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시지 | 성난 황소 Raising Bull

추락하는 또 다른 남자



Raging Bull


거의 10년 전인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제이크 라 모타라는 인간을 도저히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단순포악한 성질은 그렇다 치고 의처증에 아내와 동생을 두들겨패는 그 대책없는 인생, 도대체 자기 실패를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남자들의 세계는 전혀 몰랐고 여자들의 세계에도 속해있지 못했던 나는 마틴 스콜시지의 세계의 그 누구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다만 그가 만드는 영화의 형식미에 대해, 평론가들의 권위에 기대어 감탄했을 뿐이다.

이제 10년 후, 즉 어제로 다시 돌아온다. 오늘 누군가에게 “It was another movie!”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랬다. 나는 경기 중 제이크의 얼굴에서 피가 솟구치는 장면이랄지, 오프닝에서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인터메조)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제이크가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을 처음 본 이래로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이 장면을 떠올리며 자동반사로 눈물을 흘리곤 한다, 어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제이크라는 한 인간, 위대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던 그 인간의 그 추락의 면면을 목격하고, 그에 감정이입하고, 그를 이해하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경험이 일어난 것은, 자신에게도 낯선 일이다.

몸이 비대해진 것은 그의 정신의 추락이 외적으로 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절정에 올라 챔피언 타이틀을 따기 전부터 이미 추락하고 있었고, 그의 파괴되어 가는 정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최고가 되려는 그의 목적은 챔피언 벨트가 상징하는 무엇이 아니라, 물적인 챔피언 벨트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그것의 획득은 그에게는 복싱이건 인생 그 자체건, 목표의 상실을 뜻하며, 그가 챔피언쉽 시합 전 다른 시합에서 지는 것(그의 무의식은 목표의 상실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그 패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순진하게 코치의 품에 머리를 박고 울 수 있는 것(영화를 통털어 그가 우는 매우 드문 장면 중 하나)은 당연한 것이다. 챔피언쉽 방어전에서 그가 딱 한 번 성공하는 것은 그 싸움의 이유를 억지로 외부에서 찾았기 때문이지만(아내가 그를 잘 생겼다고 했다!), 그런 식의 이유는 투지를 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싸움을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인생은, 이미 전조를 드러냈던 추락이 가시화되며 가속도를 맞는다.

한창 추락 중인 인간은 자신의 추락을 감지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추락이 경과된 후라야, 자기가 원래 있던 곳과 지금 있는 곳의 처지를 그 까마득한 갭을 비교하며 그제서야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다. 몸은 비대해졌고, 아내는 떠날 준비를 한지 오래이며, 돈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감옥벽을 쳐대며 “도대체 이 바보! 멍청이!”를 외칠 수밖에. 극도로 명암이 대비된 조명으로 찍힌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이 터지는 걸 느끼며 그와 함께 울먹였다. 이 바보! 멍청이! 내 삶은 이미 오래 전에 부서져 내리고 추락을 시작했음을, 꿈꾸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내가 있던 그곳, 내가 떠나온 그곳이 찬란하진 않아도 은은하게 빛을 내던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나는 얼마 전부터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깨달음은 너무 늦어버렸고, 다른 희망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른 채, 캄캄하고 좁은 감옥 안에서 그저 벽을 치면서 자학할 수밖에 없고, 그 자학의 상처에 또 고통을 느끼는 것. 언젠간 그 감옥을 나갈 거고, 그리고 다시 삶은 계속되겠지만, 상처는 남는 법이다. 그리고 비가 올 때마다 그 상처는 쿡쿡 쑤셔댈 것이다.

이제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떠났고,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그는 초라한 클럽의 분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리허설을 하고, 스스로 격려하기 위해 I’m the boss, boss, boss를 나지막히 외친다. 아무렴,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떠받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다시 계속되는 삶을 견딜 유일할 길이다. <베니스에서 죽다>의 구스타프는 차라리 죽어버리지만, 그는 죽지도 못 한다. 비통함은 계속되며, 아름다움은 비스콘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앞서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추락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의 비통한 아름다움’에 대해 썼지만, 사실 그건 반쯤 진심이기도 하고 반쯤 거짓말이기도 하다. 나는 가부장 사회가 남자들에게 얹어주는 코딱지만한 권리와, 그 권리의 이면이랍시고 몇 배로 얹어주는 어깨 위의 짐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것과 긴밀히 연결될) 남자의 추락의 본질에 대해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구석은, 영화를 만든 이들이 기대하는 면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고, 상당부분은 논리적 이해와 상상의 기반을 통해서다. 그럼에도 이해가 상당한 부분 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 남자들의 짐과 남자들의 추락에 대해 토로하는 영화와 책이 너무나도 많기때문이며, 남자들은 모두 그것이 ‘인간의 짐’이고 ‘인간의 추락’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소수자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한(그 ‘인간’이 백인 남성 비장애인 스트레이트만을 지칭하는 말임을 깨닫는 것은 언제나 늦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언어 외에 메이저의 언어도 자연스레 습득한다. 개중에는, 다른 소수자보다 훨씬 더 잘 습득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언제나 분열된 자아 내부에서 끝없는 투쟁과 충돌을 경험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 언제나 마티 영감님의 영화들은 내게 외부의 존재였다. 이제는, 외부자의 눈으로 그의 영화를 즐기는 방법을 찾아냈다.


ps. 까먹을 뻔했다. 이 영화를 필름으로 봐서 행복했다. 서울에서 한번 더 필름으로 볼 예정이다.


* 이 영화는 3월 24일부터 4월 16일까지 시네마데크 부산에서 열린 월드시네마 기획전 III에서 상영되었습니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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