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좀 보자, 毒립영화!

올해도 드디어 서울독립영화제(서독제) 시즌이 돌아왔다. 올해 서독제는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9일간 상암CGV에서 열린다. 상영작은 모두 64편. 이중 초청작 20편을 제외한 단편 33편, 장편이 11편이 경쟁부문에서 상영된다. 모두 631편의 공모작 중 사전예심을 거친 작품들이다.


올해 서독제의 달라진 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두 가지는 첫째, 장소가 달라졌다는 점, 그리고 예산이 확 줄었다는 점일 것이다. 작년까지는 명동에 있던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렸지만, 인디스페이스가 작년 말 문을 닫으면서 상영장을 잃어버린 서독제는 결국 상암으로 향해야 했다. 또한 그간 영진위(1억 4천)와 서울시(6천)로부터 받았던 지원금을 올해 받지 못하게 되면서 예년보다 훨씬 줄어든 규모로 치러지게 됐다. 그러나 18일 홍대거리의 한 호프집에서 열렸던 사전감독모임에서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예산이 없어도 (감독들이)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예산이 없어도 영화제는 치러진다.” 다들 속으로는 울컥하는 숨을 삼켰을 테지만,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올해는 영진위와 함께 치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참석자들 일각에서 자그마한 ‘환호성’까지 일었다. 비록 사전감독모임에서조차 참석자들(주로 상영작들을 연출한 감독들)에게서 회비를 ‘각출’해야 했을 정도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형편이지만, ‘파트너’ 자리를 스스로 내팽개친 채 표류하는 영진위와 차라리 잘 갈라섰다는 좌절 반 격려 반의 의미리라. 복잡다단한 뉘앙스의 한숨과 포기가 함께 묻은 환호성이라, 함께 지르는 입도 듣는 귀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獨立’만으론 안 돼, 毒해야 돼


예산이 줄고 규모도 줄었지만, 독립영화의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하다. 이건 무엇보다도 올해 서독제의 슬로건과 포스터에서 잘 드러난다. “毒립영화 맛 좀 볼래!”라는 커다란 슬로건이 박힌 아래, 독이 뚝뚝 흐르는 사과를 번쩍 치켜든 손이 포스터의 메인 이미지다. “이런 시기에 독립영화는 ‘홀로서는’ 것으로도 부족하고, ‘독한 맛’까지 내뿜어야 한다”는 것이 조영각 집행위원장의 설명이다.


서울독립영화제2010

올해 서독제 포스터. '獨立'만으론 안 된다, 毒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 영화제의 ‘얼굴’을 대표하는 개막작과, 영화제의 의지가 온전히 드러나는 ‘특별초청’ 부문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 올해 개막작은 윤성호 감독의 따끈따끈한 신작인 <도약선생>이다. 서독제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이 영화는 엉뚱한 계기로 장대높이뛰기를 연습하게 된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윤성호 감독 특유의 포복절도할 유머와 날카롭게 반짝이는 풍자가 여전히 살아있는 작품일 것이라 기대된다. 영화가 처음 상영되는 개막식 당일날이 돼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특별초청 부문의 주제는, 바로 ‘4대강’, 아니 ‘死강사업’이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공사로 파헤쳐진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강과 주변 생태계의 모습들을 담은 작품들이다. 공사장을 기습점거한 환경활동가들의 싸움을 담은 작품도 있다. 각각 7분에서 24분까지 짧은 단편들이지만, 짧지 않은 여운을 남길 작품들로 보인다. 이밖에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 등 2개부문에서 수상한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와 김대승, 신동일, 강이관, 부지영, 윤성현 감독이 참여한 인권위원회 제작의 <시선 너머>, 게이들의 삶을 담은 <종로의 기적>, 장률 감독의 신작 <두만강> 등도 초청작으로 상영된다.


용산, 소수자, 그리고 우리들 삶의 섬세한 단면


경쟁부문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장, 단편을 막론하고 소재며 장르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용산을다룬 영화들 중 단순히 소재를 넘어 옹골찬 성찰까지 담아낸 영화들을 선정하느라 고심했다는 예심위원들의 총평이 인상깊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광주의 5월을 담은 영화들, 각종 상처와 폭력을 통찰하는 영화들, 그리고 우리사회 다양한 소수자들의 삶을 다루는 영화들. 충무로에서 만들어지는 주류 상업영화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삶과 사회의 다양한 면들을 비추고 때로 우리의 소박한 삶을, 때로 우리의 감추고싶은 부끄러움도 비추는 독립영화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들이다.


인디포럼도 그렇고 서독제 역시 그렇지만,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의 사전감독모임에서 볼 수 있는 얼굴들은 20대 초반에서 50대 후반까지, 이미 여러 작품들을 내놓은 중견감독들과 이제 막 첫 단편을 완성한 풋풋한 신인감독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경력을 자랑한다. 사실 영화감독들 중에는 ‘수줍은’ 성격의 소유자들이 많고, 카메라 뒤는 익숙해도 카메라 앞에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이 술 한 잔씩 걸치고 조금씩 입을 열다보면, 어느새 열렬한 수다쟁이들이 돼 있다. 원래 수다스러워서가 아니라, 특별한 공감과 감정이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섹션에서 상영되는 다른 감독들의 이야기, 영화를 찍으면서 겪었던 온갖 ‘모험담’들. 그리고 지향하는 가치들의 공통분모들. 그 와중에도, 다른 독립영화 감독들보다도 더욱 힘들게 영화를 만들며 그렇게 어렵게 신작들을 내놓은 소위 ‘아줌마 감독’들, 남들이 굳이 외면하려 애쓰는 가치들에 카메라를 들이미는 패기만만한 감독들, 그윽한 눈으로 말은 아끼되 평범한 우리들이 감히 보기 어려워하는 곳을 직시하는 용기있는 감독들이 우리 눈앞에 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그 평범함에 쉽게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속에 뜨거운 불꽃을 꽈악 잡고 있는 이 사람들. 그리고 웬만한 매체들의 기자들이 그냥 넘어가는 이 자리에 굳이 참석해 감독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수의 특별한 영화글쟁이들. 기자를 (타의로) 그만두고도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 내게는 참 다행이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당신을 깨울, 약이 되는 독을 품은


모임에 참석한 감독들이 앞에 나와 하나같이 “상영할 기회가 없었는데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게 돼 기쁘다”는 말로 인사말을 전했다. 한 해만 해도 무수한 독립영화들이 만들어지지만, 극장개봉의 기회를 잡는 영화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 두어 번의 상영기회와 ‘관객과의 대화’를 갖는 영화제에서의 상영이, 지금 독립영화 감독들이 가장 지향하는 무대일 가능성이 크다. 상영기회가 흔치 않은 독립영화의 현실에서 서독제가 갖는 의미와 중요함이 그 어떤 말로도 충분히 설명되기 힘든 건 이런 데에서 드러난다. 그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앞에 평소 보기 힘든 무려 64편의 진수성찬이 차려진 영화 밥상이 놓였다. 어느 영화제가 안 그렇겠냐마는, 오늘(24일) 꽤 늦은 시간 한독협 사무실에 전화해보니 다들 영화제를 준비하느라 야근중이다. 독하디 독한 독립영화, 어쩌면 이전의 나를 쓰러뜨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강력한 독을 잔뜩 품고있는 이 영화들. 기꺼이 극장에 달려가 봐야 하는 이유는 내가 매조키스트여서가 아니다. 지극히 달달한 맛들로 마비된 감각을 깨워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만들, 약이 되는 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ps. 네오이마주에 송고한 글. (2010/11.24) 원문페이지는 여기. ‘에디터’로서 처음 쓴 글…일 게다. 그 직함 단 건 벌써 몇 달인데.


ps2. 사전감독모임(겸 기자회견, 18일)에 참석한 뒤 그 취재기로 써야했던 글인데 너무 늦게 올리는 바람에 ‘생생함’은 빠졌다. 대신 올해 서독제를 소개하고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는 차원으로.


ps3. 이 자리에서 <동백꽃 아가씨>의 박정숙 감독과 참 오래 이야기를 했다. (올해 서독제에서 박정숙 감독의 신작 <첫사랑 – 1989, 수미다의 기억>이 초청작으로 상영된다.) 박정숙 감독과 나눈 이야기는 곧 네오이마주에 실릴 <레인보우> 감상문의 일부로.


ps4. 프레시안 기자시절 썼던 무수한 영화제 소개글보다 훨씬 마음에 든다. 이젠 ‘기사용’, 그것도 근엄한(!) 종합일간지용 기사용이라고 잔뜩 힘줘서 쓸 필요가 없으니까. 소곤소곤하고 감상적인 물기가 아주 없어지진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미칠듯한 만연체와 복문’이라는 나쁜 버릇도 많이 줄어든 편이고.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2 Comments

  1. 잘 읽고 갑니다.
    네오 이마주에서 보는 거랑 또 여기서 보는 게 맛이 다르네요.
    같은 글인데 왜 그럴까요 :)
    날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2.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어요. 흐흐. 블로그가 좀 ‘개인’이 앞으로 나오는 맥락 때문에 같은 글도 달라보이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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