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노 비스콘티 | 베니스에서 죽다

미를 향한, 추락하는 남자의 비통한 아름다움




Death in Venice

Venice, the City of Water


2시간 10분의 러닝타임 동안, 휴양차 베니스에 온 작곡가 구스타프 아흐바센이 역시 그곳에 가족과 휴양객으로 온 절대 미모의 폴란드 소년 타지오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줄거리의 다다. 휴양 온 관광객의 동선이란 다들 비슷한 법이어서, 그는 하루종일 그의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그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한다. 이러한 탓에 영화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고, 실제로 같이 간 J.는 결국 잠이 들고 말았지만, 그 순간을 넘기자 나는 어느새 구스타프의 환희와 혼란과 떨림과 절망과 고통의 궤적을 함께 하고 있었다.


예술은 인간의 창작의 결과이고 노동의 결과물이라 믿어온 그에게, 완벽한 절대미의 화신으로 나타난 타지오를 보는 것은 미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아울러 자신의 믿음에 대한 회의, 그로 인한 혼란과 고통이 될 것이다. 아울러 어린 소년에 대한 자신의 그러한 갈망이, 상대방에겐 채 도달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주변을 감싼 공기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랑한다”는 말이, 사회적으로 안정된, 권장된 삶을 살아온 그에겐 스스로에 대한 충격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번번이 대립하던 알프레드의 말이 결국 옳았다는 살아있는 징표로서의 타지오를 보며, 그가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죽는 건 당연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젊어지겠다며, 이발사가 해준 염색과 화장에 그가 준 꽃을 꽂아들고 가게문을 의기양양하게 나서는 구스타프를 보며 마음이 찢어질 것같았다. 그렇게 의기양양해 하다가, 막상 타지오를 보고는 역시나 말도 못 붙인 채 그저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따금 마주치는 타지오의 그윽한 눈길을 보고서도, 하다못해 밥은 먹었니, 한 마디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점차 식은 땀을 흘리며 그 땀에 염색약이 번져 이마를 흘러내리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늙어보이고 초라해 보이는 구스타프를 보며, 나는 오래 전 R이 인용하고 코멘트를 덧붙인 롤랑 바르트의 글을 떠올리고 있었다. 늙음은 불경 중에서도 불경이라고, 영화에서 알프레드가 대사를 한다. 이것은 비스콘티의 심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딱 베니스라는 배경과도 맞물린다. 누구나 찬탄을 바치는 아름다운 물의 도시는 실제로 역병이 창궐하고, 관광객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소독약만 살포된다. 물의 도시 베니스는 아름다운 죽음의 도시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 특히가 남자가 나이가 든다는 것은 권력의 안정화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 종이 호랑이일지도. 애꿎은 호통의 할아버지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권력이 박탈되었다는 것을 웅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젊고 싱그럽고 아름다운 그 아이에게 향할 수밖에 없는 구스타프의 눈길. 일반적인 관음증에서 도출되는 시선의 권력은, 시선을 받는 젊고 아름다운 소년과 그저 훔쳐볼 수밖에 없는 나이든 중년의 인간관계에서 역전된다. 사실 관음증은, 보는 자와 봄을 당하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가 아니라 시선을 통제하는 자와 통제당하는 자 사이의 권력관계다. 시선을 몰래 향하는 자가 아니라 시선을 조종하는 자(관음증 피해자는 조종과 통제의 능력이 없다)가 권력의 상위다.





Death in Venice

관음증의 일반적인 권력관계가 뒤틀려 있다.







귀족의 후예이고 공산당원이었던 비스콘티가 이 영화를 찍는 건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그는 말년에, 자신이 평생 지키고 가꿔온 신념을 조금은 후회하고 회의에 젖었을지도 모르겠다. 쓸쓸하고 슬프고 아팠던 영화. 추락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슬프고 아프고, 비통하게 아름답다.




ps. 구스타프 말러를 모델로 한 토마스 만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답게, 영화 내내 말러의 음악이 나온다. 특히 교향곡 3번과 5번. 말러와의 인연이 시작될 것같다.




** 이 영화는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3월 24일부터 4월 16일까지 열린 “월드시네마 기획전 III”에서 상영되었습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 선을 몰래 향하는 자가 아니라 시선을 조종하는 자(관음증 피해자는 조종과 통제의 능력이 없다)가 권력의 상위다.>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었군요.
    추락하는 남자의 입장은 아니지만 역시나 늙어가는(_ _) 여자의 입장에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슬프고 아프고, 비통하게 아름다웠습니다…

    • 관음증에서 일반적으로 보는 자가 보이는 자보다 권력의 상위이지만 이 역시 결국은 시선을 누가 통제하는가와 관련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미’의 육화된 존재로서 비요른은 정말 완벽한 존재였지요… 그를 보며 추락해가는 구스타프 역시 참 비통하고요. 아마 저 역시 늙어가는 여자라 그런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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