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숙 | 첫사랑 – 1989, 수미다의 기억

<첫사랑– 1989, 수미다의 기억>은 1989년 이른바 ‘수미다 투쟁’을 소재로 한다. 일본에 본사를 둔 수미다전기는 70년대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을 설립하고 한국수미다전기를 운영했으나, 1989년 10월 14일 일방적이고 기습적으로 공장 도산 및 노동자 전원 일괄 해고를 통보한다. 그것도 고작 네다섯 줄이 적힌 팩스 한 장으로 말이다. 450명의 수미다 노동자들은 곧바로 농성을 시작했고, 노조대표 네 명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에 있는 본사 앞 길바닥에서 투쟁을 벌인다. 이 싸움은 238일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때 어떤 사건이 있어 왜 싸우게 됐는지, 그 결과 어떻게 되고 무얼 얻었는지 기록하는 데에 전력하는 영화는 아니다. 사건을 모르기 십상인 지금의 젊은 관객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으니 기억하라”고 강요하거나 당시 그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요란하게 찬양하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은 당시 싸웠던 이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현재’의 문제다. 이들은 그때의 경험으로 어떻게 바뀌었는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래서 이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첫사랑 - 1989, 수미다의 기억


 20년 전 원정투쟁 당시의 모습을 담은 영상과 이들의 현재의 모습이 계속 교차하면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진정한 승리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물론 수미다 투쟁은 (지금까지도) 드물게 외자기업 본사와의 합의에 도달한 ‘승리한 투쟁’으로 기록된다. 일본의 통상적인 쟁의 관례를 깨고 처음으로 합의문에 사측의 공식적인 사죄가 기록됐으며, 10월 14일의 해고통보가 무효화되면서 교섭 타결 바로 전달(1990년 5월)까지의 임금과 퇴직금, 퇴직위로금 등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한 언론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승리 거둔 처녀 노동자들”이라는 헤드카피를 뽑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성과’만으로 진정 승리했다 말할 수 있을까? 결국 공장은 결국 문을 닫았고 수미다 노동자들은 대책없는 일자리 찾기를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했는데 말이다. 원정투쟁을 갔던 네 명은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어려웠다. 일부는 전업활동가가 됐고 또 일부는 전업주부가 되거나 보험설계사가 됐다.


수미다 투쟁이 진정 ‘승리’로 기록될 수 있는 이유, 투쟁이란 이미 시작한 그 자체만으로 성공인 이유가 바로 이 영화 안에 있다. 수미다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 싸움을 계기로 스스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싸우던, 혹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까지 변화시켰다. 영화는 수미다 원정투쟁을 갔던 네 명 외에도, 그 싸움에 함께 하고 지지연대를 했던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상당한 비중을 할애한다. 수미다 동지들이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민중가요와 투쟁가를 부르며 그에 맞춰 율동을 하는 모습에 매혹된 이들 일본인 활동가들은 수미다 투쟁이 끝난 후 변화를 겪었고 또한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이 고스란히 이 영화에 담겨있다. 투쟁승리집회에서 한 일본인 활동가가 “’축하한다’는 말 대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머리를 숙여 “아리가토 고자이마스”라고 인사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숱한 ‘감동적인 장면’ 중에서도 최고다.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이 4차에 이르는 프랑스 원정투쟁을 비롯해 1년 넘게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현재, 이 영화가 더욱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죽도록 힘들고 결국 ‘패배’할지는 몰라도, 그 투쟁은 결코 실패도 패배가 아닐 거라는 나직한 위안과 격려가, 이제는 40대 아줌마이자 엄마가 된 ‘수미다 언니’들의 호탕한 웃음 안에 있다. 한 알의 밀알은 단지 뿌린 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다른 여러 곳에서도 동시에 싹을 틔우고 잎을 낸다는 사실을 생생히 증언하는 영화가 바로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이다.


다만 한 가지,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슬프고도 무서운 점이 하나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수미다 때처럼 똑 같은 이유로 고통당하며 싸워야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거? 나아가 필리핀 필스전 사건에서도 드러나듯 한국의 기업들 역시 지금 필리핀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곳곳에서 과거 일본 수미다가 저질렀던 것보다 더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거? 아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ps. 서울독립영화제2011 프리뷰 – 네오이마주 송고. 원문은 여기.


ps2. 이 영화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극장개봉 여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니 모두들 일단 서독제로 고고씽.

N.

극장에서 일한다. 말을 잘하지 못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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