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클레이든 | LVK Lesbian Vampire Killers (2009)

trailer-lesbian-vampire-killers 여자친구에게 7번째 차인 쑥맥 지미와 사회부적응자에 여자만 보면 화색이 도는 플레치가 영국의 시골 중에서도 시골 크랙위치로 하이킹을 떠난다. 그런데 이 곳은 오래 전 강력한 레즈비언 뱀파이어 퀸인 카밀라가 죽으면서 저주를 내렸던 곳. 그래서 마을 처녀들은 18세가 되면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변해버린다. 카밀라는 맥클라렌 남작의 성검에 죽음을 맞으면서 맥클라렌의 마지막 후손의 피가 숫처녀의 피와 섞이면 자신이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크랙위치에서 지미와 플레치 일행은 우연히 만난 네 명의 미녀와 산장에서 묵게 되고, 곧 자신을 공격해 오는 여자 뱀파이어들에 맞서 악몽같은 하룻밤을 지내야만 한다. 어벙하고 쪼잔한 지미는 마침내 이곳에서 자신의 혈통과 운명을 알게 된다.

필 클레이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LVK>에서 LVK는 Lesbian Vampire Killers, 즉 ‘레즈비언 뱀파이어 킬러’의 약어다. ‘레즈비언 뱀파이어’란 말이 들어간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온갖 B급 유머와 음담패설로 무장한 뱀파이어물 코미디로, 영화제 측의 소개에 의하면 이번 영화제 상영작 중 가장 재미있는 영화 중 한 편이다. B급 호러치고는 컴퓨터 그래픽이 꽤 사용되기는 했지만,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조잡해보이는 CG의 질마저도 영화의 흥겨운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데 일조한다. 감독 스스로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이들은 딱 15살 남자아이들의 정신연령을 가졌다”고 GV에서 언급할 정도로, 이 영화가 구사하는 농담과 유머, 그리고 전제하고 있는 가치들은 정치적 공정함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애저녁에 은하계 저 편으로 날려버렸다. 플레이보이 모델풍으로 생긴 화려한 여자들이 아찔한 차림으로 울타리를 넘는 모습을 앙각으로 카메라를 잡아 슬로우 모션으로 비춘다거나, 주인공들이 그들이 한껏 몸매를 과시하며 춤을 추는 걸 침을 잔뜩 흘리며 쳐다보는가 하면, 그런 예쁜 여자들이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따라 18세만 되면 레즈비언이 된다는 것에 통탄하며 툭하면 남자의 성기나 여자의 가슴, 혹은 게이에 관한 질 낮은 농담을 내뱉는 식이다. 심지어 말뚝을 박거나 성수를 뿌리면 뱀파이어들이 거품을 부글대며 정액을 연상시키는(!) 우윳빛 피를 분출하며 죽을 정도다. 뱀파이어가 된 여성들이 벌이는 진한 키스씬도 이성애자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단단히 고려하고 만든 장면들이다.

단순히 장면만 그런 게 아니다. 뱀파이어는 원래 관능적인 존재로, 18세의 성인이 된 여자들이 모두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은 스트레이트 남성들에겐 악몽일지 몰라도 ‘여성의 힘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보여주는 클리셰에 가깝다. 뱀파이어 퀸의 저주에 걸려 모두 레즈비언이 되고 뱀파이어들을 신나게 쳐부수는 이 영화야말로, 얼핏 보면 더없이 편견에 가득한 동성애 및 여성 혐오 영화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미, 플레치, 마을의 목사님과 함께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로티는 가장 노출이 적은 탓에 유일한 생존자가 되고, 안경을 걸쳤다는 것으로 미모는 물론 지성까지 갖춘 존재로 상정되며, 무려 숫처녀에다 저 바보같고 소심한 지미를 좋아하기까지 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미를 구해주기도 여러 번이다. 이렇게 완벽한 여자가 지미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데다 레즈비언 뱀파이어 사냥에 나서는 충실한 이성애 신봉자이기까지 하니, 15살 정신연령의 남자들에게 로티는 그야말로 ‘완벽한’  여자인 셈이다. 결국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이나 다를 바 없는 목사와 이들에 기생해 사는 찌질한 남자들, 그리고 여성적 힘으로 뭉친 여자들과 적대하며 남자들 편에 선 여자가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고 연대한 여성들을 잡아 죽이는 형국이 된다.

Best_Lesbian Vampire Killers_Still (1)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모종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낄낄대거나 폭소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길티 플레저’로서의 웃음을 제대로 선사하며 흥겹고 캠피한 매력을 전한다. 의도적으로 옛 ‘싼 영화’를 흉내낸 자막과 화면들, 다소 과장된 여자 캐릭터들의 연기, 없이 얄팍하고 뻔뻔한 플레치와 소심하고 어벙한 지미 콤비의 궁합, 그리고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장면들이 주는 유쾌한 에너지까지. 지미를 괴롭히던 못된 여자친구가 뱀파이어가 된 채 찾아왔다가 지미와 플레치에게 처참하게 처리되는 장면에선 박수와 폭소가 저절로 터져나올 정도다. 게다가 이 영화의  아무리 게이와 여성, 특히 레즈비언 여성들에 대한 음담패설과 성적 대상화 농담이 난무한다고는 해도, 주인공인 지미와 플레치가 워낙 얼뻥하고 찌질한 캐릭터들인 까닭에 초반에 느껴지는 여러 불편한 감정들이 쉽게 웃음으로 전환된다. 게다가 뱀파이어들과의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영화에서 가장 저질 농담을 많이 구사하는 플레치는 뱀파이어들이 내뿜는 정액같은 피를 번번이 뒤집어쓰며 보는 관객에게 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과거 뱀파이어들의 전통을 충실히 클리셰로 활용한 덕에 그 영화들에 전제돼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까지 덩달아 불려나오기는 했지만, 이 영화는 묘한 지점에서 그것을 스스로 비트는 영악함을 과시하며 다시 한 번 관객들을 웃기고 있는 셈이다.

<LVK>는 본국인 영국에서는 15세 관람가로 개봉되어 일정한 흥행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농산물 회사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제작비를 모으던 감독에게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차기작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과연 국내에서도 개봉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설사 수입이 된다 해도 근엄하고 유머감각 없는 영등위 위원들의 ‘허락’을 통과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만큼, 이 영화를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즐길 기회는 이번 부천영화제가 거의 마지막일 듯하다.

 

ps 1. 부천영화제 월드판타스틱시네마 섹션 상영작. GV는 나뭉님이 진행하심.

ps 2. 프레시안 20일자 기사로 올림

ps 3. 로티 역을 맡은 배우 마이애나 버닝(이름도 참… MyAnna Burning이란다. 나의 애나가 불타고 있다?)은 미셸 파이퍼를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imdb에 들어갔더니 아예 대놓고 가장 닮은 사진들이 프로필 사진으로 올라 있다. 필모그래피를 보고야 알았네, 세상에 닐 마셜 감독의 <디센트>와 <둠즈데이>에 출연했었다고 한다.

ps 4. 사실 영화가 지미와 플레치와 심지어 로티마저 내내 놀리는 분위기가 있고 여자 뱀파이어들이 굉장히 매혹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어쩌면 이 영화야말로 오히려 역설적인 의미에서 게이-뱀파이어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긴 한다. 생각해 보면 영화의 2/3 내내 플레치에게 뱀파이어 피를 뒤집어 씌운 것도 그렇고, 막판가면 피가 말라붙어서 꼴불견이 되는 데다, 사실 게이 농담이 그렇게까지 많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에게 다시 한 번 죽는 카밀라란, 어쩌면 분명 역사상 ‘자연스럽게’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나 이성애 이데올로기에 억지로 질식당하고 압사당하는 동성애의 운명을 자조적인 역설로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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