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질링 단평

Changeling

1. 1928년에서 1935년. F. 스콧 핏제럴드가 명명한, 1차 세계대전 이후 반짝 누렸던 번영과 풍요와 물질 만능주의의 시대인  이른바 ‘재즈의 시대(Jazz Age)’가 종언을 고하고 뉴욕의 주식시세가 폭락하면서 대공황을 경험한 바로 그 때다. 안젤리나 졸리의 짙은 화장과 직장을 다니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진취적인 여성의 특징은 재즈의 시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2. 경찰을 묘사할 때마다 누아르적 화면이 등장한다. 특히 경찰청장이 존스 반장을 사무실에서 꾸짖는 장면은 강한 명암 대조를 이루며 특히 존스의 얼굴의 반 이상을 그림자로 채운다. 구스타프 목사(존 말코비치)가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에게 LA 경찰의 부패를 말해주는 장면에서 등장한 경찰들의 인써트 씬도 누아르 장르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사실 이 영화의 토대가 된 사건은 누아르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이야기이다.

3. 지혜로운 보수주의자 남성은 때로 진보를 자처하는 친페미니스트 남성보다 더욱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쉽다. 이 영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의 전반부는 대체 아무리 크리스틴이 “얜 내 자식이 아니라”고 강변해도 경찰과 그 일당은 너무나 어이없는 말로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데, 후반부에서 크리스틴을 돕는 착한 남자들도 크리스틴의 말에 별로 귀를 안 기울이는 건 마찬가지다. 재판 장면은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씬이다. “당신같은 경찰들 때문에 저 여자의 아이가 죽었다!”고 강력하게 변호사가 선언할 때 크리스틴의 그 묘한 표정이라니. 여성을 억압하는 것도 가부장제 하 남성들이지만, 여성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도 결국 남자들의 말을 통해야만 할 수 있었던 시대에 대한 극단적인 고발. 이 영화에서 크리스틴을 제대로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다. 감독은 크리스틴의 뜻과 의지를 고스란히 듣고 전달해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이스트우드 감독 역시 남자다. 이스트우드 감독도 분명 이를 통찰하고 있을 것이다.

4. 크리스틴의 말과 의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존중해준 사람이 클린트 한 명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체인질링>을 거장의 범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은 대체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긴 한데, 그것은 바로 이스트우드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위해 포기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이스트우드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일부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의지를 전적으로 존중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체인질링>은 내게 진정한 의미의 진짜 걸작이다.

5. 솔직히 이 영화, 쉽지 않다. 보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런데 7, 8천원 내고 별 웃기지도 않은 코미디를 보거나 별 감동적이지도 않은 영화를 보며 기분 상하느니 이 영화를 보고 제대로 진을 빼는 편이 훨씬 낫다. 세상에, 이런 걸작을 보는 데에 7, 8천원밖에 안 내도 된다는 건 이 ‘대량복제 시대가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사실 이스트우드 감독이 최근 10년간 내놓은 영화들 중엔 걸작 아닌 영화가 없다. 범작이라도 웬만한 감독의 잘 찍은 영화 이상은 된다. 하나씩 다 찾아볼 것을 권한다. (누가 어디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회고전 좀 해줬으면.)

6. 그러니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 부디 계속 건강하시어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많이도 안 바라고 그냥 1년에 영화 한 편씩. <그랜 토리노> 벌써부터 기대 만빵입니다.

7. 정식 리뷰를 쓰고 있는 중, 아마도 이번 주 내에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7 Comments

  1. 동감입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늙는 걸 보면 안타깝죠

    • 그러게요. 그나마 이스트우드 감독은 “무병장수가 원래 우리집 내력이다”라고 자랑하실 정도로 건강하시니 그저 다행이랄 수밖에요. 이스트우드 감독님의 어머님도 아직 생존해계신 걸로 아는데… 어쨌든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매년 찾아오는 깜짝선물처럼 여겨집니다.

  2. “지혜로운 보수주의자 남성은 때로 진보를 자처하는 친페미니스트 남성보다 더욱 여성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쉽다.”<--이스트우드 감독을 비롯해 전적으로 공감하고 싶어지는 말씀이네요.^^

    • 경험으로 워낙 많이 아는 사실이죵. 페니레인님이나 저나. ^^

  3.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 대한 생각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이 영화 개봉하길 기다리고 있어요.

    • 설 연휴가 지나고 나면 바로 개봉한다는데,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듯합니다. 사실 그 뒤로 줄줄이 왕 기대작들 개봉합니다. < 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 볼루셔너리 로드>, < 러들의 도시>, < 로스트 vs. 닉슨>, 거기에 < 우트>까지 개봉일 확정됐더군요.

  4. Pingback: ave, atque, v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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