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리브스 | 렛 미 인 Let Me In (2010)

Let Me In

역시 한국포스터가 훨씬 낫다.


<렛미인>은 헐리웃이 리메이크를 시도했다가 망쳐먹은 수많은 예와 달리, 드물게도 성공적인 작품에 속한다. 헐리웃 리메이크작 답게 특수효과가 눈에 띄고 조금 더 친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친절함’이 기존의 실패작들과 달리 오히려 주요 이야기의 줄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컨텍스트의 구성 쪽으로 집중됐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원작(스웨덴 버전)보다 오히려 더 격렬하며 암울한 분위기를 띄며, 강한 정치-사회적 맥락의 의미를 갖는다.


<렛미인>의 기본 줄기는 원래 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스웨덴 버전의 인상적인 장면들도 고스란히 반복하며, 마지막 엔딩 장면도 똑같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으로 1983년 3월, 뉴멕시코 주의 로스 앨러모스가 선택됐다는 건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로스 앨러모스가 어떤 곳인가. 세계 최초로 원자력실험연구소가 설립된 곳, 그리하여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수소폭탄이 개발되고, 최근까지도 ‘원인이 확인되지 않은’ 폭발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미국 핵실험의 중심지’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의하면, “‘고립된 자연환경’으로 인해 이곳에 1942년 세계 최초로 원자력실험연구소가 설립됐다”고 한다.) 더욱이 1983년 3월은 레이건 대통령이 일명 ‘스타워즈 계획’이라 알려진 SDI(Stratagic Defense Initiative, 전략방위계획)를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영화에 잠깐 삽입되는 레이건 TV연설 장면은 바로 이 SDI를 발표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장면의 자막 번역이 중략되는 건 매우 애석한 일이다.)


사실 미국은 70년대 후반부터 중, 남미에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좌파정권을 CIA를 앞세워 진복시키는 작전을 수행해왔고, 1983년 10월에는 소위 ‘미국민 안전보호’를 명목으로 중미의 작은 국가인 그레나다에 직접 침공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이 그저 스웨덴 버전의 <렛미인>을 리메이크한 버전이라고만 말하기 힘들어진다. 오히려 원작 소설 ‘렛미인’을 미국식 맥락에서 재해석한 버전의 전혀 다른 영화라고 칭해야 옳다. 그 결과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은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전시태세를 강화하던 당시의 미국-그리고 이 전통을 이어받은 부시의 미국-의 모순과 아이러니를 짚는 사려깊은 영화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더라도, 헐리웃 버전의 <렛미인>은 스웨덴 버전에서는 그저 희미하게만 처리됐던 뱀파이어 소녀와 남자 성인 보호자간의 관계가 좀더 섬세하고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영화를 차별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는 이 영화가 배경으로 선택한 설정들과 맞물려, 영화의 정치-사회적 함의를 더욱 풍부하고 다층적으로 만든다. 스웨덴 버전에서는 존재감을 애써 희석시켰던 소녀의 소위 ‘아버지'(실제로는 일종의 ‘가디언’)는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부터 강조되어 ‘숨겨진 주인공’만큼의 막강한 존재감을 갖는다. 뱀파이어 소녀 애비(클로이 모레츠)와 이 가디언 사이에서 일종의 착취관계의 성격이 보다 분명히 제시되며, 그들간 관계의 성질을 비롯해 그들 사이 복잡다단한 감정의 교류를 공들여 보여주는 장면들이 삽입되기도 한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애비가 가디언의 뺨을 쓰다듬는 씬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애비에게 줄 피를 위해 동네를 옮겨다니며 연쇄살인을 해왔고, 마지막에는 그 자신의 피를 애비에게 준다. 그는 분명 애비와 처음 만났을 당시 영화의 주인공 소년 오웬(코디 스밋-맥피)과 마찬가지로 ‘소년’이었을 것이고, 영화의 마지막에 애비와 함께 떠나는 오웬의 미래 역시 그와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커다란 여행가방에 애비를 숨겨 기차를 타고 함께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스웨덴 버전의 엔딩과 그림은 같되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Let Me In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으로 정체성을 부정당하거나, 스스로 부정하거나.


그러나 <렛미인>의 리메이크 성공에서 가장 큰 공은 세운 이는 무엇보다도 주인공을 맡은 어린 배우들인 클로이 모리츠와 코디 스밋-맥피라 할 수 있다. 외모에서부터 남들과 달랐던,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던 원작의 뱀파이어 소녀와 달리, 클로이 모리츠가 맡은 애비는 일견 미국의 어느 동네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평범해 보이는 소녀다. 반면 눈부신 실버 블론드를 자랑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스웨덴 버전의 소년과 달리, 코디 스밋-맥피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소년이다. (그는 <더 로드>에서 비고 모텐슨이 마지막까지 지켜주고자 한 아들을 연기한 바 있다.) 클로이 모리츠는 처연하고 격렬한 비밀을 안고있는 소녀의 복잡다단한 슬픔과 고통을 매우 능숙하게 연기해내며, 헐리웃판 <렛미인>을 스웨덴 버전과 전혀 다른 영화로 재창조한다. 스웨덴 버전이 더없이 신비로운 소녀와 이미 어린 나이에 삶의 지리한 고통과 외로움 알아버린 소년 사이의 교감을 강조했다면, 헐리웃 버전은 각자 고통과 비밀을 짊어지고 있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연대적 교감을 강조하되, 이 관계가 역시나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과 착취를 전제한 비극적 관계가 될 것임을 강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이들이 다른 해결책을 찾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이들의 앞으로의 선택에 달렸다.)


이미 국내에서도 일정 정도의 성공을 거둔 영화의 헐리웃 버전이기에, 관객들의 호오는 심하게 엇갈릴 듯하다. 스웨덴 버전은 사실 어른들은 모르는 소년과 소녀 사이의 비밀스러운 우정과 사랑에 집중하면서 다른 콘텍스트를 최소화했고, 담백하고 소박한, 그리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영화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헐리웃 버전은 스웨덴 버전에서 희미해졌던 다른 서브텍스트들을 충실히 살렸고, 그 결과 훨씬 어둡고 격렬해졌다. 스웨덴 버전이 ‘하얗게 빛나는’ 이미지라면, 헐리웃 버전은 ‘어둡고 격렬한’ 이미지다. 스웨덴 버전의 아련한 신비로움에 매혹됐던 이라면, 헐리웃 버전의 ‘세속적’인 변화가 몹시 놀랍고도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헐리웃 버전이 취한 다층적인 서브텍스트들의 매력은, 굳이 안 넣어도 되었을 것 같은 특수효과 장면같은 단점들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어느 버전을 선호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지만, 적어도 맷 리브스 감독과 배우들은 스웨덴 버전의 매력 못지 않는, 전혀 다른 매력이 숨쉬는 또 한 편의 <렛미인>을 탄생시켰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셈이다. 11월 18일 개봉, 15세 관람가.



ps. 2010/11/11(목) 프레시안에 기고. 원문 페이지는 여기


ps2. 이틀 전엔 화요일에 기고해놓고 11일 게재된다는 연락은 받았는데, 목요일 아침일찍 발행됐다가 다른 기사들에 묻혀서인지 나는 그 다음 주까지도 기사가 안 실린 줄로만 알고있었다. 그 상태에서 씨네21 보다가 거의 비슷한 내용의 리뷰가 실려서 낙담하고 글을 회수할까 했는데, 그 전 주에 이미 실렸더라.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ps3. 레이건 시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로스 앨러모스라는 사실은 워낙에 드러난 내용이라 다들 쉽게 지적하지만, 1983년 3월이 ‘스타워즈 계획’ 발표가 있었던 달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외로 잘 알려져있지 않은듯. 나도 처음엔 생각을 못하다가, 리뷰를 쓰던 중 갑자기 생각나서 ‘스타워즈 계획’을 따로 찾아보고 나서야 확인.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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