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메이렐레스 | 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2008)

Blindness

포스터의 디자인이 매우 마음에 든다.

주제 사라마구의 베스트셀러 원작 소설을 이미 읽어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원작에 상당히 충실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 충실함이 지나친 것이 영화가 망가진 원인이라고도 한다.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을 당시부터 영화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아무래도 원작이 있는 작품들의 경우 그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는 게 인지상정이다. 대체로 원작만큼 훌륭하다거나, 원작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 건 그러니까 영화가 굉장히 뛰어나다는 소리다. 영화기자나 평론가란 사람들은 당연히 화제가 되는 소설은 그때그때 읽기 마련이기 때문에, 박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은 더 커진다. 하지만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떨까.

영화에 뜬금없이 삽입되곤 하는 애꾸눈 노인의 내레이션은 이 작품이 ‘소설을 원작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하나의 미봉책으로 보인다. 영화가 대체로 의사부인(줄리앤 무어)의 시선에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끼어들곤 하는 그 내레이션은 영화의 시선을 교란하고 전체 구조를 어그러뜨리기까지 한다. 시력을 잃은 이들의 시야를 원작에서 제시된 대로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노출을 극도로 한 화이트아웃 장면을 종종 삽입한다. 이런 장면들은 인물들이 겪고 있는 상황과 그 고통을 매우 강렬하고 생생하게 대리체험을 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면서도 관객은 동시에,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할, 그 더럽고 혼란스러운 아수라장의 광경들을 함께 본다. 혼자 눈뜬 자인 의사부인이 보는 광경을 한편으로 그대로 보게 되며 더욱 의사부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설에서 다소 자유자재로 화자와 시점을 옮겨갈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애꾸눈 노인의 내레이션이 더욱 이질적이고 불편하게 여겨진다. 다만 이 내레이션의 주인공이 더없이 믿음직한 대니 글로버인지라 그나마 덜 불편한 것일 뿐.

집단실명이 가져온 사상 최대의 비극이 관객에게 보다 생생하게 전달되려면, 영화라는 매체는 관객의 시각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호소하는 영상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 이 영화의 태생적인 아이러니이다. 눈먼 자들의 고통과 절망에 보다 가까이 가려면, 그것을 보다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끼려면, 관객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보통 때보다도 더욱 예민하게 시각이란 감각을 움직여야 한다. 감독은 다른 영화보다도 더욱 비주얼에 특별한 고려를 하며 시각을 자극해야 한다. 주제 사마라구가 한사코 영화화를 반대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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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를 따라, 드디어 저항에 나선다. 싸우는 자들은 아름답다.

눈먼 자들이 모인 폐쇄된 병동 안에서도 계급이 발생하고, 포악한 착취자가 등장한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위험함을 내뿜으며 흥미로운 악당 연기를 선보인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이 새로운 폭력적인 질서에 별다른 저항 한 번 해볼 틈 없이 순응한다. 심지어 악당이 죽었을 때도, “우리 안의 살인자를 색출해 갖다 바치고 용서를 구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계급이 발생하고 가장 일차로 무기가 되는 것은 식량이며, 가장 먼저 희생을 요구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것은 여자들이다. 이것은 사회의 성립과 특히 계급의 출현이라는 인류의 초기 역사에 대한 지독한 은유로 읽힌다. 공산주의자라는 원작자의 이력에 어울리는 통찰인 셈이다. 이 과정 자체가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지극히 괴롭고 고통스럽다.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그럼에도 이런 고통의 정점을 찍으며 가장 보기 괴롭게 만드는 장면은 바로 3병동 남자들에게 1병동 여자들이 집단강간을 당하는 장면이다. 다만 감독은 이 장면을 매우 거친 입자의 흔들리는 화면으로, 인물들의 몸은 드러내지 않은 채 얼굴만을 극클로즈업해서 찍었다. 강간이 지극히 함축적으로 보여진 셈이다. 물론 이런 식의 ‘보여주지 않는’, 그러나 비명과 통곡의 사운드가 강조된 화면이 더욱 공포스러운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 씬이 촬영된 방식은 최대한 여성의 신체에 예의를 갖추려는 모습, 영화가 여체를 착취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죽은 이에 대한 존중의 의지와 함께 신중한 배려가 함께 있는 듯 느껴진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죽은 여인을 다른 여인 모두가 함께 운반해 침대에 뉘이고 씻기는 씬이 더욱 파워풀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공포의 순간이 지난 뒤 찾아온 깊은 슬픔과 그나마 위안이 되는 자매애를 동시에 보여주며 신성한 감동을 선사하는 장면이 된다. 비록 심장이 아리는 고통이 공존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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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자본(가가픽쳐스)이 참여한 이유도 있지만, 이 그룹의 인종 비율은 꽤 세심하게 배려된 측면이 있다.

사실 이 영화는 그 지독한 고통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처음 설정부터 희망을 내포한다. 그것은 원작의 가장 기본적인 설정, 이 이야기 자체가 가능해진 가장 기초적인 설정에서부터 기인한다. 총을 한 자루 가졌고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와 팀을 이루었다는 이유로(갑자기 맹인이 된 이들보다 날 때부터 맹인인 자가 맹인생활에 더 익숙하고 다른 감각도 예민할 테니까) 바텐더는 병동의 왕으로 스스로 즉위하며 폭력적인 위계질서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에겐, 모두가 눈이 먼 상황에서 유일하게 눈이 보인다는 그 어마어마한 권력과 기득권에도 불구하고, 군림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에 헌신하는 주인공이 있다. 영화의 초반, 어딘가 나사 하나쯤 풀린 사람처럼 보였던 이 여자는 병동에 들어온 이후부터 한편으론 더없이 강해지고 지도자로 부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로 인해 갖게 된 권력을 오로지 병동의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 데에,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된 포식자를 응징하는 데에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사회에서의 질서는 재편된다. 인텔리 남성은 점점 힘을 잃고 약해지며, 누군가의 부인으로만 지칭되던 여자가 지도자가 된다. 그녀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할 정도의 너그러움을 가진 ‘진정으로 강한’ 자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애초부터 고통과 절망이 아닌 희망에 관한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고통스럽고 극도로 절망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전개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맞아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 원작과 영화 역시 기적의 해피엔딩을 맞는다.

물론 이 영화가 원작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영화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원래의 이야기가 전해야만 햇던 모든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했다. 그것도 단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적인 화면들을 통해, 매우 강렬하게 말이다.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게 영화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콘스탄트 가드너>는 보지 못했으니 언급할 수 없지만, 적어도 데뷔작이었던 <시티 오브 갓>을 생각해 보자면 그 작품이 결코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었음에도 감독의 영화적 역량은 더욱 성숙해졌고 통찰력도 깊어졌다. 내가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지지하는 이유다.

– 2008년 11월 6일 2시, 용산CGV, 기자시사

ps. 소설은 ‘눈먼 자들의 도시’로 발간됐는데 영화제목은 왜 ‘눈먼자들의 도시’인지. (띄어쓰기 말이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3 Comments

  1. < 뜬 자들의 도시>는 4년 뒤에 ‘눈뜬’ 유권자들의 대다수가 백지 투표를 하면서
    반정부 세력을 색출한답시고 난리를 피우는 내용이라더군요. < 먼 자들의 도시>를
    보면서 정치적인 은유가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원작 안읽고 본 경우임돠)
    그게 맞는 모양이예요. 그렇다면 < 먼 자들의 도시>는 핀트가 약간 안맞았던거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글쎄요, 전 < 먼...>에서도 정치적 은유는 충분히 있었다고 봅니다. 전 원작의 내용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도 영화를 보고 계급착취와 저항을 다루고 있는 우화구나, 라고 생각했는걸요.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멀었다’라는 것도 소비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자기 주체성도 의지도 잃어버린 채 그저 쇼핑이나 술로 허한 가슴을 채우려는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지 않은가 싶었는걸요.

      오히려 ‘눈뜬..’의 내용이 그렇다는 걸 알고 조금 실망이 들었어요. 은유라는 건 원래 그렇게 너무 직설적이 돼버리면 재미가 없어지지 않나요? 충분히 다른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유로움과 중의성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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