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크로넨버그 |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2007)

Eastern Promises

포스터부터 포스가 남다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현재 러시아 및 유럽 전역에서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오르가니자치야’라고 불린다) 중 최대 조직인 보리 V 자콘 파를 소재로 한다. 자료들에 의하면 보리파는 구소련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세력을 키웠고, 구소련이 해체된 후 옛 소련땅은 물론 유럽 전체에서 급부상했다. 러시아 마피아 중 보리파가 아닌 신흥조직들도 대체로 보리파의 영향을 받았다. 영화에서 묘사된 대로 복역한 죄와 수용소 및 감옥에서 겪은 경험을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아마도 <대부>가 미국에서 마피아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해준 영화였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유럽 전역에서의 오르가니자치야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와 마찬가지로, <이스턴 프라미스> 역시 실제 범죄조직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런던에 자리잡은 이민자 사회의 착취자이기도, 보호자이기도 한 범죄조직을 통해 인간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대부>가 폭력으로 점철된 미국 역사 및 사회구성에 대한 분석에 가까웠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좀더 실존적이다.

이 과정에서 <이스턴 프라미스>가 취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영화는 범죄조직에 공통적인 ‘신고식’ 살인으로 시작한다. 조직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주로 미성년자나 젊은 청년)에게 살인을 사주하는 것이다. 이후 장면은 출산이 임박한 채 하혈을 하는 어린 소녀, 타냐로 전환된다. 소녀는 결국 아이를 낳고 죽는다. <대부>에서도 아기의 세례식과 정적 숙청 장면이 교차편집되고 있고 콜레오네 ‘가족’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스턴 프라미스>는 아예 영화의 중심축이 삶과 죽음의 명확한 대비이다. 이 과정에서 소가 낳은 아기, 크리스틴은 영화의 중심 키가 된다. 아기를 죽이려는 이들과 아기를 지키려는 이들 사이에 무시무시한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세묜은 자신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니콜라이를 적의 손에 넘겨주었으면서도 크리스틴을 죽이려 든다. 아버지에 대한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던 키릴은 차마 갓난아이를 죽이지 못한다. 안나는 그녀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인다. (… 하략)

Eastern Promises

이들은 유사가족을 이루는 듯하지만 결국 악의 세계에 떨어진 남자는 가족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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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평자들이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 <이스턴 프라미스>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전작인 <폭력의 역사>와 댓구를 이룬다. 선량한 가장이자 영웅의 얼굴을 한 킬러, 그리고 킬러의 얼굴을 한 정부 요원이자 수호자, 두 캐릭터 모두 비고 모텐슨의 복잡다단한 연기를 입고 비로소 실체화된다. <폭력의 역사>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했던 톰은 결국 과거의 자신인 ‘킬러 조이’와 조우한다.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정부 요원 니콜라이는 보리파에 의해 납치된 여자와 안나의 삼촌을 구하고 안나와 크리스틴을 보호하지만 결국 그 자신은 세묜을 대신해 새로운 보스가 된다. 선과 악은 이토록 한 존재의 양면이며, 선량한 이들의 안전과 보호는 이들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폭력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 크다. 그렇기에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던져진 질문에 대한 크로넨버그 자신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러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면서도 폭력을 옹호하고 있지는 않다. 키릴은 결국 울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한다. 안나는 니콜라이의 보호를 받긴 하지만, 결국 크리스틴을 구한 것은 안나의 적극적이고도 용기있는 개입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직의 보스가 된 니콜라이가 여전히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영화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올리고 원피스 치마를 입은 안나의 표정은 행복에 차있으며 그녀의 집은 밝은 햇살로 가득하다. 안나와 니콜라이는 분명 서로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크리스틴의 준-부모의 역할을 하지만 결국 니콜라이가 안나의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구원의 은총은 때로 폭력의 개입을 거치긴 하더라도, 결국은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과 자기희생의 용기에서 비롯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스턴 프라미스>에게 바쳐지는 러시아마피아 판 <대부>’라는 찬사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오히려 <이스턴 프라미스>의 가치를 깎는 결과가 된다. 두말할 필요기 없는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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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1월 26일, 오후 2시 용산CGV, 기자시사

– 뱅상 카셀이 그리고 있는 키릴은 따로 언급하면 글 하나 나올 분량의 독특한 서브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죽여야 할 갓난아기를 안고 우는 키릴의 모습이야말로 여느 갱스터 영화에서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일 터인데, 이 장면으로 이 캐릭터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마침내 완성된다. 니콜라이에게 동성애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그 누구보다 ‘호모’라는 욕을 많이 사용하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니콜라이에게 섹스를 강요하기까지 한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저 놀기 좋아하고 가끔 소소한 사고나 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 그는 하필이면 범죄조직 보스의 아들로 태어나 후계자로서 응당 요구되는 마피아적 자질, 즉 냉혹한 잔인함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계속 자기 파멸을 겪는 인물이다. 내게는 그가 알콜중독인 이유조차 결국 그의 선한 기질이 그의 마피아 조직의 후계자라는 조건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은 니콜라이보다도 더 많이 내 눈을 끈 캐릭터인데, 뱅상 카셀이 이 캐릭터를 ‘그저 찌찔하기만 한 놈’이 아닌 연민과 이해가 가는 놈으로 그려줘서이기도 하다. 뱅상이는 역시 살짝 미친놈으로 나와줘야 예쁜데, 최근의 그는 너무 얌전한(!) 역으로만 출연했다.

– 북유럽적 외모를 가진 비고 모텐슨이나 창백한 금발미녀로 어찌 보면 슬라브적 피가 좀 있는 것도 같은 나오미 와츠가 러시아 인으로 나오는 건 그럭저럭 어울리는 편이긴 한데, 전형적인 골족으로 생긴 뱅상이가 러시아 인을 연기하는 건 좀…

– 나오미 여신님! 나오미 여신님! 여기선 또 어쩜 그리 런던 사투리를 그렇게 똑 떨어지게 하시나요. 감독의 국적 때문에 이 영화가 막연히 캐나다의 어딘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액센트를 들으면서야 배경이 런던임을 깨달았다는. 지명이나 지역 지표가 없어도 액센트 하나만으로 공간 배경이 어딘지 알려주시는 그대는 진정… 여신님… ㅠ.ㅠ

– 아민 뮐러-슈탈은 인자한 표정 뒤의 강압적이고 잔혹한 아버지 역할 전문배우이신 건가요. 이 배우의 존재와 이름을 처음 인지한 게 <샤인>이었는데, 거기서도 딱 그런 아버지 역이었지 아마.

–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잔혹 엽기 장면이 포함돼 있다. 시체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 그 단면을 보여주는 컷, 그리고 면도칼로 목을 따고서 피가 철철 솟는 장면의 정면 샷 두어 컷. 이 모든 장면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장면들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주는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 보리파에 대한 얘기를 좀더 덧붙이자면, 보리 V 자코네는 ‘법을 지키는 도적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의 내부 규율 중엔 국가의 의무징집 등에 따르지 않는 조항이 있는데, 2차대전 당시 스탈린이 “참전하면 죄 없애준다”고 꼬드겨서 다수가 입대를 하고, 이로인해 정통파와 입대파, 소위 배신자들 사이에 꽤나 큰 내부 분쟁이 생겼다고 한다. 워낙 ‘배신자들’ 숫자가 적지 않았던 터라 이 규정은 좀 완화가 됐다는데, 정작 스탈린이 뒷통수를 때렸다는 거.

– <이스턴 프라미스> 때문에 본 책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이스턴 프라미스>를 보고 이 리뷰를 쓰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준 책에 대해 곧 프레시안에 리뷰기사를 올릴 예정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7 Comments

  1. 굉장히 기다렸던 리뷰입니다. +_+ 사실 어둠의 경로로 먼저 접하고 나서, 이건 정말 큰 화면으로 제대로 보고 싶다!!라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결국 어영부영 못 보고 넘어가버리게 될 거 같아서 너무 아쉽습니다(찾아보니 이번주 토요일에 서면CGV서 저녁에만 상영하니까 아마 담주 중엔 그냥 사라질 듯;;).
    사실 니콜라이도 니콜라이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키릴이 아닐까 싶습니다. 니콜라이의 내적인 고뇌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더 부각시켜서 보여준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워낙 연기가 쟁쟁한 배우들이라 정말 푸짐한 성찬과도 같았지만 뱅상 카셀이 연기한 키릴이 있기에 이 영화가 한층 더 제게 와닿았던 것 같아요.

    • 이 좋은 영화가 그냥 조용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게 너무 속상합니다. < 먼 자들의 도시>도 의외로 흥행을 했는데, < 스턴 프라미스>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확실히 초기 관객 유입에 조금 힘이 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왕님의 광팬이신 misha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실 정도니, 확실히 이번에 뱅상이가 잘하긴 잘한 듯합니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키릴의 내적 고뇌가 그냥 양념 정도로만 존재했을 텐데, 이 영화에선 니콜라이의 고뇌와 팽팽한 대립을 이루면서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고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키릴 버전의 속편 팬픽을 쓰고 싶을 정도니 말입니다. (뭐 감독님이 속편을 찍어주시면 더욱 좋겠지만요.)

      크로넨버그와 모텐슨은 정말 잘 만난 케이스인 듯해요. < 지의 제왕>이 끝난 후 한동안 왕님 이미지에서 못 벗어나고 그냥 주저앉겠구나 싶어서 좀 아쉬웠거든요. 모텐슨의 아라곤이 너무 강력해서, 아라곤이 아닌 모텐슨은 좀 상상하기가 힘들었는데… < 력의 역사>에 이어 < 스턴 프라미스>에서도 이렇게 멋지게 연기를 보여주시고 크로넨버그도 워낙 연기를 잘 뽑아내주셔서, 이젠 왕님이 앞으로 무슨 영화에 출연하든, 또 크로넨버그가 무슨 영화를 연출하시든 다 버선발로 달려가서 보고싶다는 마음입니다.

  2. Pingback: SabBatH
  3. 안 그래도 혹시 평을 써주시지는 않을까, 방명록으로 여쭤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확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중앙시네마 내일 상영시간을 보니 ‘그래도 하지 않았어’와 연달아 볼 수 있겠네요. 두 영화 모두 무지 기대됩니다. :-)

    • 정말 괜찮은 영화입니다. 바쁘신 와중에 한번 시간내서 보실 만합니다. < 래도 하지 않았어> 역시 강추작이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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