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캠피온 | 브라이트 스타 (2009) 단평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던 제인 캠피온의 신작 <브라이트 스타>는 놀랍게도 실화다. 영국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실제 사랑을 극화한 이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인더컷>을 제외하면 1999년작 <홀리 스모크> 이후 별다른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던 제인 캠피온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역작이다. (그나마 그 <홀리 스모크>도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지만.)


25살에 폐병으로 요절한 존 키츠는 죽기 몇 년 전 바느질과 패션에 두각을 나타냈던 패니 브론과 만나고, 그녀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온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3년간 계속된 이 사랑은 존 키츠의 시의 세계를 더욱 깊고 심원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키츠는 시인으로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호된 악평에 시달렸다. 어릴 적 부모를 여읜 뒤 만성적인 가난 때문에 의사 자격증을 따야 했던 그는, 시에 전념하기 위해 친구이자 시인이었던 찰스 브라운의 재정적 도움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었다. 찰스 브라운은 패니 브론을 “남자나 꼬시려 들며 시는 전혀 모른다”며 경멸했고, 심지어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시 세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겨 이들의 사랑을 번번이 훼방놓았다. 특히 키츠가 폐병에 걸린 이후에는 더욱, 그녀와의 사랑이 키츠의 병세를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라 여겨 번번이 그녀와의 사랑을 방해한다.


키츠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찰스 브라운의 반대뿐 아니라, 가진 것 하나 없었던 키츠에 대한 주변의 우려와 반대 역시 이들의 사랑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낭만적인 사랑이란 극렬한 반대와 억압 앞에서 오히려 더욱 찬란하게 불을 태우는 법이다. 가난 때문에 머뭇거리던 키츠도, 남자들의 구애가 장난이었던 브론도 점차 격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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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 스타>가 내뿜는 아름다움은 일견 상호 모순적으로 보일 듯한 요소들이 서로 상충하면서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있다. 이들은 서로를 끝까지 ‘미스터 키츠’와 ‘미스 브론’으로 칭할 만큼 당시 격식과 예법을 충실히 따른다. 브론의 동생들이 언제나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감시(!)한 만큼 단둘이 은밀한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었다. 서로 시구를 주고받으며, 가고 오는 데에만 며칠이 걸리는 편지로 서로의 연정을 확인하고 주고받는 만큼 지금 현대인의 눈에는 지나칠 정도로 억압적이고 답답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과 손을 맞대고 상대가 창밖에서 거니는 모습을 보며, 상대가 내는 자그마한 기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런 와중에 상대가 보낸 편지가 너무 짧다고 자해 소동을 벌이거나, “나비가 되어 함께 날아다녔으면 좋겠다”는 연인의 편지에 온 방안을 나비로 채우는 천진한 열정이 영화의 온도를 그 어느 다른 멜로영화보다도 뜨겁게 올린다. 이들의 ‘억압 속에 꽃피우는 열정’을, 제인 캠피오는 매우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그려내며 보는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이 영화를 먼저 접한 해외의 평들이 한결같이 “순결한 금욕주의 속에 빛나는 열정적 에로스”를 지적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측면에서다. 노골적으로 야한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 서로 깍지를 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거나, 시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선 에너제틱한 정서적 흥분과 에로스가 흘러넘친다. 이런 ‘은밀한 에로스’는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동안에도 계속된다. 엔딩 타이틀의 마지막 카피라잇 로고가 나올 때까지 벤 위쇼가 나지막히 낭송해주는 키츠의 시를 듣고 (자막으로) 보노라면, 시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사람조차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존 키츠의 시집을 사고싶을 정도다. 혹은 영화 초반에 시를 이해하고 배우고 싶다며 키츠를 찾아가 시 수업을 듣는 패니 브론의 장면이 새삼 환기되며 그 마음이, 그 심정이 새삼 다시 절절하게 다가오거나.


<향수>로 주목받은 벤 위쇼는 섬약한 외모 속에서 격정을 뿜어내는 존 키츠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게 연기하고 있고, <엘리자베스타운>, <골든에이지>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애비 코니쉬가 패니 브론 역을 맡아 사랑에 들떠 폴짝거리는 소녀와 현명하고 듬직한 반려자를 섬세하게 연기해 낸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리암 니슨의 아들로 출연했던 꼬맹이 토마스 생스터가 패니 브론의 남동생 사무엘로 출연해 어느 새 훌쩍 자란 모습을 보여준다. <내 책상 위의 천사>와 <쉘로우 그레이브>에서 주연을 맡았던 케리 폭스도 출연해 패니 브론의 어머니 역으로 듬직하게 패니의 어깨를 감싸준다. 영화제 중 상영이 아직 두 번(12일 및 15일) 남아있다.


ps.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린 글


ps2.  급하게 쓰느라 이 모양… 영화 보자마자 한 시간만에 휘갈겨썼으니. 그러니 어쩌면 이 ps2.야말로 진짜인데요.


‘격정적인 사랑’ 하니까 뭔가 대단히 규격화된 어른의 사랑 같은데다 자고 일어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영화에 대해 제대로 쓴 리뷰 같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이들의 사랑은 딱 사춘기 “소년, 소녀를 만나다”로 요약될 수 있거든요. 귀여워요. 너무 귀여워요. 사실 둘은 한번도 섹스를 안 하거든요. 자고싶다 어쩐다 하는 장면도 여자가 “널 위해 뭐든 할 거야”라고 은근한 암시를 건네자 남자가 “나도 양심이 있지”라며 정식으로 결혼한 뒤를 기약할 정도. 자해소동이니 뭐니 하는 것도 그러니까 딱 10대 중학생 소녀가 울며불며 난리치다가 팔에 1센티짜리 상처내는 것쯤으로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하긴 이들 나이가 20대 초중반이었단 말이죠. 제인 캠피온이 참 대단한 것도, 지금은 ‘대시인’으로 추앙받는 키츠의 이름에 너무 짓눌리지 않고 그 사람과 패니의 그 ‘소년, 소녀스러움’을 제대로 살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만큼 생동감이 넘쳐요. 오죽하면 이들의 철없고 귀여운 모습에 몇몇 장면에선 웃음이 막 터집니다. 그러면서 격식을 차린 옷과 대화, 동네에 퍼질 소문을 의식해야 하며 주변의 감시(!)를 받는 연애같지 않은 연애를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너무나 심각하고 진정이 넘치기 때문에 이상한 에로스가 넘치는 거지요. 뭐 뻔하고 통속적인 내용이라며 별로 안 좋아할 분들이 더 많아보이긴 하지만, 영문학에 조예가 깊거나 그쪽 빠거나 혹은 빠도 못 되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동경하는 저같은 사람들에겐 우왕ㅋ굳ㅋ@.@하며 눈물 뚝뚝 흘릴 영화 되겠습니다. 영화가 개봉되면 필히 다시 제대로 된 리뷰를 써야 할 영화.


ps3. 주인공 역을 맡은 애비 코니쉬는 “등발 좋고 덜 날카로운 니콜 키드먼”으로 보이는 면이 있어요. 까만 머리긴 해도 얼굴이 많이 바뀐 지금이 아닌 예전의 니콜 키드먼의 얼굴과 닮은 부분이 있어요. 다만 니콜 키드먼보다는 좀더 무던하고 둥글둥글하달까.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어쩐지 이런저런 면에서 <여인의 초상>의 예술적 실패 지점을 만회하려는 야심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ps4. 벤 위쇼와 애비 코니쉬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들을 감시(!)하는 애비 코니쉬의 어린 여동생의 모습을 보자니 <피아노>에서 엄마 뒤를 쫄쫄 쫓아다니며 엄마의 사랑을 감시(?)하던 안나 파퀸이 살짝 겹치기도. 하지만 이 소녀는 안나 파귄보다는 어쩐지 살짝 통통한 니콜 키드먼 아역으로 보여요. 얼굴은 안 닮았지만 무엇보다 창백한 피부에 빨간 곱슬머리 때문에.


ps5. 근데 제인 캠피온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대체로 나이가 좀 있는 듬직한 스타일이었는데. (뭐 돌쇠 스타일도 가끔.) 그들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벤 위쇼는 제인 캠피온 영화치고는 약간 낯선 팬시함을 영화에 불어넣어 주고 있기도 해요. 이 영화에선 그게 매우 성공적이기도. 그러고보니 벤 위쇼는 살짝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퇴폐미가 항상 있었던 듯.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4 Comments

  1. 아!부산이겠네요^^ 저도 국제영화제에서 송곳니를 봤어요.그게 이번영화제 마지막이긴 하지만.. 무시무시한 영화라서 긴장을 했는지 허리가 뻐근하네요.’빌리지’ 냉소적인 버전이라고 할까 뭐 그런영화였어요. 바다 마이 보고 가이소~~

    • 음, 뭔가 무시무시한데요?

      네, 부산입니다. 8일날 아침부터 출발해 와서 정신없이 뛰댕기고 있네요. 흐;;;

  2. 우와. 브라이트 스타.
    정말 보고싶었는데 티켓 없어서 못 봤어요.
    이렇게라도 읽게 되다니.. 기뻐요. ^^

    • 전 사실 (기자회견 때문에) < 는 비와 함께 간다> 보려다가 표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이걸 골랐던 것인데요. 기자회견할 영화도 못 보고 이렇게 빠져들어도 되나, 찔릴 정도로 영화가 너무 좋더라고요. 영화보다 혼자 펑펑 울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 정도 영화면 국내에 개봉하지 않을까 싶어요. 꼭 개봉해서 다시 볼 수 있었음 좋겠네요, 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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