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느 퐁텐 | 코코 샤넬 Coco avant Chanel (2009)

Coco avant Chanel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보석과 옷으로 치장한 귀부인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녀는 남자 승마복을 개조한 바지정장에 납작하고 심플한 모자를 쓴 차림이다. 에티엔의 초대손님인 귀부인들이 대놓고 ‘미소년’이라고 부를 정도다. 파리 근교 시골에서 낮에는 재봉사로, 밤에는 싸구려 가수로 일하던 가브리엘 샤넬이 ‘성공’을 하겠다며 문을 두드린 곳은 자신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남작 에티엔의 대저택이었다. 정부라고는 하나 하녀들과 식사를 하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단기용 섹스상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뒤 그녀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용을 쓰는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눈물겹다. 소위 ‘잘난 남자에게 빌붙어 연명하는’ 여자들에게 흔히 가질 법한 거부감, 나아가 경멸이 단번에 안쓰러움으로 바뀔 정도다.


‘샤넬 이전의 코코.’ 국내에서 최근 개봉한 <코코 샤넬>의 원제는 이렇다. 사람들이 샤넬을 다룬 영화에 흔히 가질 법한 기대를 처음부터 차단하고 있는 제목이다. <코코 샤넬>은 고아원 출신의 가난한 재봉사가 어떻게 패션 제국의 수장이 되었는가, 그 고단한 여정과 치열한 싸움을 치르는 코코 샤넬을 다루지 않는다. 대신 미숙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그녀가 귀족의 잠자리 상대에서 영국의 사업가 아서 ‘보이’ 카펠의 정부로 옮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참 처절하고 구차한 젊은 시절의 가브리엘의 삶을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젊은 여자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접근을 했다가도, 가브리엘의 그 구차한 여정에 불쾌감을 느끼며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드는 것이다. <코코 샤넬>을 만든 감독이 배우 출신의 여자 감독 안 퐁텐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로맨스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하지만 이보다는, “역시 여자감독이라 구차한 여자의 인생의 치부를 제대로 까발렸다”는 선입견을 갖는 게 이 영화를 보는 데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갈 데가 없어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에티엔의 저택에 붙어있는 과정도 처절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어느 쪽에서도 그녀가 머문 곳은 ‘정부’의 자리다.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만든 결혼 따위의 제도, 흥!”이라고 외치는 급진적인 자유연애론자 여성에게도 정부, 특히 유부남의 정부의 자리는 껄끄럽다. 내가 사랑을 주도하며 적극적으로 기성의 권위와 제도를 부정하는 자리이기보다는, 남자에게 이용당하고 단물쓴물 다 빨리면서도 제멋에 취한 허세의 자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더욱이 다른 여성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자리가 되기 쉽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결혼이나 연애와 달리, 부르주아들이란 대체로 결혼은 정략적으로, 연애는 정부와 하면서 실질적으로 다부다처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성공하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과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하고 싶다’는 야망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다. 언제나 후자를 선택한 이들은 손쉽게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전자를 고수하는 사람들 역시 그 유혹에 시달린다. 혹은 가끔은, 후자를 선택하는 여자들이 흔히 자산으로 삼는 미모와 젊음을 질투한다. 젊고 미숙한 여성이 후자의 길을 가면서 혹여 상대를 살짝 잘못 짚고 서투르게 간을 보았다가는 무지막지한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초기 작품들도 대체로 그런 젊은 여자들을 비웃는 영화가 주가 아니었던가. 어쩌면 이런 식의 갈등과 야심 사이를 적절히 타협하고 봉합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은 결혼’에 대한 환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전자의 여성들이 후자의 여성들에게 갖는 경계와 경멸은,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다른 여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의 ‘가상의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의 경계와 경멸은 어느 순간 매우 손쉽게 연민과 이해로 전화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코코 샤넬>을 만든 안느 퐁텐 감독의 시선은 가브리엘 샤넬에 대한 이 양면의 시선을 고루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미 전작 <프라이스리스>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샤넬로 몸을 휘감은 전력이 있던 오두리 토투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퐁텐 감독의 의도를 한층 강하게 설득한다. <프라이스리스>에서 오두리 토투가 맡았던 캐릭터의 진짜 정체는 ‘꽃뱀’이었다.


Coco avant Chanel


영화의 말미에 비로소 제시되는 “코코 샤넬은 일을 하지 않는 일요일을 가장 싫어했다”는 자막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샤넬을 진정으로 구원한 것은 상류사회에서의 더부살이도 연애도 아닌, 일, 그러니까 ‘노동’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그러므로, 샤넬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정이 결국 ‘노동의 자격’,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신의 노동물에서 소외되는 일반적인 임노동자가 아닌, 장인으로서 노동하는 자가 되는 자격과 여건을 갖추는 과정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셈이다. 남자옷을 입은 채 귀족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샤넬의 모습에서 온몸으로 사회와 부딪치고 좌충우돌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샤넬이 결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자옷을 입고 다니긴 하되 지배계급 남자들의 지위를 정말로 위협하지는 않아서였을 것이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에서 힐러리 스웽크가 잔혹하게 살해된 것은 그녀가 ‘감히 남자들의 영역을 침범한’ 데에 대한 보복과 응징이 아니었던가. 그에 비하면 샤넬의 남자옷 차림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페미닌한 옷을 입지 않는다고 그에게 툴툴대는 에티엔의 태도가 딱 그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새로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게 기꺼이 사줄 만한 옷을 만들어 제공한 셈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샤넬의 성공은 어쩌면 귀족 시대에서 부르주아 시대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간 유럽에서 복장과 표식, 그로 인한 ‘인간의 몸에 두른 상징’의 표준을 귀족의 것에서 부르주아의 것으로 바꾸는, 시대적 전환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공로의 결과라 할 수도 있다. 바닷가의 억센 어부 노동자들의 작업복에서, 고아원에서 살던 시절 제복에서 영감을 받은 그녀의 소위 ‘심플한’ 옷은, 귀족의 아내보다는 부르주아의 아내와 딸들에게 일차적으로 어필하는 옷이었다. 지금도 샤넬을 선호하는 이들은 전문직 커리어 여성 혹은 소위 ‘비즈니스 우먼’이다. 샤넬의 옷은, 페미니즘 이전의 시대에도 남자 노동자와 다르지 않게 땀을 흘리며 육체노동을 해야했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평상시 즐겨입을 만한 옷도 아니었다.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샤넬에 대한 칭찬이 지칭하는 ‘여성’에 과연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얼마나 고려되었겠는가. 언제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은 패션 거장들이 만들어 트렌드를 일으킨 명품 디자인이 세상을 몇 바퀴나 한참 돈 끝에 세속적으로 한참 하락한 버전의 옷을 입는다. 적어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의 대사에 의하면 그렇다.


재클린 케네디 오아시스가 즐겨 입었고 심지어 케네디가 죽었을 당시 입었다는 옷,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서 소위 ‘청담동 며느리룩’이라 통칭되는 옷이 바로 샤넬 트위드 정장이라는 사실이 뜻하는 것. 그리고 오두리 토투가 젊은 시절의 샤넬을 연기할 배우로 낙점을 받았다는 것. (물론 샤넬의 현재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오두리 토투 대신 페넬로페 크루즈를 원했다지만.) 이 모든 것이 ‘샤넬’이라는 대명사가 드러내는 복잡미묘한 빛깔들과 연결된다. 적극 지지하고 존경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은근하고 뒤틀린 호감을 갖게 되는 대상. 그렇기에 매 상품마다 붙어있는 그 비싼 가격에 아이러니를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 샤넬은 그런 사람이다. <코코 샤넬>이 새삼 상기시키는 것 역시 바로 그런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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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 근데 영화가 좀… 느슨하다오. 처음엔 나도 ‘웬 연애놀음만 나온다’며 실망했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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