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률 | 이리 (2007) –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원래 이 글의 95% 이상이 <이리>의 언론시사가 끝난 후, 정식 개봉을 하기 전에 쓰여졌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영화 중 <경계>와 <이리>만 보았고, 이 글 역시 <이리>의 반쪽이라(고 감독이 주장하)는 <중경>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반쪽의 평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당시의 계획은 <중경>을 본 후 글을 마저 완성하자는 것이었지만 결국 이는 이뤄지지 못 했고, 이 글도 결국 매체에 발표되지 못한 채 메모리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 글을 꺼내도록 (네오이마쥬의) 백건영 편집장이 용기를 주셨다. 그 점을 고려하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리

장률 감독의 본격 한국영화, 그러나...

지금은 ‘익산’이라 불리는 옛 ‘이리’역에서는 30여 년 전인 1977년, 40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실은 화차가 폭발하는 대형사고가 났다. 보도자료가 제공해주는 정보에 따르면 이 사고로 59명이 사망하고 1,316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영화는 2007년을 배경으로, 이리역 폭발사고 30주년을 추모하는 행사를 취재하는 리포터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카메라에는 사고 당시 엄마 뱃속에서 진동을 받고 이듬해에 태어났다는 진서(윤진서)의 모습이 담긴다. 예쁘고 고운 그녀가 마을 사람들에게 일종의 백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녀가 어떤 폭력을 당하더라도 분노하거나 저항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진서는 마을의 불특정한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과 유산을 반복적으로 겪는다. 영화 초반, 역시나 유산으로 쓰러진 진서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오빠 태웅(엄태웅)의 무덤덤한 태도는 이런 일이 진서에게 한두 번 일어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의사는 그녀가 ‘습관성 유산증’이라 하고, 태웅은 오죽하면 의사에게 “그냥 불임수술을 해버리면 안 되나요?”라고 묻는다.

영화는 두 남매와 그 주변의 지리멸렬한 삶을 느릿하게 카메라에 담는다. 사실 진서가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니다. 중국어를 좋아하는 그녀는 동네 자그마한 중국어학원에서 청소를 비롯한 잡일을 해주고, 불법체류를 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한 명에게 기꺼이 빨래를 해주며, 과일가게의 꼬마 예진이와 친구로 지내고, 마을 경로당 한구석에서 오빠와 살면서 경로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사이좋게 지낸다. 중국어학원에 강사로 있는, 조선족 혹은 중국인 이주노동자와 언니-동생하며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매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다. 어차피 그녀는 자신이 당하는 폭력들을 그저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 여긴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녀는 “나는 술을 마시면 똑똑해져요.”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진서를 보는 태웅의 삶은 지옥에 가깝다. 원래 백치 본인 자신은 괴롭지 않다, 지켜보는 사람이 미칠 뿐. 택시기사로 일하며 진서를 부양하는 태웅은 꼭 필요한 말 외엔 입을 닫고 살며, 이 지옥의 삶을 여가시간에 도시 모형을 만드는 것으로 묵묵히 견딘다. 그러다 진서가 마을 다방 레지의 부탁을 받고 해병대 전우회 사무실에 대신 커피 배달을 갔다가 윤간을 당하자 그곳의 남자들과 레지에게 폭력으로 응징한다. 익산이 아닌 이리의 삶은 이토록 좌절과 공포, 분노와 폭력으로 얼룩진 곳이다. 더없이 적막한 이곳은 정작 사람들이 조용한 침묵을 필요로 할 때면 매번 느닷없는 소음이 공기를 찢곤 한다.

멀리서 찍은 롱샷을 주로 배치하며 한사코 인물에게 다가가기를, 혹은 관객을 인물 가까이 데려가기를 거부했던 장률 감독은 <이리>에서 보다 인물에 가깝게 밀착한 카메라로 자주 패닝을 이용해 관객을 적극적으로 인물에 접근시키고,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게 만든다. 심지어 카메라는 태웅의 좁디좁은 택시 안을 자주 비추면서 좁고 꽉 찬 화면을 선사하기도 한다. 도저히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졌던 <경계>의 씬들에 비하면 <이리>에서는 씬의 호흡도 퍽 짧아졌다. 분명 <이리>는 장률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훨씬 친절하고 편해진 감이 있다. 그러나 관객은 여전히 진서나 태웅의 심리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들은 종종 거대한 풍경의 하나 혹은 미장센의 일부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고, 그 어떤 폭력에도 거부의 몸짓을 보이지 않는 진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불가해한 대상으로 남는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그녀에게서 ‘천사’의 이미지를 읽어내기도 하지만, 죽여도 죽지 않고 돌아와 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은 차라리 아무리 지우고 잊으려 노력해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와 더욱 괴로운 ‘악몽’과 같다.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어른의 작정하고 덤비는 악의적인 행동보다 해맑은 어린아이가 아무 가책 없이 잔인한 행동을 하면서 짓는 환한 웃음이 더욱 무서운 것처럼. 많은 이들이 희망을 보았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내게는 오히려 무시무시한 공포와 절망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이리

때로는 당사자보다 지켜보는 자가 더 지옥일 수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진서뿐 아니라 장률 감독의 카메라 역시 여전히 불가해하고, 심지어 장률 감독의 전작들과 그에 쏟아진 찬사들마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대체로는 예산의 문제 때문이겠지만) 장률 감독은 이제껏 비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들의 소위 ‘양식화되지 않은 연기’를 카메라에 담아왔다. 몽골어나 중국어, 내지 조선족의 억양이 심한 한국어로 대사가 발화됐을 때는 그런 연기의 어색함이 별로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한국말, 특히 서울말로 대사가 발화되는 <이리>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종종 우리는 비전문배우들의 소위 ‘연기 아닌 연기’에서 지대한 감동을 받곤 하지만, 장률 감독의 영화에서는 오히려 어색함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경계>에서의 서정도 이번 <이리>에서의 윤진서도 그렇고, 전문배우마저 비전문배우의 어색함을 흉내내고 있는 듯 보인다. 장률 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이 진솔함을 지나 가식으로 의심되는 부분이 생겼다는 얘기다.

사실 장률 감독의 영화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양식화돼 있는 측면이 있지만, <이리>에서는 장르영화들의 해묵은 클리셰가 고스란히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격렬한 상처와 전쟁의 대리 전장터로 여성의 몸을 전방에 제시하며 여성이 당하는 강간을 거대한 폭력의 은유로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백치 같은 여주인공을 폭력의 희생물로 내세우면서도 그녀가 폭력을 폭력이라 인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감내함으로써 폭력을 더 이상 폭력이 아니게 하는 것, 나아가 모두를 구원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 역시 무수히 많은 다른 영화들에서 익히 봐왔던 설정이다. 주인공들의 삶을 스쳐지나가는 낯선 이방인들의 사연을 에피소드로 삽입하고 이들에게 지극히 어색한 대사를 주면서 ‘픽션이 아닌 실제의 인간의 모습’이라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주로 이리를 방문하는 타지의 사람들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이것도 노신사의 옛사랑 찾기, 낯선 여인의 성적인 접촉 시도 등 구태의연한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격적인 사건 직후 의외의 뜬금없는, 그러나 짐작이 충분히 가능한 씬을 바로 붙여 그저 관성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런 와중에 지나치게 노골적인 장면들이 간간이 튀어나온다. 예컨대 태웅이 레지를 불러낸 방에서 흐르고 있던 포르노 영화라던지, 목을 멘 노인의 벗은 알몸을 정면으로 비추는 장면이랄지. 이를 담는 화면과 잇고 끊는 편집은 종종 조잡하고 어색하며 덜컹거린다.

이리

천사?? 아니, 죽여도 죽지 않고 다시 목을 죄어오는 악몽, 혹은 트라우마.

혹자들은 그럼에도 그 안에서 발산되는 장률영화의 힘에 감동하고 그에게 지지를 보내며 그의 영화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한다. 이러한 장점들이 장률영화의 무수한 단점을 모두 초월해버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는 장률감독의 영화가 흡사 말더듬이의 발화처럼 여겨진다. 말을 더듬건 아니건 이야기에 힘과 재미와 진실이 있다면 말을 더듬는 게 무슨 상관이겠으며, 오히려 말을 더듬는 행위가 이야기에 오히려 긴박감을 부여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불행히도 장률 감독의 경우 더 이상 그게 아니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말하는 이가 이제 충분히 말을 배웠고 말더듬는 버릇을 뗄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말을 더듬거나 혀 짧은 소리를 낸다면, 혹은 말을 더듬는 와중에 전달하는 이야기가 지극히 상투적인 비유와 상징으로만 일관하고 있다면, 그가 자신의 재미없는 이야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더듬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의심된다면, 그의 소위 ‘진정성’에 대해서도 더 이상 신뢰하기가 힘들다. 

나아가 그를 향해 쏟아지는 칭찬이 혹 그의 말더듬이 버릇에만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그를 차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말더듬이의 발화에서는 그의 이야기 자체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청자 각각의 정서와 의도’가 이야기를 압도하는 경향이 더 크다. 심지어는 그저 말을 더듬을 뿐인 발화자를 ‘정신지체인’ 취급을 하면서 그에 걸맞는 기대를 했다가, 비장애인 수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지나친 상찬을 바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드러나고 강조되는 건 발화자, 혹은 발화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관용과 배려를 갖춘 청자’가 되기 쉽다. 이것은 오히려 발화자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언론시사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장률 감독은 윤진서, 엄태웅과 같은 나름 인정받은 배우들을 기용하면서 “내가 정말 감독이구나” 느꼈다고 했는데, 윤진서와 엄태웅을 기용하기 이전에도 장률 감독은 감독이었고 그것도 이런저런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지속적으로 차기작의 제작지원을 받는 감독이었다. 이제는 혀 짧은 소리를 그만 낼 때도 되었다.

+ 네오이마쥬 기고글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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