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거울 Zerkalo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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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러시아 비디오판 커버.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은 비선형적인 시간 편집과 혼란스러운 이미지들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들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선형적인 시간 순서에 맞게 혹은 인과적인 논리 순서에 맞게 필사적으로 영화를 재조립하려는노력 대신 그저 이미지가 흘러나오는 대로 보고 있다 보면, 영화가 끝난 후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질 뿐 아니라, 그런 식의 ‘혼란’ 자체가 타르코프스키의 원래 의도였겠구나 싶은 부분들이 보인다.

영화에서는 컬러와 흑백 장면이 교차하지만 이것이 눈에 보이는 명백한 기준을 갖고 나뉘는 것도 아니다. 그 와중에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에 관한 뉴스릴이 다수 삽입돼 들어간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영화의 화자인 알로샤(혹은 알렉세이)의 어린 시절(과거)와 현재가 마구 혼란스럽게 교차한다. 과거에서 주로 드러나는 것은 알로샤와 어머니의 관계, 그리고 유년시절의 기억이고, 현재에서는 성인이 된 알로샤가 어머니를 꼭 닮은 전 부인 나탈리아와 그 사이 낳은 아들 이그넷과의 관계가 주축을 이룬다. 그런데 과거에서 어머니를 연기한 마르가리타 체레코바가 현재에서 나탈리아를, 과거에서 어린 알로샤를 연기한 이그넷 다닐체프가 현재에서 어린 이그넷을 동시에 연기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같은 배우가 1인 2역을 맡음으로서 과거와 현재의 교차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렇다면 타르코프스키가 배우를 이렇게 캐스팅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혼란을 가중시킨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리적으로 다른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비슷한지, 그러니까 과거의 관계가 현재의 관계에서도 어떻게 ‘반복’이 되고 있는지, 나아가 과거가 그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까지 어떻게 이어지며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엄마와 아들이 유난히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면서 ‘애증’이 쌓이고 복잡화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부재가 불러오는 결핍성, 이라는 특징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서도 알로샤에게 고스란히 반복된다. 알로샤가 느꼈던 그 애증과 결핍은 알로샤가 의도한 건 아니었으되 그의 아들인 이그넷에게 고스란히 세습되면서, 알로샤는 결핍과 부재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자리를 옮겨가며 비로소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일관되게 표현하려는 듯, 영화에서 성인이 된 알로샤는 스크린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아가 이 영화는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데, 영화의 제목이 ‘어머니’가 아니라 ‘거울’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 제목이 타르코프스키의 예술가로서 예민한 통찰력을 드러내준다는 생각이 든다. 거울은 실제를 실제처럼 비추지만 실제가 아니며 그 상은 어떤 식으로든 왜곡을 거친 것이다. 좌우가 바뀌는 건 기본이고, 거울이 약간 오목하냐 볼록하냐에 따라 왜곡은 더 심해진다. 우리의 기억, 혹은 회고란 것도 그렇다. 기억은 과거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한 흔적이지만 기억이 과거의 실제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기억은 파편적이며, 때로 실제보다 과장되고, 실제 있지 않았던 일조차 실제처럼 상을 형성한다. 그리고 당시 그를 가장 강력하게 압도하던 ‘꿈’의 기억이 실제 있었던 경험의 기억을 대체하기도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어린 시절, 특히 전쟁이 있었고, 어머니는 고통스러웠으며 아버지는 부재했던 그 시절 어머니와의 특별한 유대관계에 관한 ‘기억’과 ‘회고’의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거울’이 그렇듯, 우리의 실제 모습을 비추면서도 실제와는 차이를 내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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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곳을 응시한 채 '슬픈 눈을 하고있는' 어머니.

그렇기에 이 <거울>에서의 어머니는 화자의 기억의 파편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이에 따라 어머니에게 주인공이 갖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종류의 감정이 영화와 함께 흘러나온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연약하고 외롭고 슬픔이 눈에 배어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까다롭고 신경질적이기도 하며, 알로샤와 더없이 가까웠다가도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죄책감과 연민이 함께 느껴지는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인 한편 심지어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집에 없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앞에서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녀는 대야에 잠겨있던 그 긴 머리를 그대로 얼굴 앞으로 드리운 채 일어서서 걷는다. 이 장면은 흑백에 사방 벽으로 온통 물이 흘러내리는 이미지와 함께 제시되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마치 처녀귀신과 같아 꽤나 섬뜩하고 오싹하다. (사실 수직으로 하강하는 물의 이미지는 여자의 몸이 공중으로 뜨는 이미지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마다 반복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어렸을 적 잠을 자다 깨어 본 이 광경은 직접 봤다기보다 꿈에서 본 장면이거나 실제 이미지와 상상이 덧붙여진 왜곡된 기억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현재로 오면 알로샤의 아들 이그낫 역시 호러틱한 경험을 하는데, 아버지의 집의 티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낯선 여인의 부탁에 따라 푸시킨의 편지 책을 읽어주던 이그낫은 잘못 찾아온 아주머니 때문에 현관에 갔다 온 사이 낯선 여인이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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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영화 저리가라인 바로 그 장면.

영화를 보면서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와 데이빗 린치의 다수의 영화들을 떠올렸다. 영화의 초반, 한 공간에 여러 명의 어머니가 존재하며 동시에 거울 속에서 나이든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은,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고 동시에 평행하게 여러 차원이 존재하는 것을 묘사한 장면과 닮아있다. 한편 ‘사건’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매개로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나열되는 것은 데이빗 린치가 즐겨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과 상당히 닮았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가 제작년도에 있어 훨씬 앞서는 만큼 큐브릭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타르코프스키가 큐브릭의 영화를 보고 장면을 구상했을 가능성도 적어보인다. 실제로 평자들이 두 사람을 비교할 때 타르코프스키가 상당히 화를 냈다고도 한다. (반편 큐브릭은 상당히 재미있어 했다고.) 하지만 데이빗 린치가 <이레이저 헤드>를 만들기 전 타르코프스키의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정말로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는지으 여부는 나 역시 상당히 궁금하고 확인해보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나면 이 영화의 오프닝, 그러니까 유리 자라라는 말더듬이 청년이 최면요법을 받는 장면은 과연 영화 전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아마도 영화 전체를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여긴다면, 영화란 결국 최면술사의 최면요법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가 된다. 말 더듬기라는 것이 결국 파편화된 말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최면을 통해서야 그가 또렷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듯, 평소 파편화된 기억 조각들만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화란, 혹은 그 모든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허구’의 창작이란, 결국 최면 요법처럼 우리의 무의식으로 가라앉은 꿈과 기억을 환기시키고 그것을 내적 일관성에 의거한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것이 될 것이다. 비록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근거는 또렷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에 기반한, 보다 간접적이고 내밀한 일관성이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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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몸이 뜬 여인의 이미지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숭고한 '절대적 예술의 경험'을 선사하곤 한다.

+ 영화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들

1. 영화의 초반, 어머니와 헤어진 의사가 다시 길을 가다 멈춰서서 머뭇거리며 어머니 쪽을 돌아볼 때, 거대한 바람이 불면서 벌판 전체가 화면 후경에서 전경 쪽으로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풀이 흔들린다. 이것이 두 차례 반복되는 걸 볼 때 누구나 또렷한 이유없이, 자신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는 채 “아…!”하고 짧은 탄성을 내지르게 될지 모른다. 별다른 이유없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참 이상한 장면. imdb의 trivia 페이지를 보면 두 대의 헬리콥터를 카메라 뒤에 착륙시켜 스위치를 눌렀다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2. 공중부양 : 위에서도 말했듯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는 공중에 몸이 뜨는 여인의 이미지가 자주 나온다. 홀로 누워서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사랑을 말하는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에밀 쿠스트리차 역시 ‘공중부양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자신의 영화에서 종종 써먹는다.

3. 영화 속 전쟁의 포화와 폭격은 모두 흑백장면인 반면, 주인공이 1935년 목격한 옆집 창고의 화재는 매번 칼라 화면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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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샤(알렉세이)의 기억 속에 매우 강력하게 각인된 화재에 대한 기억.

4. 위에서도 말했듯 수직으로 물이 낙하하는 이미지 역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매번 등장하는 이미지인데, 이 영화에서 그 장면은 어머니의 긴 머리카락 때문에 상당히 무섭다. 웬만한 귀신영화보다 훨씬 무섭다.

5. 마르가리타 체레코바는 어머니 역을 할 때는 머리를 올리고, 나탈리아 연기를 할 때는 머리를 풀어내렸다. 머리를 푼 채 어머니를 연기하는 장면은 저 처녀귀신 장면 단 하나뿐이다.

6. 내레이션으로 시를 낭송하는 목소리는 타르코프스키의 실제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목소리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타르코프스키의 실제 어머니이다.

7. 영화의 상당히 후반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겨운 한때가 묘사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역시 어머니가 미래를 마치 비전으로 보는 듯한 장면으로 구성돼 있다.

8. 5살의 알로샤로 나왔던 배우와 아버지로 나온 배우는 실제로 부자간이다.

9. 푸시킨을 청했던 티테이블의 낯선 여인. 그때 알로샤는 이웃집 여인이 현관문을 두드려 나갔다 오는데, 티테이블의 여인과 이웃집 여인은 둘 다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 그래서 더 미스테리어스 / 호러틱한 장면이기도 하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4 Comments

  1. 와, 요즘 “거울”에 도전(?)하시는 분들 많네요.
    저는 (졸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도무지 다시 볼 엄두가 안 나요. 솔직히 영화보다 N님 리뷰가 더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타르코프스키포비아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 아트시네마에서 상영을 하니까 도전을 하지, 비디오나 DVD로 보라면 절대 안 했을 것 같아요. 전 이번이 처음인데, 친구 중에 워낙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같이 봤어요. 안 졸려고 극장가기 직전에 낮잠을 6시간이나 자고, 그로도 불안하여 커피를 들이키고 들어가 봤습니다. ^^

    • 무려 34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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