 남자가 있다. 약간의 오해와 꼬임 끝에 그들은 서로 진심을 확인하고, 새삼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고 행복하게 맺어진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로맨틱 코미디의 이 흔한 공식을 한 치의 예외 없이 그대로 실행한다. 판에박힌 공식을 ‘잘’ 구사하면 꽤 괜찮은 장르물이 되련만, 이 영화는 장편 극영화로서의 흐름이 못내 버겁다는 듯 툭툭 흐름이 끊어지기 일쑤다. 웃음이 터져야 할 타이밍의 리듬도 어설프고 부담스럽다. 그런데 이 모든 단점을 단번에 상쇄시켜주는 존재가 있으니, 그건 바로 예지원이다.


신기 들린 슬랩스틱 코미디. 예지원의 코믹 연기를 두고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건 단순히 그것으로 인한 찰나의 웃음뿐이 아니라, 지지리 궁상밖에 안 남은 초라한 미혼의 30대 여자가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펼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뿐 아니라 전작인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도 그랬다. 그가 맡은 여주인공들은 워낙 자기 세계가 강해 남들 눈엔 살짝 맛이 간 여자로 보이곤 한다. 그러나 남들이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물론 쪽팔린 순간에 그녀는 충분히 쪽팔려 한다. 누구나 평소에 겪는 어리버리함으로 인한 민망한 실수들, 그러나 연예인들은 절대로 겪을 것 같지 않는 그런 실수들을 예지원은 스크린 앞에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서 온몸을 허둥대다가, 순발력도 없어 그 상황을 제대로 모면도 못하고 망신은 망신대로 다 당한 뒤 나중에 혼자 가슴을 치며 민망해한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예지원의 주인공들은 아무리 쪽팔린 순간이라도 그땐 그 나름의 사연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그 순간만 지나면 새카맣게 잊고 내일을 향해 나간다. 언제 민망한 일이 있었냐는 듯 뭐가 그리도 좋은지 샬랄라 팔랄라다. 그럴 수밖에. 그녀라면 능히 어제 저지른 실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줄 또다른 대형실수를 오늘 또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씩씩함은 실은 한번도 잘나본 적도 주목받아 본 적도 없는 여자의 처절한 자기방어다. 그렇기에 그녀가 영화에서 딱 한 번 마침내 울음을 터뜨릴 때, 그녀는 진심을 다해 울고, 이 눈물이 또 보는 사람의 가슴을 절절하게 에이게 만든다.


그녀의 캐릭터가 이토록 빈틈이 많아보이는 건 실제로는 많은 경우 남자 감독들이 그 여자를 그리는 방식이 어설퍼서이지만, 그 여자를 연기하는 예지원은 “저 여자는 원래 그렇게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설득력을 덜컥 부여해 버린다. 그러니 그녀가 아무리 계절과도 유행과도 안 맞는 공주옷을 입고 과장스러운 자아도취의 몸짓을 하든, 좋아하던 남자 앞에서 착각도 대단한 착각에 빠져 혼자 황홀한 표정을 짓든, 우리는 그녀를 보며 함부로 정신나갔다며 비웃지 못할 수밖에. 그녀를 향해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웬지 그녀에게 그냥 믿음이 생기고 연민을 가지면서 더없이 생생한 사랑스러움을 느껴버리는 것이다. 비록 이 영화에서는 <올드 미스 다이어리> 때보다 캐릭터가 더 얄팍해지긴 했지만, 예지원이 그려내는 여주인공은 언제나 김선아가 그려낸 김삼순도 미쳐 도달하지 못했던 저 밑바닥의 처절함을 슬랩스틱 연기에 완벽하게 용해시켜 스크린에 펼쳐보인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예지원과 탁재훈의 환상궁합.


스크린으로 진출한 탁재훈이 ‘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이런 주책 여자 캐릭터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다. 적지 않은 수의 영화에 이름을 올렸지만, 탁재훈이 정말 빛을 발한 건 <내 생애 최악의 남자>와 함께 이번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다. 공통점은? <내 생애 최악의 남자>의 염정아도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예지원도 지지리 궁상 주책의 노처녀면서 남들이 뭐라든 자기 길을 꿋꿋이 가는 고집불통의 드센 여자들이라는 점. 그리고 두 영화 모두에서 탁재훈은 그녀들을 옆에서 충실히 보조해주고 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워낙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염정아가 그런 여주인공으로는 다소 안 어울렸기에 탁재훈과의 케미스트리도 살짝 엇박자가 났던 반면, 실제로는 무척 아름다움에도 스크린상에선 웬지 만만하고 촌스러워 보이는 ‘착시’를 주는 예지원과는 찰떡 궁합을 자랑한다. 곁에 있으면 재미있지만 그렇다고 저 멀리 있는 스타는 아닌 소박한 옆집 오빠 내지 소탈한 동네 친구의 이미지를 탁재훈만큼 부담없이 활용하는 배우도 드물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선남선녀들의 연애 얘기가 아니라, 술자리에서 낄낄거리며 놀려대기 딱 좋은 내 주변 친구의 아기자기하고 만만한 연애담이 된다. 단점투성이의 이 영화에서 이런 장점을 뽑아내 준 것은 분명 두 배우의 공이다. 탁재훈은 더이상 ‘스크린에 진출한 코미디언’이 아닌 ‘배우’로서 평가받아야 하며, 예지원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녀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8월 14일 개봉.






ps. 8월 1일 금요일 4:30pm, CGV용산, 기자시사


ps2. 프레시안무비에 기사로 올라감


ps3. ‘4차원 개그’의 본좌인 예지원 언니, 부디 좋은 각본과 연출자를 만나시길.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예지원이 나오는데도 영화가 땡기지를 않는게, 제가 탁재훈을 아직 배우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흠,흠.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 솔직히 다른 이의 이름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 슬랩스틱 코미디를 소화하는 여배우, 예지원이 정말 좋은 각본과 연출자를 만나길 저도 기대해요.

    • 솔직히 영화는 좀… 예지원이 좋은 각본과 좋은 연출자를 만나 찍은 영화가 나왔을 때, 그때는 적극 추천을 하겠습니다만. :) 전 < 드미스 다이어리>가 꽤 좋았습니다. 예지원이 확성기 들고 울면서 소리칠 때 같이 통곡하며 울었던 전력이…;;; 다만 여기서 지현우는 탁재훈처럼 보완해주는 것이 아닌, 철저히 트로피 토이로 전락해있는 게 좀 껄쩍지근하더라고요. 그 트로피 토이가 또 나름 상큼하긴 합니다만. 서승현 아주머니의 에피소드가 또 굉장히 좋았던…

      탁재훈은 오바만 안 하면 괜찮더군요. 다행히 < 생애 최악의 남자>부터는 자기가 어필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찾아낸 듯해요. 임창정이 마땅히 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이상하게 피해가고 있는 걸 탁재훈이 딱 찔러서 해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자시사 다니다 보니 그냥 관객이었을 때라면 별로 보지 않았을 영화도 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스스로 생각해봐도 뜻밖의 사람에게서 가능성을 엿보게 되기도 하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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