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 | 범죄의 재구성

데뷔작으론 매끈하지만...

<범죄의 재구성>은 좀처럼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영화다. 헐리웃에서 아주 일반화된, 공식화된 이 장르의 영화는 이제껏 한국에서 한번도 제대로 나와본 적이 없다. (아직 안 본 <게임의 법칙>은 예외로 치자.) 이런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은 대부분 코미디를 빙자하여 과도하게 말장난에 기대어 코믹함을 던져주려고 하거나(이는 범죄영화의 ‘무거움’을 굳이 털어내 주려는 애처로운 시도다),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면서 지지부진하고 동어반복만을 반복하며 흐트러지곤 한다(구조의 실패). 그래서, 한국엔 범죄영화는 없고 조폭영화 혹은 깡패영화만 있었다. 아니면 잔머리 쓰는 영화만.


철저하게 ‘약육강식’과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법칙에 의거해 등장인물들 간의 두뇌싸움을 펼치는 이 영화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반전을 허풍스레 예고하며 그것에만 목숨을 걸지도, 개성없고 엇비슷한 등장인물들의 의미없는 슬랩스틱과 말장난으로 관객을 웃기려 들지도 않는다. ‘사기’를 주제로 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놀랍도록 정직하다. 끝나고나서 ‘이거야말로 진짜 사기 아니야?’ 싶을 정도다.


전체 스토리의 중간, 그러니까 은행 사기 사건 직후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진술을 통해 이전 시간들이 재구성된다. 주로 구로동 샤론스톤(염정아)과 얼매(이문식)를 통해서. 이들은 사건 후 잡혔거나 경찰의 감시하에 있다. 이들이 사건 관련자들, 혹은 관련자의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시간이 전개되고, 사건 관련자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리고 비밀이 밝혀진다.


감독이 영리했던 점은, 그 ‘비밀’이 영화에서 더이상 새로울 것도, 참신할 것도 없었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김선생(백윤식)의 행방이나 최창혁(박신양)의 죽음 등에 대해 ‘뭐가 있다는 식’의 지나친 연기를 피우지도, ‘누가 과연 배신자인가?’에 과도하게 집중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이 영화는 한편으로 ‘사기범죄극’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해 사건을 만들고, 이후 얼굴까지 뜯어고치고 다른 사람인 척 하며 다른 인물들을 속이는 설정은 굉장히 흔하다. 하지만 배추가 흔하다고 해서 ‘정말 맛있는 김치’를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닌 법. 영화에서 이 ‘흔한 설정’을 이용하는 방식은 매우 정석적이고 우직하다. 잔머리를 쓰지 않기에, 그 흔한 설정은 그럭저럭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 된다. “적어도 한국에서 이런 영화는 거의 처음”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김선생이 수술을 아주 크게 당하고, 그리고 또다시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슴 졸이며 화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감독이 요구하는 것 역시 그저 제3자의 입장에서 최창혁의 복수를, 혹은 김선생의 파멸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다.


하지만… 보면서 왠지 좀, 심심하다. ‘이 사건은 이런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런 감정 없이 혹은 논평도 없이 뉴스 보도하는 듯해서 말이지. 아무렴 어설프게 논평을 하거나 잔머리를 굴렸을 때 오히려 관객에게 야유를 받을 거라는 걸 충분히 알아서, 겠지만 뭐랄까, 신인감독들 특유의 패기나 이런 것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밍숭맹숭하고 싱겁고 별로 새콤하지도 않은 뽀인트 없는 나박김치를 먹는 맛이라 할까. 그리고 그림이 너무 안 예뼈. –;; 비주얼은 좀 후지고, 사운드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 시작부터 울려퍼지는 음악은… 따로 노는 듯. 결국 이 영화의 강점은 시나리오와 우직한 연출이다. 하긴, 요즘 그런 영화가 워낙 드물어서 상대적으로 이 영화가 튀긴 하지만 말이다.


ps 1. 다시 읽어보니 1문단이 이상했다. 한국영화는 왜 조폭영화, 깡패영화는 있어도 범죄영화는 없었는가. 곰곰 생각해본 결과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했다. 범죄영화는 보통 폭력과 아주 가깝게 결부된다. 아무리 두뇌싸움이라 해도 막판에 주먹다짐은 꼭 한번이라도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향수 및 미화와 더불어 대단히 마초적인 분위기를 동반한다. 그런데 <범죄의 재구성>은 “범죄영화치곤” 놀랍도록 마초냄새가 없다. 액션씬이 등장함에도.(그 액션씬이 “사나이의 멋진 액션을 묘사하더냔 말이다.) 여자만 골라 사기치면서 습관적으로 두들겨패는 제비는 영화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 그것도 자기가 사기친 여성의 손에.


ps 2. 아참, 천호진 딥따 멋있었다. 흘흘. 자기가 잡으려 발버둥치던 그 사기꾼들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 닳고 닳은 형사더라. 참고인이 작가라니까 대번에 친한 척 하는 그 속물연기도 너무 코믹하지도, 너무 튀지도 않으며 캐릭터에 근사한 (쌈마이) 매력을 선사하더라. 몇몇 대사는 자칫하면 졸라 어색했을 텐데 천호진이라 그럴 듯하게 넘어가기도 하더라는.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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